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원경왕후]
[단호히 물러나 ‘권력 중독자’ 아님을 증명한 태종 이방원]
[국가경영 위해선 개국공신, 처가식구도 쳐내... ‘태종 리더십’에 답 있다]
태종과 원경왕후
'킹메이커'에서 '정적'으로… 부부도 피하지 못한 권력 다툼
요즘 ‘원경’이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어요. 조선왕조 3대 왕 태종(1367~1422·재위 1400~1418)과 그의 왕비 원경왕후(1365~1420)가 주인공인 사극이에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딸로 태어난 원경왕후가 남편을 직접 고르고 임금이 되게 한 데다 직접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여걸’로 묘사됩니다. 원경왕후의 ‘원경’은 죽은 뒤 생겨난 호칭이며 생전에 쓰던 이름은 아닙니다.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의 역사 속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요?
싸움터에 나가 남편과 함께 죽겠다
“저 말이 왜 돌아온 것이냐? 우리가 싸움에 진 것이냐! 내 직접 싸움터에 나가 공(公)과 함께 죽으리라!” 1400년(정종 2년) 1월, 이렇게 소리를 지른 사람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의 부인 민씨였어요. 훗날 왕비가 돼 원경왕후로 불린 그 여성이죠. 이때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시점이었습니다. 왕자의 난이란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한 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골육상쟁(가까운 혈족끼리 서로 싸움)을 말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강지처인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이방우, 이방과,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이방연 6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의왕후는 조선 개국 1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태조 즉위와 함께 왕비가 된 사람은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였는데, 그는 이방번과 이방석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낳은 이방석을 왕세자로 삼았습니다. 다른 아들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죠.
1398년(태조 7년) 이방원의 주도로 정변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었습니다. 이때 왕세자 이방석이 살해됐습니다. 곧 신의왕후 소생의 둘째 아들인 이방과가 즉위했으니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었습니다. 이후 왕세자 자리를 노린 이방간이 군사를 일으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방간과 이방원의 군사가 격렬한 싸움을 벌이던 중, 이방원의 수하 한 사람이 화살을 맞아 말에서 떨어졌는데, 그 말이 도망쳐 이방원 집에 있던 마구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걸 본 이방원의 부인 민씨는 ‘우리 편이 졌다’고 생각해 “나도 싸우다 죽겠다”고 밖으로 나섰어요. 시녀 등 다섯 사람이 말렸으나 소용없을 정도였다고 해요. 제2차 왕자의 난은 결국 이방원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민씨가 대단한 강단과 용기를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헌릉. 태종(왼쪽)과 원경왕후 민씨(오른쪽)의 능이 함께 있어요. 원경왕후는 태종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태종은 원경왕후 능을 만들 때 그 옆에 자신의 능 자리를 만들었답니다. /국가유산청
남편이 왕이 되도록 도운 ‘18년 내조’
그런데 여기서 좀 살펴볼 점이 있습니다. 조선 개국 시점에 27세였던 민씨는 조선 여인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고려 여인’이었다는 것이죠. 고려 여성은 재산 상속을 받거나 제사를 지낼 수 있었을 만큼 가족 제도에서 조선 시대보다 차별을 덜 받았고, 정치적 활동 범위도 넓었어요. 또 하나, 민씨는 이후 조선 왕비들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왕이나 세자·왕자의 부인으로 ‘간택’된 것이 아니라, 고려 말인 1382년(우왕 8년) 유력한 가문의 자녀들끼리 혼인한 ‘대등한 관계’였다는 것이죠.
tvN 드라마 '원경'의 스틸컷. 남편 태종 이방원(왼쪽)과 함께 권력을 쟁취한 원경왕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TVING
당시 여흥 민씨 가문은 고려의 유력 명문가였고, 이성계는 변방 출신의 무장이었습니다. 혼인 당시 민씨는 만 17세, 이방원은 만 15세였습니다. 민씨는 신혼 때부터 내조에 적극적으로 힘썼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경영할 뜻을 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는데, 민씨는 능숙히 살림을 이끌어 남편이 공을 세우도록 도왔다는 거예요.
이방원의 집에는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기엔 부인 민씨의 빼어난 음식 솜씨도 한몫했다고 전해집니다. 민씨는 외모와 재주가 모두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문신 변계량은 민씨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어요. “맑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지혜롭다.”
조선 개국과 함께 후계 분쟁이 생길 조짐이 보이자 민씨는 남편을 왕으로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남동생인 민무구·민무질 등 4형제가 모두 매형인 이방원의 심복이 돼 활약하도록 했습니다. 개국공신 정도전 등이 왕자들의 사병(私兵)을 없애려 하자 몰래 집 안에 무기를 숨겨 놓아 훗날을 대비했다고 합니다.
왕비가 되자 불행이 시작됐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조선의 권력은 마침내 남편 이방원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1400년 12월 이방원이 조선 3대 왕 태종으로 즉위하자 민씨는 왕비 자리에 올랐죠.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태종의 후궁 간택을 둘러싸고 매우 큰 갈등이 일어났고,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를 폐비(廢妃·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함)할 생각까지 했지만 형인 상왕 정종이 말려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아들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내쫓은 일로도 큰 고통을 겪었죠.
하지만 원경왕후 입장에서 가장 큰 비극은, 태종이 민무구·민무질 등 자신의 남동생 4형제를 모두 죽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긴 것이죠. 태종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다음 임금 때 외척(外戚)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대해선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구분해 반대파를 척결한 것’이라는 긍정론과 ‘권력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행태’라는 부정론이 엇갈립니다.
남편보다 두 살 많았던 원경왕후는 남편이 상왕으로 물러나 자신도 왕대비가 된 뒤, 남편보다 2년 먼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이 왕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한 ‘킹메이커’였지만, 정작 왕이 된 뒤 두 사람은 정적이 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 협력과 갈등 모두 신생국 조선이 나라의 기틀을 잡는 데 기여했을 수도 있고, 권력은 부부 사이라 해도 나눌 수 없다는 냉혹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막장 드라마’ 주인공 같은 부부를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들은 세종대왕의 친부모였습니다.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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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히 물러나 ‘권력 중독자’ 아님을 증명한 태종 이방원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태종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하는 건 천하고금의 떳떳한 일”
승지들에겐 “18년간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충분하다” 밝혀
드라마 ‘태종 이방원’ 속 전위하며 울부짖는 모습 사실과 달라
역사 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시작됐다. 첫 회 방송을 본 소감은 ‘아쉽다’이다. 역사 속 생생함을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 첫 장면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1418년(태종 18년) 음력 8월 8일 모습이다. 비가 쏟아지는 경복궁 사정전 뜰에 신하들이 엎드려 ‘전위(傳位)의 명을 거두어 달라’고 외친다. 사정전 안인 듯한 실내에서는 태종이 두 달 전 세자로 책봉된 충녕(세종)에게 말한다. “저 승냥이 같은 자들이 전위하겠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서 화를 낸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용포와 머리를 풀어헤치며 울부짖는 부왕을 충녕은 그저 겁먹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과연 그랬을까? ‘태종실록’ 18년 8월 8일 기사를 보면 ‘큰비가 왔다’고 되어 있다. 비 쏟아지는 사정전 뜰 앞 장면은 제대로 고증된 것이다. 이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정오 무렵 태종은 의관을 정제하고 보평전(報平殿·훗날 사정전)으로 들어갔다. “옥새 찍을 일이 있으니 속히 대보(大寶·임금 도장)를 바치라”는 왕명을 전해 들은 승지들은 보평전 문 앞으로 달려와 취소를 요청했다. 태종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을 보내 “세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그 사이 대신들이 보평문 앞으로 몰려와 하늘을 부르며 목 놓아 울면서[呼天痛哭·호천통곡] 비상한 거조(擧措)를 멈춰달라고 요청했다.
태종이 전위 의사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이날 오전이었다. 경회루에 승지들을 불러놓고 “내가 재위한 지 벌써 18년”이라면서 전위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그 하나는 가뭄·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계속되니 하늘 뜻[天意·천의]이 떠나갔다고 했다. 실제로 사흘 전인 8월 6일부터 큰비가 계속 내렸다.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의 병이다. “묵은 병[宿疾·숙질]이 근래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물론 핑계였다. 정무를 돌보지 못할 만큼 왕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기록은 그 전후에는 없다. 태종은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하는 것은[父傳於子·부전어자] 천하 고금의 떳떳한 일로서 신하들이 감히 간쟁(諫諍)할 성격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드라마가 그려낸 태종과 충녕의 대화는 사실일까? 실록 기사를 보면 왕명을 받고 급히 달려온 충녕에게 태종은 보평전 옆문으로 나가 대보를 건네주려 했다. 하지만 충녕은 바닥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았다. 태종이 그의 소매를 붙잡아 일으켜 기어코 대보를 넘겨주었다. 몸 둘 바를 모르던 충녕은 대보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부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태종의 의지는 굳건했다. 충녕에게 경복궁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연화방(蓮花坊·서울 종로구 연지동) 세자전으로 갔다. 거소를 서로 바꾼 것이다.
신하들은 세자전에 가서 다시 왕위에 오르기[復位·복위]를 간청했다. 충녕 역시 부왕이 있는 세자전에 들어갔다. 드라마에서 태종이 충녕과 대화를 나눈 곳은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세자전 안이었다. 태종은 밤이 되자 충녕에게 말했다. “내가 전위를 말한 것이 두세 번이나 되는데, 어째서 내게 효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이렇게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다시 복위한다면 나는 장차 온전히 죽지 못할 것이다[不得其死·부득기사]”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북두칠성을 가리켜 맹세했다. 왕위에 다시 나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목숨 걸고 다짐한 것이다. 8월 10일 태종은 결국 왕위를 충녕에게 물려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8월 8일 오전에 태종이 승지들에게 한 말이다. 그는 “나의 상(像)과 모양은 임금의 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실록 총서를 보면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닮아서 ‘코가 높고[隆準·융준] 용의 얼굴[龍顔·용안]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얼굴 모양이 임금 상이 아니라고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태종은 또 “나는 위의(威儀)와 동정(動靜)이 모두 임금에 적합하지 않다”고도 말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은 왕위에 오르지 못할 사람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왕 노릇 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騎虎·기호], 또한 이미 충분하다[亦已足矣·역이족의]”고도 말했다. ‘역이족의(亦已⾜矣)’ 이 말이야말로 정치를 대하는 태종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가 정치를 시작한 이래 취했던 일련의 조치들, 예를 들어 정적 척살, 내·외척 제거 같은 행동들은 많은 오해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하다[已⾜]’라면서 과감히 권좌에서 물러남으로써 그는 권력 중독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산발한 머리로 피 묻은 손 위에 그릇 파편을 놓고 울부짖는 드라마 속 장면이 왜 필요한가? 태종실록 18년 8월 8일 기사만으로도 이렇게 생생한 이야기가 넘친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조선일보(2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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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앞두고 주목받는 ‘태종 이방원’ 리더십
그는 ‘권력의 화신’이 아니라 ‘탁월한 리더’였다. 형제를 죽이고 정적(政敵)을 제거한 냉혈한 군주였지만, 위기를 노련하게 돌파하고 미래를 한발 앞서 설계한 눈 밝은 지도자였다.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1367~1422) 얘기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태종 리더십’이 재조명받고 있다. 지난 주말 방송을 시작한 KBS 대하 사극 ‘태종 이방원’의 부제는 ‘가(家)를 넘어 국(國)으로’. 제작진은 “태종 이방원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자질과 권력자가 짊어져야 할 모든 숙명을 보여줬다”며 “격변의 시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리더 이방원의 이야기를 풀어내겠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번 주 출간된 ‘태종처럼 승부하라’(푸른역사)는 권력의 화신이나 유교적 군주라는 종전 이미지를 걷어내고, ‘정치 9단자’ 태종을 포착했다. 저자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오늘날 정치 지도자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태종은 한 줄기 빛이 될 것”이라고 썼다. 정치의 계절에 급부상한 ‘태종 리더십’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①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다
내년 초 ‘태종 이방원’ 출간을 앞둔 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은 “태종 리더십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공(公)”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지금 충(忠)보다 효(孝), 공보다 사가 득세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태종은 재위 기간 18년 내내 머릿속에서 공의 개념이 떠난 적이 없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왕위에서 밀어낸 것은 불효지만, 그것은 대공(大公)의 길이었다.”
태종은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혈친과의 대립도 피하지 않았고, 개국 공신들을 토사구팽해 500년 조선의 경영권을 확실히 다져 놓았다. 집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처남 민무구·무질 형제를 비롯해 세종 장인이자 사돈인 심온까지 처단했다. 국가 경영에 사적 요소가 끼어들 여지를 철저하게 차단한 것이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은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태종 같은 결단력을 가지고 사적인 위험 요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재위 말년에 세자 교체를 단행하고 66일 만에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준 다음, 세종의 정치 멘토로 말년을 보낸 것 역시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 박 소장은 “기업에서도 리더십의 마지막 단계는 차기 CEO를 누구에게 넘겨주느냐인데, 확실하게 기반을 닦고 보위를 안전하게 물려준 마무리는 세종도 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태종의 눈 밝은 선제 조치가 세종의 태평성대를 만든 반면, 미래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세종의 일 처리가 결국 세조의 찬탈과 손자 단종의 비극적 죽음, 사육신(死六臣)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센터장은 “동양에선 공을 지극히 하는 것을 지공(至公)이라 해서 성군(聖君)이 갖춰야 할 첫째 덕목으로 삼았다. 태종의 지공은 패덕(悖德)한 장자인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셋째 충녕을 세자로 올리는 결단을 내린 것이고,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나며 세자 충녕을 왕위에 올린 것이 최후의 지공이었다”며 “공이 붕괴한 현재 대한민국 정치권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했다.
② 미래 기획과 책임지는 리더십
태종의 리더십은 두괄식. 치밀하게 미래 그림을 먼저 그린 후에 현재 국면을 만들어갔다. 정도전을 제거할 때를 회상하며 태종이 쓴 표현이 ‘선발제지(先發制之·먼저 나서 사태를 제압한다)’다. 박현모 소장은 “태종은 탁월한 정보력과 판단력으로 사태를 파악한 다음,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귀재였다”고 했다. 처남인 민씨 형제를 제거한 것도,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처단한 것도 외척과 권신을 제거해 후계자 세종의 통치 기반을 안정적으로 만들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학계에선 “태종은 오명(汚名)은 자신이 받고 영광은 모두 세종에게 물려줌으로써 세종이 아무런 짐 없이 홀가분하게 국가 경영을 시작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줬다”고 평가한다.
박 소장은 “태종은 한마디로 책임지는 리더십을 보여준 인물”이라며 “우리가 한동안 책임지는 지도자를 못 봤기 때문에 더 값진 부분”이라고 했다.
경제적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백성들은 평화로웠고, 물산이 풍부해 창고가 가득 찼다.” 1422년 태종이 승하했을 때 받은 최종 평가다. 실록은 그의 재위 기간에 사방의 국경이 안전해 백성들이 전쟁 걱정 없이 살았다고 전한다. 고려 말 80만결이던 전국의 경작지가 태종 시대에 들어 120만결로 증가했다. 서울과 지방의 창고가 가득 차서 물로 주변을 에워싸 쥐의 침입을 막아야 할 정도였다.
③ 政敵의 아들이라도 능력 있으면 등용
태종은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해 적재적소에 썼다. 정적(政敵)의 혈친이라도 필요하면 중용했다. 정몽주의 두 아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줬고, 정도전의 아들 정진은 판서까지 올렸다. 태종실록에 나주목 판사 임명을 앞두고 두 사람을 고민하다가 좌의정 성석린에게 의견을 구하는 대목이 나온다. 성석린이 ‘일을 처리하는 재주는 정진이 낫다’고 하자 태종은 곧바로 그를 임명했다. ‘정도전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 개국을 반대한 목은 이색의 자식과 문인들도 품어 안았다.
태종이 인재를 쓰는 안목은 세종·세조 시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세종 시대 주역인 황희, 맹사성, 조말생, 장영실은 모두 태종이 발탁해 키운 사람이고, 세조 때 정승이 된 정인지는 태종이 장원급제자로 직접 뽑았다. 태종실록엔 “내가 전라도 절제사를 했다고 해서 전라도 사람만 등용해야 되느냐”고 신하들에게 따져 묻는 태종의 육성이 나온다. 이한우 센터장은 “태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 과거 시험에 합격한 유일한 왕이었고, 어떤 사람이 어느 자리에 적당한지 늘 공부가 돼있었다”며 “차기 대통령도 인사로 태종의 등용술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코드만 따지고 자기 편만 쓸 게 아니라 반대파라도 유능하면 발탁하라는 게 국민이 바라는 리더십”이라고 했다.
④ 사람 보는 눈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람을 보는 눈. 태종은 사람을 판별할 때 ‘곧음[直]’ 여부를 잣대로 삼았다. 곧음이란 스스로의 원칙에 입각해 덕(德)을 기르고 의(義)에 따라 행동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한우 센터장은 “태종이 ‘직’을 말한 사례를 전부 검색했더니 강직(剛直), 공직(公直), 충직(忠直), 눌직(訥直·말은 어눌하지만 마음속은 곧음) 등 열세 유형이 나왔다”고 했다. 최고의 ‘직’은 순직(純直). 마음속에 간사함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곧다는 뜻으로, 아들 세종의 품성을 이렇게 평했다. 태종 18년(1418) 세자 충녕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밝히며 “세자는 순직하니 임금을 맡을 만하다”고 말한다.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다.
측근인 하륜과 조영무를 중용한 것도 ‘질직(質直·바탕이 곧음)’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신하들이 하륜에 대해 불평하자 태종은 “하륜이 다질소문(多質少文)하다”고 달랜다. 바탕은 곧은데, 그걸 부드럽게 잘 표현해내지 못하는 성미이니 이해하라고 편을 들어준 것이다.
⑤ 탁월한 외교력
박현모 소장은 “조선의 군주 중에서 외교를 가장 잘한 사람”으로 단연 태종을 꼽았다. 태종 시대에 들어서 패권국 명나라와 국교가 정상화됐고, 일본·여진 등 주변국과 맺은 관계가 자리 잡혔다. 당시 신하들도 ‘태종의 외교력’을 국경 안전의 이유로 꼽았다. “명나라 천자가 사대(事大)의 지성(至誠)을 칭송하고, 왜국이 교린(交隣)의 도(道) 있음에 알고 복종했다.”(세종실록)
정안군 시절 명나라 황제 주원장을 만났을 때 그의 외교력이 한껏 발휘된다. 당시 산전수전 다 겪은 67세의 주원장은 확고한 요동 지배를 위해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외교 문서의 어투를 문제 삼아 아예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질’로 간 조선의 왕자 이방원은 주원장의 의혹을 씻어 외교 갈등을 해결한다. 이한우 센터장은 “위험을 감수하고 두 차례나 명나라 금릉을 다녀온 경험이 훗날 태종에게 중요한 외교 자산이 됐다”며 “조선의 실상을 명나라와 비교하면서 조선 영토에 대한 현실적 감각과 세계에 대한 열린 시야를 갖게 됐다. 한반도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조건은 뛰어난 외교 역량이라는 점을 새삼 보여준다”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2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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