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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영웅을 보내는 법] [영웅 보낸 국민들, 대통령은 없었다] ....

뚝섬 2024. 5. 2. 06:03

[미국이 영웅을 보내는 법] 

[줄기찬 비 맞으며 줄 서 영웅 보낸 국민들, 대통령은 없었다] 

[백선엽은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 

[6·25 참전했던 몽클라르·맥아더 장군… 영웅과 작별하는 방법, 우리와는 달랐다]

 

 

 

미국이 영웅을 보내는 법

 

왕들 무덤이 있는 영국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본당 바닥에는 1차 대전 전사자 중 한 명을 무작위로 뽑아 만든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다. 전몰 군인을 기리는 상징이다. 바닥에 있는 다른 무덤은 밟아도 되지만 이곳만은 안 된다. 1923년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결혼식 때 신부가 입장하던 중 전사자인 오빠 퍼거스를 추모하며 이 무덤 위에 부케를 올렸다. 이후 로열 웨딩이 있을 때 신부는 무명용사 무덤 위에 부케를 놓는다. 그리고 온 국민이 그 장면을 지켜본다.

 

▶프랑스 팡테옹은 조국을 대표하는 위인 81명이 묻힌 곳인데, 주로 문화 과학 쪽 인물이 많다. 퀴리 부부,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장자크 루소 같은 이름이다. 고인이 세상을 뜨면 상당 시간 역사적 평가를 거친 뒤 이곳으로 이장한다. 벽에 관이 들어갈 광중(壙中)을 파고 안장한 다음, 위인의 이름과 생몰년이 새겨진 석재 뚜껑을 덮는다. 안장 대상자는 대통령이 결정하는데, 프랑수아 올랑드 재임 때 레지스탕스 여성 4명을 동시에 이장했다.

 

▶미국은 연방 의사당의 로툰다 홀에서 유해 일반 공개(Lying in state) 의식을 치른다. 직경 29m, 높이 55m의 둥근 공간에 모여 연방정부가 고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한다. 대상에는 링컨, 케네디 같은 전직 대통령 13명이 포함돼 있다. 맥아더를 비롯한 육·해군 대원수급도 여럿 있고, FBI 초대 국장, 연방 대법원 판사의 이름도 보인다. 그리고 1958년 한국전쟁 무명용사도 이곳에서 의전 행사를 가졌다.

 

▶엊그제 같은 곳에서 대통령급 예우를 받는 조문 행사가 있었다. 지난달 8일 세상을 뜬 랠프 퍼켓 주니어 예비역 대령이다. 여야 지도부가 초당적 협조로 관련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양당 의원들이 나란히 섞어 앉아 고인을 추모했다. 전쟁 영웅 앞에 진영 구별은 무의미했다. 6·25 참전 용사인 고인은 1950년 가을 청천강 일대 205고지에서 중공군과 싸웠고, 수류탄 파편이 왼쪽 허벅지를 뚫었다. 그는 구조를 거부하고 전투를 지휘했다.

 

▶유럽 시골을 자동차로 여행하면 가끔 동네 입구 추모비를 본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산화한 이 마을 출신 젊은이들의 이름’이다. 낯선 여행객마저 숙연해진다. 미국에서는 말 6마리가 이끄는 운구 마차와 함께, 유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조기를 전달하는 군 참모총장의 사진을 본다. 이것이 ‘미국이 영웅을 보내는 법’이라고 생각했으나, 곰곰 따져보니 ‘미국이 영웅을 길러내는 법’이었다.

 

-김광일 논설위원, 조선일보(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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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찬 비 맞으며 줄 서 영웅 보낸 국민들, 대통령은 없었다

 

13일 장맛비가 내리치는데도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6·25 영웅'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시민분향소에는 추모객들이 긴 줄을 섰다. 추모객들은 예상 밖의 긴 줄에 서로 놀라면서도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희한하게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다는 생각들이었을 것이다. 거수경례하는 어르신부터 주변 3040 직장인, 엄마 손을 잡은 초등학생도 보였다. 이 분향소는 정부가 아니라 청년 단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신 전대협)'가 앞장서고 예비역 단체 등이 힘을 모아 차린 것이다. 1980년대 주사파 전대협을 풍자한 이름인 '신 전대협' 의장은 "정부가 안 하니까 우리라도 (백 장군을) 영웅으로 예우해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렇게 보내드릴 수밖에 없어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는 어른들과 학생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20대 대학생은 "6·25 참전 할아버지께 백 장군님 활약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찾아온 2만5000명 국민이 헌화했다고 한다.

동맹국 미국에서도 애도가 잇따랐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한국은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백선엽과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번영한 민주공화국이 됐다"고 했다. NSC는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에 '부산에서 판문점까지,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의 전시 회고록'이란 제목의 백 장군 영문 회고록 표지 사진도 올렸다. 전 주한 미군 사령관들도 "백 장군은 미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과 같은 한국의 아버지" "한·미 동맹을 강화한 진정한 영웅" "세계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백 장군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쏘라"며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격을 막아냈다. 역사가 짧아 '농민군' 수준이었던 국군을 이끌고 만든 기적이었다. 종전 무렵엔 미 대통령에게 한·미 방위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설득해 한·미 동맹 체결에도 공을 세웠다. 백 장군을 향한 찬사들은 결코 과하지 않다.

청와대와 여당은 백 장군 별세에 애도 성명 한 줄 내지 않았다. 국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조문하지 않았다. 백 장군을 12만 전우가 잠든 서울 현충원에 모셔야 한다는 각계 요구도 무시했다. 오히려 집권 세력은 백 장군이 일제강점기 20대 초반 나이에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로 낙인 찍어 매도하려 한다. 그러나 그가 근무한 1943년 무렵에는 독립군 부대 대부분이 만주를 떠나 러시아로 이동했다는 연구가 많다. "당시 중공군과 싸웠고 독립군은 구경도 못했다"는 백 장군 증언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초등학생 자녀와 시민분향소를 찾은 한 국민은 "나라의 영웅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그 나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정권은 김씨 왕조의 노예가 될 위기에서 국민을 구한 영웅의 별세를 외면했다. 밖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6·25 남침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백 장군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청년들이 대신 나서 백 장군 분향소를 차렸고, 줄기차게 내리는 장맛비 속에서도 줄을 선 국민들이 '6·25 영웅'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배웅하고 있다.

 

-조선일보(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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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은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

 

언론인이었던 나는 2009년 10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중앙일보 지면에 그 내용을 1년 2개월 동안 회고록 형태로 실었다. 이후 올해 초 병상에 눕기까지 그의 기억을 줄곧 들었다.

6·25 전쟁, 휴전 뒤 진행한 한국군 현대화의 험난한 여정에서 그가 쌓은 업적은 정말 대단했다. '이런 인물이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해 나는 관련 저서 8권을 냈다. 백 장군의 서거로 그의 전적과 업적이 잘 알려지고 있어 여기서는 더 적지 않는다.

인터뷰 전 그의 행적 중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만주군 경력, 특히 '간도 특설대'였다. 이 부분의 문제가 크다면 나는 회고록을 오롯이 집필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정말 간도 특설대라는 곳에서 독립군을 '잔인하게' 토벌했을까.

당시 만주에는 독립군, 나아가 항일 무장 세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곧 알았다. 193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만주는 일본의 강력한 관동군 통제 아래에 들어선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무장 항일은 거의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43년부터 해방 전까지 그는 그곳에서 일했다. 독립군은 눈에 띄지도 않았고, 그저 중국 공산당계 팔로군(八路軍)의 뒤를 쫓는 업무에 종사했다. 그마저도 팔로군을 찾을 수 없어 그가 속한 부대는 당시 베이징(北京) 인근 열하(熱河)까지 진출했다. 정보 수집과 대민 선무(宣撫)가 주된 작업이었다.

그러나 또 사람들은 묻는다. "왜 하필이면 일본군 앞잡이인 만주군에 투신했느냐"고. 그 점도 생각해봤다. 강점기 막바지 일본은 태평양 전쟁까지 꿈꾸면서 세계 최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본을 향한 저항도 필요했지만, 그 속을 잘 살펴 저들의 힘을 제대로 알아가는 일도 중요했다.

1920년 출생한 그는 나라를 직접 일본에 빼앗긴 아버지 세대와는 달랐다. 일본어를 교과과정에서 익혔고, 일본의 실재하던 힘에 주목하면서 그 바탕을 탐구하여 내 힘으로 앉혀보려는 실사구시 정신이 컸다. 따라서 그의 만주군 경력 모두는 그렇듯 크게 지적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명분과 의리'를 들이대며 친일(親日)과 부역(附逆)의 굴레를 그에게 뒤집어씌운다면 당시 일본 통치하에 남아 수도·전기·토목·군사·산업 등 모든 영역에서 일본의 역량을 학습하며 제 가정을 이뤄 오늘의 대한민국 정체성을 이룬 대다수의 한국인을 모독하는 일이다.

말년의 백선엽은 외로웠다. 김일성 군대 및 중공군을 막아낸 군공(軍功)과 한미 동맹의 큰 초석을 다진 업적은 함께 싸웠던 미군만이 제대로 평가했고, 그가 지킨 땅 안의 한국인들 상당수는 역설적이게도 그를 '반(反)민족'으로 몰았으니 말이다.

정부의 결정에 따라 6·25 전쟁 전우 12만여 명이 묻힌 동작동에 그를 안장할 수 없다. 대신 그는 대전 현충원에 묻힌다. 그의 공적에 견주면 유감천만의 일이다. 아울러 전쟁을 회고하는 우리 사회의 수준에 큰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10여 년 동안 인터뷰하면서 나는 그에게서 '이순신'을 읽었다. 명분과 의리에만 집착하는 정치권과는 달리 실재하는 힘에 주목하면서 싸움터에 끝까지 남아 적을 상대했던 조선의 명장 말이다. 백선엽은 달리 말하자면, '보통명사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

북한의 위협,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불안정성을 감안하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순신'이 필요하다. 착실하게 힘을 쌓아 나라와 민족의 안전과 번영을 이끄는 인재 말이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영전에서 이 점을 되새긴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조선일보(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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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했던 몽클라르·맥아더 장군… 영웅과 작별하는 방법, 우리와는 달랐다

 

2차대전과 6·25 영웅 佛 몽클라르 땐, 드골 대통령이 직접 주관
몽고메리·맥아더·패튼 등 명예 기려… 무명 용사에도 최고 예우

 

프랑스 파리의 발 드 그라스 성당에는 6·25전쟁 영웅 랄프 몽클라르(본명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장군의 묘가 있다. 묘비에는 '해방의 동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1·2차 세계대전에서 여러 공을 세운 몽클라르 장군은 6·25전쟁 발발 시점에는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상태였다. 그는 장군(중장)이 대대를 지휘한다는 것이 관례상 허용되지 않자 중령으로 계급을 깎아 참전했다. 그가 지휘한 프랑스 대대는 1951년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 공세를 막아냈고 이는 서울 재탈환의 계기가 됐다. 1964년 6월 작고한 몽클라르의 장례식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이 주관했다. 제복을 입은 대통령과 국방장관, 보훈처장 등이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고, 후배 군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6·25 전쟁 영웅 백선엽 대장의 빈소에 조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나라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영웅들, 조국을 대표해 동맹국에 기여한 이들의 명예로운 죽음을 극진히 대한다. 

온 국민 애도속 몽고메리 보내는 영국-1976년 4월 1일 영국 윈저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영국 육군 원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의 장례식이 '영국군 군장(軍葬)'으로 치러지고 있다. 몽고메리 장군은 2차 대전의 분수령이 된 이집트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을 대파했다. /블룸버그

 

'겨울전쟁(1939~1940년)'에서 소련을 패퇴시키고 핀란드의 공산화를 막은 핀란드의 전쟁 영웅 칼 구스타브 만네르헤임이 1951년 세상을 떠나자 핀란드는 국장으로 그의 장례를 치렀고, 헬싱키에 그를 기리는 박물관을 세웠다. 그가 한때 핀란드를 지배했던 적국 러시아의 장군까지 지냈다는 것이 영웅을 기리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1967년 이스라엘의 대(對)아랍 6일 전쟁을 이스라엘의 압도적 승리로 이끈 모세 다얀 장군의 1981년 장례식엔 메나헴 베긴 총리 등 정관계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다얀 장군은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의 공적(公敵)이었지만, 이스라엘엔 둘도 없는 애국자였다. 2차 대전의 분수령이 된 이집트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을 대파한 영국 육군 원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의 장례식은 1976년 영국군 군장(軍葬)으로 치러졌고, 1980년 그의 동상은 국방부 앞에 세워졌다.

1964년 세상을 떠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장례식은 시민 10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장으로 거행됐고, 1945년 독일에서 작고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 조지 패튼 장군의 장례식에는 프랑스·벨기에 등 8국 사절과 유럽 주둔 미군 최고위 간부들이 참석했다.
 

시민 10만명 國葬으로 맥아더 보내는 미국-오른쪽 사진은 1964년 4월 9일 미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시신이 마차로 운구되는 모습. 맥아더 장군의 장례식은 시민 약 10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장(國葬)으로 거행됐다. /미육군역사센터

 

2018년 9월 엄수된 미국의 전쟁 영웅 존 매케인(공화) 상원의원의 장례식에선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추도사를 했다.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가장 숭고한 것들의 표상인 애국자"라고 했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 또한 그가 애국자라는 점을 항상 인정했다"고 했다. 미 해군에서 22년간 복무했고, 베트남전쟁 때 적군에 생포돼 5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가 생환한 영웅에 대한 예우였다. CNN 방송은 그의 별세 소식을 전하는 내내 '미국의 영웅(American Hero)'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미 시사지 애틀랜틱은 매케인의 장례식이 갖는 의미에 대해 "애국자가 조국에 바친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다.

 

예우는 유명 인사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인 2009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델라웨어주 미 공군기지에서 열린 미군 전사자 귀환식에 참석했다. 오바마는 2011년 아프간전에서 동료를 구하느라 오른팔을 잃은 르로이 페트리 상사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했다. 오바마가 페트리 상사의 금속 의수를 맞잡은 사진은 국민에게 감동을 안겼다.

미국은 전쟁 영웅들의 이름을 항공모함, 탱크 등에 붙이는 방식으로도 그들을 예우한다. 미 해군의 주력 항모인 니미츠함은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옥진/김윤주/임규민 기자, 조선일보(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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