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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말살] [푸틴 방북 시기에 복원되는 한·중 안보 대화]

뚝섬 2024. 6. 15. 07:27

[기록 말살]

[푸틴 방북 시기에 복원되는 한·중 안보 대화]

 

 

 

기록 말살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름이 없어지면 존재도 사라진다고 믿었다. 모세가 유대인을 이끌고 탈출하자 파라오가 그에게 이름을 지우는 벌을 내린 것은 인류 초기의 기록 말살형(刑)이다. 이 형벌은 고대 로마 들어 정교하고 가혹해졌다. 처벌받은 이는 조각상부터 건물 벽면과 바닥에 새긴 초상까지 모두 파괴됐고 업적을 기록한 공문서까지 지워졌다.

 

▶기록 말살을 당한 이 중엔 폭군 네로부터 2차 대전의 두 원흉 히틀러와 무솔리니까지 당해 마땅한 인물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록 말살은 권력자가 세상의 질서를 제멋대로 주무르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스탈린은 1930년대 대숙청 당시 행동 대장으로 부렸던 측근 예조프를 처형했다. 나아가 오늘날 출생지마저 불분명할 정도로 거의 모든 기록을 지웠다. 예조프의 어머니를 매춘부로 조작하며 없는 사실을 만들기도 했다.

 

북한은 3족을 멸하는 형벌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기록 말살형에 처한다. 영화배우였던 장성택의 조카사위는 장성택과 함께 처형당했는데 그가 나온 영화는 모두 다시 찍거나 얼굴만 교체하는 딥페이크 기술로 흔적을 지웠다. 정치범 수용소로 가면 그 이름과 사진은 모조리 말살되니 유령이 된다. 김정은이 ‘남북 통일은 없다’라고 선언한 뒤엔 ‘통일’ 단어도 말살 대상이 됐다. 평양 지하철 통일역은 이름 없이 ‘역’으로만 표시된다. ‘조국통일 3대 헌장기념탑’도 파괴됐다. 북한 국가 가사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에서 ‘삼천리’도 없어졌다. 북한은 얼마 전 화보집을 내면서 김정은이 2019년 판문점에서 트럼프와 만날 때 옆에 있던 문재인 대통령 사진을 지웠다.

 

그런 김정은이 기록 말살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정은이 2018년 5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주석과 다롄의 해변을 함께 걸었다. 그때 남긴 두 사람 발자국을 중국 당국이 금속으로 본떠 현장에 새겼는데 최근 완전히 지워진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은 중국이 송유관만 잠가도 온 나라가 휘청일 만큼 중국에 의존한다. 그런데도 러시아와 지나치게 밀착하자 시진핑이 매우 불쾌히 여겼다고 한다. 툭 하면 기록 말살 칼을 휘두르던 김정은이 이번에 자신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북한만큼은 아니지만 중국도 기록 말살이 잦은 나라다. 문화혁명 때 덩샤오핑의 사진이 지워졌고 몇 년 전엔 축구 스타 하오하이둥이 공산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득점 기록부터 소셜 미디어 계정까지 모두 사라졌다. 인터넷에 이름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으니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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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방북 시기에 복원되는 한·중 안보 대화

 

리창 총리와 악수하는 윤석열 대통령. /뉴시스

 

한·중 외교 안보 대화가 다음 주 초 서울에서 열린다. 양국 외교부와 국방부 고위 당국자가 동시에 만나는 ‘2+2′ 형식의 전략 대화로,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열린 것이 마지막이다. 이후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으로 9년간 열리지 못했다. 이것을 지난달 서울 한·중 정상회담에서 복원하기로 합의하면서 수석대표의 격을 차관급으로 격상했다. 중국이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황에선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개최 시점은 아직 조율 중이지만 18일이 유력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러시아 푸틴 대통령도 이날 평양에 도착할 가능성이 크다. 북·중·러 3자는 서로가 오랜 우방이지만 최근엔 미묘한 긴장 관계가 조성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러가 무기 거래를 통해 급속 밀착하는 사이 북·중 관계는 상대적으로 소원해진 것이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비자 발급을 까다롭게 하고 북·중 친선의 상징물을 없애는 등 이상 징후도 여럿 포착되고 있다.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북·러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는 날 서울에서 한·중이 고위급 안보 대화를 갖는 것은 상징적이다.

 

한·중 관계는 낙관할 수 없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을 적절히 관리하며 합리적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중국이 한국과 대화 복원에 나선 것은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미 연합훈련이 정상화되고 한·미·일 3각 안보 공조가 긴밀해진 것과 무관치 않다. 중국 입장에서도 한국과의 관계를 관리해야 할 필요가 커진 것이다.

 

한·중 외교 안보 대화에선 ‘책임 있는 대국’을 자처하는 중국이 북핵 폐기에 역할을 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북핵 폐기는 중국 국익에도 부합한다. 북·러의 무기 거래 문제도 비중 있게 다뤄야 한다. 이는 우리 안보에 직접적 위협이 된다. 북·러 밀착은 중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탈북민 강제 북송에 대한 우리 입장도 재확인해야 한다.

 

침략 전쟁을 일으켜 외교적으로 고립된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책임과 의무를 팽개치고 있지만 중국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세계와 무역하는 나라로서 국제사회의 평판을 무시할 수 없다. 당장 중국의 전향적 행동을 기대하긴 어렵더라도 이런 문제를 한·중이 논의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이견을 좁히고 오판을 방지하는 장치로 한·중 안보 대화를 활용한다면 양자 관계뿐 아니라 지역 정세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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