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조선 대표 건달 권력자, 선조 아들 임해군] [한양도성 성벽.. ] [창의문]

뚝섬 2022. 6. 17. 09:35

[조선 대표 건달 권력자, 선조 아들 임해군(臨海君)] 

[한양도성 성벽에 담긴 역사] 

[창의문]

 

 

 

조선 대표 건달 권력자, 선조 아들 임해군(臨海君)

 

[박종인의 땅의 歷史]

 

한강 남쪽은 어디든 일본에 줄 테니 나를 살려내라”

 

경기도 남양주에는 조선 14대 국왕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 무덤이 있다. 혼이 저승으로 무사히 가도록 인도해주는 장명등은 무덤 아래 지붕과 몸체가 떨어져나간 채 팽개쳐져 있다. 임해군은 막내 순화군과 함께 백성에게 악명을 떨친 건달이었다. 폭력으로 모은 재화가 많아서 임진왜란 개전 초기 임해군이 살던 집은 난민이 떼로 침입해 불태웠다. 전쟁 기간에도 멈추지 않은 악행에 질린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順和君)을 가토 기요마사 부대에 넘겨버렸다. 임해군은 전쟁 후에도 악행을 일삼다 유배당한 뒤 살해됐다. 부서진 장명등은 그 악행에 대한 흔적이다. /박종인 기자

 

조롱당한 선조와 그 아들

 

임진왜란 소강상태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정유재란이 임박한 1597년 가을이었다. 장소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서울 동작진 포구였다. 서대문에 있는 모화관에서 명나라 총사령관 양호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남대문을 나가버렸다.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말을 몬 양호가 동작진에 도착했다.

 

양호를 붙잡으라는 신하들 성화에 선조는 가마를 타고 서둘러 남대문을 나섰다. 급한 걸음으로 성문을 나서는 왕을 보면서 길 위에 한성 주민들이 몰려나와 통곡을 했다. “명나라로 달아나겠다”며 북쪽으로 도주했던 왕이었던지라 이번에도 또 백성을 버리고 도망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 순진한 백성은 “중국 장수를 따라 강가까지 갔다 온다”는 선조 말에 ‘서로 조아리며 감격하여 울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 신뢰를 잃은 지도자는 그렇게 초라했지만, 순진한 백성이 기댈 언덕은 그 지도자밖에 없었다.

 

둔지산(현 대통령 집무실 북쪽)을 넘어 동작진에서 선조가 양호를 만났다. 양호는 강 건너 대기 중인 1000여 명군 기마부대를 지휘해 대규모 군사 훈련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명나라 사령관은 조선 국왕을 이리 책망했다. “왜 활 잘 쏘는 조선이 한 방에 일본에 무너졌는가.” 선조는 “천군(天軍) 위력이면 왜적쯤이야 굳이 평정할 것도 없겠다”고 공치사를 하며 겨우겨우 양호를 한성으로 복귀시켰다.(1597년 9월 12일 ‘선조실록’)

 

그런데 선조와 양호 대화 도중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 한 마리를 거칠게 몰고 달려와 양호를 가로막았다. 왕과 명나라 장수 대화를 끊어버린 이 용감무쌍한 사내는 선조 맏아들 임해군이다. 연산군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건달 권력, 그래서 조선 백성이 붙잡아 일본군에 넘겨줘버린 폭력의 상징 임해군 이야기.

 

건달로 자라난 왕자들

 

1583년 가을날 왕자를 가르치는 사부 하낙(河洛)이 사표를 내며 이리 말했다. “임해군(臨海君)이 역사서 공부를 거의 마쳐 가는데도 아직 그 줄거리(강령·綱領)조차 알지 못합니다. 제 죄이옵니다.”(1583년 음 8월 5일 ‘선조실록’) 열한 살짜리 다 큰 사내아이가 글 읽을 줄을 모른다는 말이었다.

 

임해군은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 학문에 힘을 쓰지 않고 종들이 제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어 폐단을 더욱 심하게 일으키곤 했다. 반면 동생 광해는 행동이 조심스럽고 학문에 부지런해 백성들이 마음으로 따랐다.(1592년 음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선조수정실록’은 인조 때 반(反)광해파인 서인이 편집한 책이니, 광해군과 임해군에 대한 이 평가는 객관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589년 선조 슬하 왕자들이 결혼을 하고 궁 밖에 집을 짓는데 저마다 남의 논밭을 빼앗아 땅을 넓혔다. 임해군만 아니라 여러 왕자들이 땅을 빼앗았고 뇌물을 대놓고 받았는데, 임해군은 연장자로서 가장 횡포해 조야가 근심스럽게 여겼다.(1589년 음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여러 왕자 가운데 여섯째 순화군도 마찬가지였다. 순화군은 ‘임해군이나 정원군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도성 백성이 그를 호환(虎患) 피하듯 하였다.’(1607년 음 3월 18일 ‘선조실록’) 여기 나오는 ‘정원군’은 훗날 인조가 된 능양군의 아버지며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 세 왕자는 실록 도처에 백성을 괴롭히고 사욕을 취한 대표적인 건달 권력자로 묘사돼 있다.

 

백성이 일본군에 넘긴 건달 왕자들

 

정부 내에서는 근심거리요 백성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였던 장남 임해군은 결국 세자가 되지 못했다. 1592년 음력 4월 28일, 전쟁 개전 직후 선조는 맏아들 대신 둘째 광해군을 세자로 선택했다. 그리고 임해군과 순화군에게 전국 각지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하라고 명했다. 세자 광해군은 국정을 대리해 국내에 머물라고 명했다.(1592년 음6월 1일 ‘선조수정실록’ 등) 본인은 명나라를 목표로 의주를 향해 떠났다.

 

근왕병 모집을 위해 함경도로 떠난 임해군과 순화군은 ‘좋은 말이나 보화를 보면 반드시 이를 빼앗았고’ ‘적이 바로 보이는데도 백성을 흩어지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이호민, ‘오봉선생집’24, ‘정문(呈文)’, 정례부대당(呈禮部大堂)) 또 ‘사나운 종들을 부려서 민간을 노략하고 어지럽히는가 하면’ ‘수령들을 몹시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민인백, ‘태천집’ 2, ‘용사일록(龍蛇日錄)’ 계사년 10월) 전시(戰時)를 분간 않는 만행 행각 속에 두 왕자가 회령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회령 사람들은 이들을 밧줄로 꽁꽁 묶은 뒤 성문을 열고 일본군에게 넘겨줘버렸다.(이호민, 앞 책)

 

반란을 주도한 회령 아전 국경인과 그 무리는 두 왕자를 객사 방 안에 꽁꽁 묶어서 물건처럼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혼자 말을 타고 입성해 이를 본 가토 기요마사가 “이들은 너희 국왕 친자(親子)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가하는가?”라고 놀랄 정도였다.(1592년 음7월 1일 ‘선조수정실록’: 이긍익, ‘연려실기술’ 15, ‘선조조고사본말’, 북도의 함락과 정문부의 수복)

 

기이한 북관대첩

 

석 달 뒤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모집해 일본군과 반란군을 제압했다. 두 왕자 구출은 실패했지만, 함경도를 회복한 이 전투를 ‘북관대첩’이라고 한다. 숙종 때인 1709년 이를 기념하는 북관대첩비를 함경도 길주에 세웠다. 비석은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도쿄 야스쿠니신사로 가져갔다가 2005년 반환됐다. 실물은 원위치인 함북 김책시(옛 길주)로 돌려줬고 경기도 의정부 정문부 묘와 서울 경복궁에 복제비가 서 있다. 전투를 이끈 정문부는 인조 때인 1624년 역모 혐의로 고문받다가 시종 “원통하다”고 하며 죽었다.(1624년 음11월 8일 ‘인조실록’)

 

임해군을 일본군에 넘긴 국경인(鞠景仁) 반란 토벌과 기요마사 부대 퇴치를 기록한 ‘북관대첩비’ 복제본. 경기도 의정부 정문부 묘에 있다. 실물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가 반환받고 원 위치인 북한에 돌려줬다. 북관대첩을 지휘한 정문부는 인조 때 모함으로 고문사했다.

 

삼남을 주고 나를 살려라”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에 전달된 강화 협상 조건은 대체로 ‘대동강을 경계로 한 명과 일본의 조선 분할 통치’였다. 일본군 수중에 떨어진 임해군과 순화군은 종전 무렵까지 전쟁 수행에 큰 장애가 됐다.

 

협상을 담당한 사람은 명에서 파견된 심유경이었다. 1593년 음력 3월 15일 심유경이 고니시 부대가 주둔한 한성 용산(현 서울 원효로 부근)에서 회담을 가졌다. 심유경은 선상(船上)에서 뭍에 있는 고니시와 담판을 벌인 뒤 조선군 사령관 김명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임해군이 사람을 시켜 이렇게 전했다. “우리를 돌아가게 해준다면 한강 남쪽 땅은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본에 다 줄 것이다(倘得歸國 漢江以南 不拘何地 任意與之·당득귀국 한강이남 불구하지 임의여지).”'(류성룡, ‘징비록’, 김시덕 역, 아카넷, 2013, p649) 영토를 줘서라도 자기를 살려내라는 것이다.

 

심유경은 명-일본 사이에서 문서 조작을 해가며 협상을 이끌던 모사꾼이었으니, 이 말의 신빙성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바로 며칠 전 임해군은 평안도 안변에서 “지금 휴전이 안 이루어지면 우리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게 된다”며 조선 정부 관리에게 경비 조달을 요구한 적이 있으니(1593년 음3월 4일 ‘선조실록’), 땅과 자기 목숨을 바꿔달라는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전후 막장으로 치달은 악행

 

전쟁이 끝났다. 정유재란이 터지기 전 가까스로 풀려나 목숨을 건진 임해군 행태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1600년 임해군은 인질 억류 시절 자기를 도와줬던 홍산군 이득의 노비 4명을 강탈해갔다. 1603년에는 특진관 유희서의 첩과 간통한 뒤 유희서를 청부 살해했다. 이듬해 수사 결과 임해군이 진범으로 밝혀지자 선조는 수사반장인 포도대장 변양걸을 고문하라 명했다.(1604년 음1월 1일 ‘선조수정실록’) 남의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하인을 시켜 끌고온 뒤 그 하인에게 짝을 지어 입을 틀어막고(1603년 음3월 9일 ‘선조실록’) 민가에 들어가 사람을 구타한 뒤 노비를 빼앗는가 하면 기생을 몇 년씩 불법으로 데리고 살며 사람 죽이기를 초개(草芥)와 같이 하였다.(1606년 8월 23일 ‘선조실록’) 동생 순화군은 의인왕후 상중에 빈전 뒤에서 궁녀를 강간하고(1600년 음7월 16일 ‘선조실록’) 술을 가지고 온 아낙을 옷을 벗겨 구타하고 눈먼 여자 생니를 뽑고 장석을시라는 여자 생니 9개를 쇠망치로 부수는 변태 행각을 벌였다.(1601년 음2월 23일 ‘선조실록’)

 

두 아들을 비호하던 선조는 결국 순화군의 군호를 삭제하고 유배 보내는 데 동의했다. 순화군은 1607년 음력 3월 18일 가택 연금 상황에서 죽었다.

 

임해군은 선조가 죽자마자 동생 광해군 정권에 의해 역모 혐의를 쓰고 1608년 전남 진도를 거쳐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됐다가 살해됐다. 유배소를 지키는 군관 이정표가 윽박질러 독을 먹게 했으나 거부하다가 목이 졸려 죽었다.(1609년 음4월 29일 ‘광해군일기’)

 

건달에 걸맞은 무덤 풍경

 

경기도 남양주에는 그 임해군 무덤이 있다. 자식 없이 죽은 탓에 입적시켜준 양자 후손들이 무덤에 비석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혼이 저승으로 무사히 가도록 인도해주는 장명등은 무덤 아래 지붕과 몸체가 떨어져나간 채 팽개쳐져 있다. 419년 전 실록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백성에 의해 포박돼 적에게 보내졌으니 극도로 사무친 원망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하였겠는가.”(1603년 음8월 6일 ‘선조실록’)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임해군 묘. 후손이 묘를 정비해놓았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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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성벽에 담긴 역사

 

백악산~인왕산 아우른 한양도성, 조선 시대 역사 관통하며 보수

 

이달 초 북악산(옛 이름 백악산) 북측 탐방로가 새로 개방됐다.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 이후 민간의 출입이 통제됐던 곳이다. 한양도성 성곽길로만 탐방할 수 있던 북악산을 이제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토끼굴과 북악스카이웨이 등 추가로 열린 출입구 4곳을 통해서도 오를 수 있다. 개방 전과 비교해 탐방객이 5배 늘었을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고 한다.

 

지난 6일 문화재청 출입기자단 10여 명이 시민 품으로 돌아온 탐방로를 함께 걸었다. 늦단풍 붉게 물든 산길을 따라 당시 김신조 일당과 우리 측이 벌인 교전 흔적이 뚜렷한 소나무를 지나 명승 백석동천에 이르기까지 3시간이 꼬박 걸렸다. 청운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서울 도심 풍경은 압권이었다. 경복궁과 광화문 너머로 직장이 있는 태평로 일대가 뻗어있고, 남산타워와 멀리 관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왜 태조 이성계가 백악산 능선을 따라 길게 뻗은 백악구간에서 한양도성 건설을 시작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북악산 북측 탐방로에서 보이는 한양도성.

 

하이라이트는 한양도성이다. 조선 왕조 도읍지인 한성부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 백악산과 낙산, 남산, 인왕산 능선을 따라 조성돼 전체 길이 18.6㎞에 이른다. 태조는 개국 직후 수도 정비 사업 중 한양도성 건설에 가장 큰 열정을 보였다. 종묘 공사 현장에 3번, 사직은 한 번 행차했으나 한양도성은 7번이나 직접 돌아봤다고 한다. 태조 이후 세종, 숙종, 순조 때 대규모 보수·관리 공사를 통해 그 모습을 유지해왔다.

 

한양도성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고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기별로 다른 돌 모양과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이 그대로 보인다. 가장 먼저 도성이 축조된 태조 때 사용한 돌은 거칠다. 1396년 1월과 8월, 두 차례 공사를 98일 만에 완공했기 때문에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썼다. 세종 때는 도성을 재정비하면서 메주 모양의 직사각형 돌로 다듬어 썼고, 임진왜란을 겪은 후인 숙종대에는 가로 세로 40~45㎝ 내외로 규격화해 이전보다 성벽이 더 견고해졌다. 순조대에 이르면 가로 세로 60㎝로 돌이 더 커진다. 홍성규 해설사는 “청운대 쉼터에서 곡장 전망대에 이르는 300m 구간이 한양도성 전체 중 축조 시기별 차이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했다.

 

시기별 개성을 뚜렷하게 내보이는 성벽을 보면서 한편으론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후대 왕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최초 축성 당시의 규격과 기술로 복원했다면 지금 한양도성은 어떤 모습일까. 무너지고 고쳐 쌓으면서 켜켜이 누적된 역사적 가치, 시대를 고증하는 스토리텔링의 매력도 반감됐을 것이다. 숭례문 복원 당시 일화가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문화재청은 ‘전통 기법으로 복원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개량 한복 입은 인부들이 거중기로 석재를 들어 올리는 쇼를 보여줬을 뿐 대장간에서 전통 못 하나 만들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우수한 재료와 발달된 현대 공법이 있는데도 ‘당시 재료를 그대로 쓴다’는 전통 강박 때문에 자승자박한 꼴이다.

 

우리 문화재 복원 철학도 이제 좀 유연해졌으면 좋겠다. 전통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21세기 기술과 과학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정신을 담아 보다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전통은 한순간의 최선이 아니라 누적된 최선을 통해 쌓여 간다는 것을 한양도성의 개성 강한 성벽이 말해주고 있었다.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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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한양 서북쪽 '창의문'... 광해군의 슬픈 역사.. 

 

조선시대 모습 잘 보존된 '창의문', 역사적 사건 '인조반정'과 관련 있어
광해군, 임진왜란 후 외교 정책 바꾸자 서인 세력이 반대하고 반란 계획해

 

창의문 빗장 부수고 들어가 왕 몰아내

 

한양 도성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창의문이 곧 보물로 지정된다고 해요. 문화재청은 서울 창의문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하겠다고 지난 1일에 밝혔지요. 창의문은 한양 도성의 서북쪽 인왕산 자락에 있는 작은 문으로 사소문 중에 유일하게 조선시대 모습을 간직한 문이에요. 자하문이라고도 하죠. 창의문이 있던 지금의 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고 물과 바위가 아름다운 개성의 자하동과 그 풍경이 비슷했대요. 그래서 자하골 또는 자하동으로 불려 자하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해요.

창의문은 조선시대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가치가 높기도 하지만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의 무대가 된 곳이어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에요. 과연 창의문과 관계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이었을까요?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냅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중국 명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강력해지자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나라 형편을 생각해 외교 정책을 바꾸었어요. 명나라를 큰 나라로 섬기던 정책에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 위치를 지켜가며 실리를 찾는 외교 정책을 펼치려 했어요. 이런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반대하며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는데 주로 서인 세력이었지요.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가 세운 나라를 섬기는 임금은 조선 임금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궁궐에서 쫓아내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잘못을 저지른 왕입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며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 중에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힘을 쓴 대북파 인물들이 세력을 얻게 되자 이들과 대립을 벌였던 서인 세력은 힘을 잃고 초라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어요.

◇창의문 빗장을 부수고 돈화문 지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 서인들이 살 길입니다."

서인들은 광해군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고 특히 이들 중에 이귀, 김류, 이괄, 이서 등이 앞장서며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웠어요.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 인물들은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의 아들인 능양군과 힘을 합쳐 군대를 모아 정변을 일으켰어요. 능양군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맏아들이었고, 정원군은 선조의 사랑을 받던 후궁 인빈 김씨가 낳은 아들이에요.

능양군은 자기를 따르는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의 서북쪽, 오늘날의 서울 은평구 역촌동 부근인 연서역에서 이서가 이끄는 군대와 합류해 홍제원과 세검정을 거쳐 깊은 밤에 궁궐로 진입해요. 이때 진입한 궁궐 문이 바로 창의문이었어요.

◇인조반정 

 

"창의문 빗장을 부수고 궁궐로 향하라!"

"어서 돈화문을 열어 반정군을 들어오게 하라!"

능양군과 반정군은 창의문의 빗장을 부수고 도성으로 들어가 창덕궁으로 향했고, 이미 궁궐 안에 있던 반정 세력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열어 반정 세력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였지요.

결국 반정 세력은 궁궐 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왕 자리에서 쫓아내고 권력을 잡았어요. 정변을 일으킨 세력은 능양군을 새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 임금이에요. 이처럼 서인 중 일부 무리에게 광해군이 왕 자리에서 내쫓기고 대신 능양군 즉 인조가 새 왕이 된 것을 '인조반정'이라고 해요.

창의문을 비롯한 사소문은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 도성 네 곳에 지은 네 개의 작은 문을 말해요. 사대문과 함께 한양 도성을 드나드는 문이지요. 그렇다면 사대문과 사소문은 언제 어떻게 세워진 것일까요?

◇사대문과 사소문의 이름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1394년에 나라의 도읍지를 개성에서 한양 즉 지금의 서울로 옮기게 했어요. 한양에는 종묘와 사직, 궁궐, 관청이 들어설 육조 거리 등이 지어졌고, 그 뒤로 성곽을 쌓는 공사가 벌어졌지요.

백악(북악산)-인왕산-목멱(남산)-낙산을 연결하는 성터를 결정하고 나서 10만이 넘는 백성을 불러 모아 성곽을 쌓게 했어요. 그렇게 공사해서 1396년에 한양을 둘러싼 성곽을 완성했고, 성을 드나드는 큰 문 4개에 작은 문 4개도 만들었어요. 바로 사대문과 사소문이에요.

사대문에서 남쪽은 숭례문, 동쪽은 흥인지문, 서쪽은 돈의문, 북쪽은 숙정문이, 사소문에서 동북쪽은 홍화문, 동남쪽은 광희문, 서남쪽은 소덕문, 서북쪽은 창의문이라는 이름이 각각 지어졌고요.

사대문과 사소문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주로 인(仁) 의(義) 예(禮) 덕(德) 등 유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을 문 이름에 넣어 지었어요. 조선 백성이 한양 도성 문을 드나들 때, 문 이름을 기억하면서 자연스럽게 유교의 가르침을 깨우쳐주려고 그랬다고 해요.

[함께 생각해봐요]

반정이란 왕이 무능하거나 포악하여 잘못된 정치를 거듭할 때 무력을 동원하여 그 왕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새로 왕을 세우는 것을 말해요. 조선시대에는 인조반정과 함께 또 하나의 반정이 있었는데 바로 중종반정이에요. 중종반정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사건일까요? 그 배경과 과정을 알아보아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조선일보(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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