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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와 도라지의 '퇴장'] [종이 사전의 황혼]

뚝섬 2026. 7. 10. 06:21

[고사리와 도라지의 '퇴장']

[종이 사전의 황혼]

 

 

 

고사리와 도라지의 '퇴장'

 

해방 2년 차였던 1947년,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이 서울에서 처음으로 물가를 조사했다. 수십 품목을 들여다보던 조사원들은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체 가계 지출의 절반가량을 세 품목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쌀·장작·고춧가루가 46.3%였다. 당장 한 끼를 먹고 추위를 피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전국 단위의 소비자물가지수 출범은 1965년. 직접 가정을 방문해 쌀 한 바가지, 석유 한 통, 목욕탕 입장료 등 111개 품목의 가격을 손글씨로 장부에 적었다.

 

지금은 455개를 온라인 등으로 조사한다. 국가데이터처가 5년마다 들어오고 빠질 품목을 정한다. 이번 개편에선 챗GPT와 쿠팡 구독료 등 10개 품목이 새로 들어갔다. 인공지능 시대라 그러려니 하면서도, 빠진 품목에서 눈이 멈췄다. 반세기 동안 자리를 지킨 고사리와 도라지가 제외됐다. 나물 직접 사서 다듬고 무쳐 먹는 가정은 요즘 손에 꼽힌다. 차례상과 제삿상의 대명사였던 고사리와 도라지라지만, 요즘은 성균관까지 나물 3종 고집할 필요 없다고 권고하는 세상 아닌가. 여전히 제사 차리는 집 찾기도 쉽지 않다.

 

▶들고 나는 품목을 보면 세태가 보인다. 5년 전에는 넥타이가 빠졌다. 자율 복장제 확대와 노타이 문화 속에 넥타이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같은 해 프린터와 사진기도 제외됐다. 디지털 문서가 확대됐고, 사람들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30년 넘게 자리를 지키던 종이 사전은 2011년 개편 때 빠졌다. 전자 사전 등장 이후 책상을 지키던 국어·영어 사전의 시대도 끝이 났다.

 

▶올해 새로 들어간 음식 품목에는 마라탕과 밀키트가 있다. 가구당 월평균 지출액 대략 300원 이상이 포함 기준이다. 2005년에 피자와 치킨이 들어가며 패스트푸드 시대를, 2010년엔 원두커피가 입성하며 카페 문화의 본격 개막을 선언했다. 10년 전에는 초밥, 5년 전에는 쌀국수가 포함됐다. 이들만 봐도 대한민국 식탁의 다채로운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원년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은 멤버가 있다. 쌀·쇠고기·돼지고기와 소금·간장·된장이다. 한국인의 삶을 지켜온 ‘영혼의 식재료’다. 도라지·고사리의 퇴장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 것이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삐삐와 사진기가 스마트폰에 자리를 내주었듯, 매달 결제하는 AI 구독료 역시 언젠가 다른 신문물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물가지수는 우리가 통과 중인 시대를 담아내는 정직한 거울인 셈이다.

 

-어수웅 논설위원, 조선일보(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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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사전의 황혼

 

중학 시절 헌책방 앞을 지나다 보면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은 대개 책방에서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일 게다. 중고(中古)라도 사전은 새것과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았다. 환금(換金)이 보장되는 책이다 보니 용돈 궁한 친구들 중에는 멀쩡한 사전을 헌책방에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곤 집에 가서는 "잃어버렸다"며 또 용돈을 타냈다. 1970년대 초 정부가 사전을 '소비자 물가'를 측정하는 품목 중 하나로 지정했던 무렵 얘기다. 

 

▶그때는 고등학교마다 "몇 년 선배 중에 누가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웠다"거나 심지어 "사전을 씹어먹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곤 했다. 진위(眞僞)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사전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공부의 최종 완성 단계를 뜻하던 시절이었다. 위 세대 영문학자인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글 중에 1950년대 서울대 영문과 신입생 환영회 풍경이 나온다. 학생들이 교수들께 대학에서 공부하는 법을 묻자 권중휘 교수가 답한다. "자네들이 앞으로 영문학을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4년 동안 영어사전 보는 법이나 익히도록 하게."

▶사전은 지식 이상의 것이기도 했다. 1960년대 미국에 간 어느 한국 유학생은 후배 유학생들에게 짐 꾸릴 때 국어사전을 빼놓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영어의 나라에 가 웬 한글사전인가. 그 유학생은 외롭고 막막할 때마다 사전 속 모국어 낱말들을 들춰보며, 때로는 사람 얼굴처럼 쓰다듬기까지 해가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소설가 이청준이 전한 얘기다.

 

▶"무슨 말인지 몰라/숨 막힐 때/너는 마침내/편히 쉬게 해준다/사전이여/날숨인 소리와/들숨인 뜻을 우리는/숨쉬며 살거니와/…/너를 펼치며/씨 뿌리고/너를 펼치며/거둔다"(정현종 '사전을 기리는 노래'). 그러나 시인이 이렇게 찬미하던 사전의 시대는 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종이 사전보다 편하고 빠른 스마트폰을 두드린다. 

 

▶마침내 통계청이 45년 만에 사전을 소비자 물가지수를 결정하는 481개 품목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사는 사람이 드무니 종이사전 갖고는 물가를 얘기할 건덕지도 없어졌다는 말이다. 대세는 어쩔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사전이란 한 나라 문화의 높이를 재는 척도이다. 새로운 단어는 속속 생겨나고 같은 단어라도 뜻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말이나 외국어를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정의(定義)하고 쓰임새를 정리하는 노력은 디지털 시대에도 누군가에 의해 계속돼야 한다. 정부도 지원을 아껴선 안 된다. 종이 사전은 황혼을 바라보지만 사전의 가치와 존재 이유는 달라지는 게 없기에. 

 

-김태익 논설위원, 조선일보(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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