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을 분노하게 한 조병갑, 공주 山中에 잠들어 있다]
[동학혁명]
농민을 분노하게 한 조병갑, 공주 山中에 잠들어 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동학농민전쟁을 촉발시킨 고부군수 조병갑의 일생

충남 공주시 신풍면 한 산속에 있는 조병갑 무덤. 1894년 동학농민전쟁 후 조병갑은 고향인 산 너머 예산 대흥면으로 숨었다가 이곳 신풍면에서 생을 마쳤다. 조병갑 무덤 옆 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 묘가 있다. 두 사람 묘가 있는 이 능선 전체는 지금도 그 후손 소유다. 동학란이 진압되면서 조병갑은 전남 고금도로 유배형을 받았지만 이듬해 음력 7월 다른 동학 관련 탐관오리 278명과 함께 사면되고 이후 법부 민사국장, 한성재판소 재판관, 황실 비서원 주임관으로 승승장구했다. 만석보를 만들고 아버지 조규순 공덕비 비각을 만들며 돈을 착복한 행위는 개인적인 비리였지만, 역사적으로는 동학을 촉발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탐관오리 하나가 망국의 지옥문을 연 것이다. 정읍에 남아 있는 만석보 흔적과 조규순 공덕비, 그리고 공주 산기슭 상석도 비석도 없는 조병갑 무덤이 129년 전 흑역사를 보여준다./박종인 기자
역사 흐름을 바꾼 탐관오리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였던 조병갑(趙秉甲)은 탐관오리(貪官汚吏)였다. 더럽고 탐욕스러운 관리였다. 얼마나 탐욕스럽고 더러웠나. 탐관오리들로 인해 조선팔도에 민란이 들끓던 그때, 고종도 “조병갑이 형편없이 수령 노릇을 했다’(1894년 음4월 24일(이하 음력) ‘고종실록’)고 힐난하고 그가 저지른 일을 조사한 현지 조사관이 “이전에 듣지 못한 일[事未前聞·사미전문]”(1894년 7월 17일 ‘고종실록’)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탐욕스럽고 더러웠다.
그런데 조병갑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 흐름을 역류시킨 사람이다. 조선 근대사에 끼친 영향을 따진다면 이 조병갑을 능가할 개인이 없다. 그저 개인 탐욕에 눈이 멀어 만석보를 만들고 아비 공덕비 비각을 세웠다. 물세를 뜯고 비각 건축비를 착취했다. 착취당한 백성이 죽창을 들었다. 그 죽창을 꺾기 위해 정부에서 외국군을 불러들였다. 그 외국군끼리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다. 전쟁 결과 조선이 일본 손아귀에 들어가는,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간 역사를 조병갑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조병갑이 충남 공주 산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옆 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 무덤도 있다. 동진강에는 만석보 흔적이 남아 있다. 옛 고부 땅에는 조규순 선정비가 여태 서 있다. 그리고 역사 흐름을 바꾼 장본인, 조병갑이 저기 잠들어 있다.
동학의 시작, 1893년 최제우 신원
1800년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간택하고 죽었다. 김조순 사위이자 23대 국왕 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왕실 외척이 국정을 농단한 소년왕(少年王) 시대를 세도정치 시대라고 부른다. 국정은 농단당하고, 그 와중에 400년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물 위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얌전하던 조선 백성이 죽창을 들기 시작한 민란 시대이기도 했다.
1893년 3월 충북 보은에 동학교도 수만명이 집합했다. 1864년 처형당한 초대 교주 최제우의 복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충청감사 조병식은 이 요구를 무시하고 탄압으로 맞섰다. 정부는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급파해 동학군을 해산시키고 민원을 접수했다. 그해 11월 어윤중이 정부에 올린 보고서는 이러했다.
‘조병식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이후 몹시 가혹하고 끝없이 가렴주구하여 진실로 근래에는 들어보지도 못하였다.’(1893년 11월 7일 ‘승정원일기’, ‘조병식 탐학 장계’) ‘공주 백성 오덕근’을 비롯해 땅 가진 사람들은 모두 ‘간음했다’고 누명을 씌워 쫓아내고 한겨울에 집과 땅을 차지했다. 아산 백성 김상준은 관아로 끌고와 죄를 자백하라며 주리를 틀었다. 자백할 죄도, 돈도 없던 김상준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조병식에게 돈을 뜯긴 사람들 명단과 액수가 워낙 많아서 보고서에는 부록이 따로 붙어 있었다.
이 조병식은 이듬해 7월 15일 충남 면천에 구금된 뒤 19일 의정부 요청에 의해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7월 30일 고종은 조병식 석방을 명했다. 9월 23일 고종은 조병식을 사면하고 관직에 복귀시키라고 명했다.(이상 해당 날짜 ‘고종실록’)
그리고 4개월 뒤 전라도 고부에서 또다시 농민들이 죽창을 들었다. 이번에는 조병식 4촌(8촌이라고도 한다) 동생, 고부군수 조병갑이 문제였다.
고부군수 조병갑과 고종정권 ‘빽’
1892년 4월 28일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마치 양떼목장에 들어온 늑대처럼 악행을 즐겼다. 악행은 1893년 11월 30일 익산군수로 발령 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조병갑은 익산으로 떠나지 않았다. 그해 12월 24일 신임 고부군수 이은용이 황해도 안악군수로 발령이 되더니 1894년 1월 2일까지 신좌묵, 이규백, 하긍일, 박희성, 강인철 순으로 계속 신임 고부군수가 바뀌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서류상으로 고부군수가 일곱명이 바뀐 것이다. 결국 이조(吏曹)에서는 “조병갑이 세금 징수에 문제가 많았지만 새로 군수를 뽑으면 일을 더 못하리라 본다”며 익산으로 갈 조병갑을 고부에 눌러 앉혔다.(1893년 11월 30일~1894년 1월 9일 ‘승정원일기’)
왜 일곱명이나 후임이 갈려나가고, 왜 조병갑이 명령에 불복하고 자리를 지켰는지 이 난해한 인사 대행진에 힌트가 있다. 1894년 2월 조병갑의 악행이 폭로된 뒤 전라관찰사 김문현이 조병갑을 체포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의정부 정승들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칭찬한다고 연임시키더니[始也褒仍·시야포잉] 지금은 잡아오겠다고?’(1894년 2월 15일 ‘고종실록’) 관찰사 ‘빽’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중앙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고부군수 부임 직전인 1892년 4월 영동현감이던 조병갑은 중앙정부 기기국 위원으로 전임됐다. 그 무렵 왕비 민씨가 조카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병갑이는 그러하나, 그 색(色·관직) 외에는 나지 않아 다른 데로 하겠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민비 편지, ‘고궁 1178′) 일단 다른 직책에 임명한 뒤 상황을 보겠다는 뜻이다. 조병갑은 기기국 위원 재임 19일 만인 4월 28일 고부군수로 발령이 났다. ‘고부군수 조병갑’ 뒤에 고종-민씨 척족 세력의 강력한 ‘빽’이 작용했다는 증거다.

전북 정읍 동진강 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만석보 흔적. 조병갑은 기존에 있는 보(洑) 하류 쪽에 새로운 보를 만들고 물세를 징수해 농민 분노를 촉발했다./박종인 기자
역사적인 악행, 만석보와 공덕비
이러구러한 경로로 조병갑이 고부군수가 되었다. 동학을 이끌었던 전봉준에 따르면, 조병갑이 군수로 있으면서 저지른 비리는 이러했다.
‘첫째, 남의 산 나무를 벌목하고 주민을 강제 동원해 원래 있던 민보(民洑) 아래 또 보를 쌓아 물세를 징수하고 둘째, 논마다 세금을 추가로 걷고 셋째,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추가로 세금을 걷고 넷째, 부자들에게 불효, 음행 따위 죄목으로 걷어낸 돈이 2만 냥이 넘고 다섯째, 자기 아비 공덕비 비각 세운다고 천냥을 뜯고 여섯째, 나라 세금 낸다고 고급 쌀을 거두더니 정작 중앙에는 저질 쌀로 세금을 납부하고 이득은 횡령한 죄.’(동학농민혁명 사료 아카이브, 1895년 2월 9일 ‘전봉준 공초’, ‘초초문목(初招問目)’) 전봉준은 이 모두를 “수령이 홀로 행했다”고 답했다.
여러 죄상 가운데 만석보가 가장 컸다. 고부에 흐르는 동진강물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쌓아 놓은 둑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조병갑이 민력을 강제 동원하고 남의 산 소나무를 강제로 징발해 또 둑을 쌓고 물세를 신설해 챙겼다는 것이다. 악행은 부임하자마자 ‘처음부터 행했고’, 그 모든 악행 이득을 ‘혼자서 다 챙겼다’는 것이다.
1894년 1월 10일 고부 농민이 죽창을 들었다. 조병갑은 도주했다. 동학군은 고부관아 감옥을 파괴하고 창고를 도끼로 열어 벼 1400석을 풀었다. 그리고 1월 17일 농민들은 만석보를 파괴했다.(국사편찬위, ‘동학농민혁명사 일지’)

정읍 피향정에 있는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선정비. 조병갑은 이 선정비 비각 건축비를 주민에게 뜯어내며 자기 배를 채웠다. 일개 지방 탐관오리에게는 개인 비리에 불과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이후 조선 근대사 흐름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박종인 기자
되돌리지 못한 흐름
동진강은 다시 흘러갔다. 하지만 한번 역류를 시작한 역사는 되돌리지 못했다. 2월 15일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는 철저하게 농민 탄압으로 일관했다. 농민 반란은 더욱 확대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황토현에서 동학군에 패한 관군사령관 홍계훈은 조정에 원병 요청을 건의했다. 고종은 최측근이자 농민군의 타도 대상인 민영휘와 함께 국내 주둔 중이던 청군사령관 원세개에게 군사를 요청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 정부 공식 요청에 병사를 파병했다. 일본은 ‘조선 파병은 공동으로 한다’는 1885년 ‘천진조약’ 조항을 내밀고 일본군을 파병했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동학전쟁은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작전에 궤멸됐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청일전쟁 종전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1조에 일본은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는 조항을 삽입했다. 대륙 진출을 노리던 일본이 마침내 조선을 집어삼킬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역추적하면 조병갑이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지방관리, 중앙권력 비호를 받는 탐관오리 개인 비리가 떡하니 앉아 있다. 일개 관리 비리가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된 것이다.

충남 공주 조병갑 무덤 옆 능선에 있는 아버지 조규순 부부묘. 비석은 1970년 후손이 세웠다./박종인 기자
조병갑의 평화로운 말로
실록에 따르면 조병갑은 1894년 5월 4일 두 차례 곤장을 맞고 전남 완도 고금도로 유배됐다. 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12일 갑오개혁정부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이 고종에게 조병갑 재수사를 요청하고 고금도에 관리를 보내 조병갑을 서울로 압송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음력 5월 4일 고종은 개혁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을 모조리 거부하고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고 선언했다.(‘일본외교문서’ 28권 1책, p444~445, 7.조선 국내정 개혁에 관한 건 301. 왕궁 호위병 교대에 관한 국왕과 내각 충돌보고 1895년 6월 26일) 그리고 음력 7월 3일 동학과 관련돼 유배형을 받은 인물 279명이 일괄 석방됐다. 그 가운데 민영휘,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같은 척족 여흥 민씨들이 있었고 동학의 먼 원인을 제공한 조병식과 동학을 폭발시킨 집안 동생 조병갑이 들어 있었다.(1895년 7월 3일 ‘고종실록’)
조병갑은 1898년 양력 1월 2일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으로 권력에 복귀했다. 6개월 뒤인 7월 2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고공판이 있었다. 최시형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 배석판사 2명 가운데 한 명이 조병갑이었다. 1904년 6월 20일 조병갑은 황실 비서원 주임관인 비서원승에 임명됐다.(같은 날 ‘황성신문’) 1907년 현재 조병갑은 관직에서 은퇴한 뒤 충청도 청양에 살았다.(1907년 7월 3일 ‘황성신문’) 청양 북쪽 예산 대흥면은 양주 조씨 집성촌이다. 조병갑 숙부인 전 영의정 조두순 집이 남아 있다. 대흥면에서는 바로 이 집에 조병갑이 살았다고 전한다.(대흥향토지편찬위원회, ‘대흥향토지’, 2017, p527)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은 1885년에 죽었는데, 부인 이씨와 함께 산 너머 공주 신풍면 사랑골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조규순 묘비석’) 1970년 그 후손이 무덤가에 비석을 세웠다. 공식 기록에서 종적이 끊긴 조병갑은 바로 그 아버지 옆 능선에 묻혀 있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석물(石物) 하나 없지만 땅은 양지바르다. 두 무덤이 있는 산기슭과 마을 앞쪽 임야는 모두 양주 조씨 조규순 후손 명의로 등기돼 있다. 주인을 알리는 석물은 없지만, 마을 주민에 따르면, 해마다 봄이면 답사 단체가 무덤을 찾는다. 평화롭게, 근대사 물줄기를 바꾼 관리 하나가 그렇게 잠잔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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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동학혁명이 왜 전라도에서 일어났을까? 동학의 원료는 경상도에서 만들었다. 경주 사람 최제우 아닌가! 경상도에서 화약을 제조하였는데, 그 폭발은 엉뚱하게도 전라도에서 발생한 것이다. 혁명은 화약 폭발이다. 그 폭발로 전라도의 수많은 민초들도 희생당했고 아울러 양반 사대부(兩班士大夫)문화도 뿌리가 흔들렸다. 양반으로 상징되는 유교적 위계질서가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경상도에서 일어나야 할 동학혁명이 전라도에서 발생한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소작료(小作料)때문이다. 전라도는 평야지대이고 대지주가 많았다. 만석꾼이 수두룩하였다. 19세기 초반 다산(茶山) 정약용의 분석에 의하면 전라도는 대지주가 5%, 자작농 20% 소작농이 75%의 비율이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경상도는 농토가 부족해서 3000석 이상의 대지주가 나오기 힘들었다. 자기 논 몇 마지기 지어서 겨우 먹고사는 자작농이 많았다. 소작 인구가 전라도에 비해서 현저하게 적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소작료에 있었다. 전라도는 대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착취로 인해서 밑바닥에 원(怨)과 한(恨)이 서려 있었다. 최제우의 동학이 들어와서 휘발유 뿌려진 곳에다 불을 질렀다고 본다. 6·25도 그렇다. 경상도는 낙동강 이남이 보존되었다. 동학의 상처가 아물어가던 전라도에 또다시 6·25가 몰아닥치자 지주계급이 박살 났다. 만석꾼 부자들이 향유하던 고급문화도 질이 떨어지게 되었다. 동학과 6·25의 피해 정도에 있어서 전라도는 경상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피해를 본 것이다. 문제는 고율의 소작료 때문이었다.
롯데그룹을 보니까 걱정된다. 롯데는 본질이 부동산 임대업이다. 백화점, 호텔, 대형마트, 면세점이 따지고 보면 임대업 아닌가. 소상인들이 롯데에 입점(入店)하기 위해 줄을 서고 롯데는 고율의 임대료를 받는 사업을 해왔다. 잠실 제2롯데월드 123층의 그 광대한 공간도 결국 부동산 임대업을 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현대 자동차나 삼성 휴대전화같이 물건을 제조해서 외국에 파는 업체가 아닌 것이다. 임대료가 곧 소작료다. '고율의 소작료' 때문에 롯데 입점업체들의 원성이 조선 팔도 들판에 넓게 퍼져 있다. 롯데는 경주의 '최부자'를 모른다.
-조용헌, 조선일보(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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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東學革命):
1894년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종교적 성격과 정치개혁의 성격을 띤 민중혁명운동. 최제우(水雲 崔濟愚)가 1860년 동학을 창도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다 양반지배층의 반발로 체포되어 1864년 참형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계속 번져 그 후 30년 동안에 전국적인 확산을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으로 심한 부패현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862년 진주민란을 필두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70여건에 달하는 대소 민란이 발생하는 등 민중의 원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때마침 중앙정부는 2백여년 동안 탄압을 계속하던 서학(西學)에 대해서까지도 신교자유(信敎自由)를 보장하는 등 종교에 대한 완화정책을 쓰면서도 교조 최제우 이래 동학에 대하여는 탄압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 신도들의 원성이 더욱 컸던 것이다.
정부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광범한 계층의 민중을 집결하는데 성공한 동학은 사도난정(邪道亂正)ㆍ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한 최제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1892년 12월 삼례도회에서, 또 1893년 4월 보은에서 수만 명의 동학신도들이 집결하여 일촉즉발의 긴장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1894년 2월 5일 전봉준을 선두로 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못 이겨 관아를 습격,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萬石洑) 저수지를 파괴하고 해산한 것이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안핵사 이용태(李容泰)는 이때 봉기한 농민들을 동학도라며 탄압하자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4월에 보국안민(輔國安民)ㆍ광제창생(廣濟蒼生)을 부르짖으며 김덕명(金德明)ㆍ손화중(孫和中)ㆍ김개남(金開南) 등이 이끄는 수만 명 농민군이 체제를 갖춰 무장ㆍ영광ㆍ장성 등 전남북 일대를 차례로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추방하고 그해 5월 31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청했고, 6월 8일 청나라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 역시 천진조약에 의해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정부는 동학군을 회유하여 전주에서 강화를 맺고 휴전했다. 그러나 휴전의 결과는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일본군들이 왕궁을 점령하는가 하면 7월 26일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일본의 세력이 점점 팽창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동학군은 10월 12일 삼례회의를 열어 최시형(崔時亨)ㆍ이용구(李容九)등 북접 온건파의 반대를 뿌리치고 전봉준ㆍ김개남이 북상하게 되자 전국적인 혁명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전봉준의 수만 명 호남군과 손병희의 수만 명 호서군은 공주에서 관ㆍ일 연합군과 대결, 격전 분투했으나 근대식 무기와 훈련을 갖춘 일본군에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재기를 꾀했으나 밀고자에 의해 11월 순창에서 체포되어 그 이듬해 사형당하고 말았다. 동학혁명의 결과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차례로 1905년 을사조약, 고종퇴위, 군대해산, 사법권 박탈 등 침략의 수순을 전개하더니 1910년 한ㆍ일합방을 함으로써 조선왕조는 끝을 맺고 우리나라는 35년 일제강점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동학혁명을 농민들이 주축이 된 농민혁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동학신도들이 주축이 된 동학신도혁명이었다. 동학신도들은 이때 전국 80개 지역에서 봉기했으며 혁명군의 초기 성공 후 일시나마 호남지방 53개소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었고, 동학의 포조직 339개 전체가 동원되었으며 연인원 3백만 명이 이 운동에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오익제, 《동학과 동학혁명》).
[영향 및 의의]
1년에 걸친 동학혁명은 20여만 명의 순박한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수포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 운동의 결과는 짓눌린 민중에게 자각의식의 고양과 새로운 세계사적 안목을 심어주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 왔다고 보인다. 당시 동학혁명군들이 제시했던 이념과 사상은 근대 민주국가의 이념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당시 동학혁명군이 제시했던 폐정개혁안 12개 조항을 보면 그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탐관오리의 숙정,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정죄, 노비문서의 소각, 인재중심의 국가요원 선발, 천민의 대우개선, 무명잡세의 폐지, 지벌 학벌의 타파, 재무구조의 개선, 통일문제 등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일대 혁명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동학혁명이 이때 실패하지 아니하고 승리로 이끌어졌더라면 그 후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겪게 되었던 숱한 비운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훨씬 앞당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학혁명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을 정치사상적ㆍ사회적ㆍ문화적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신복용,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①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이 혁명의 결과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서구적인 사상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민중은 자신들을 주권자와 동일시하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위정자들로 하여금 권위주의적 정치의식을 반성하고 자각하게 한데서 동학혁명의 정치사적 의의를 찾을 수가 있다.
②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제도의 근대화를 저해하고 있는 계급 차별제도를 비롯한 각종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개혁ㆍ타파하려고 시도된 운동이었던 것이다.
③ 문화적인 면에서는 이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개되었던 육영사업ㆍ교육사업ㆍ한글보급운동ㆍ출판사업 등 다양한 문화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학혁명[東學革命] (원불교대사전,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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