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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얼룩진 신성한 땅, 예루살렘] [십자가와 초승달의 끝없는.. ]

뚝섬 2024. 7. 31. 10:01

 

[피로 얼룩진 신성한 땅, 예루살렘] 

[십자가와 초승달의 끝없는 복수극]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갖지 못한 도시]

['킹덤 오브 헤븐']

 

 

 

피로 얼룩진 신성한 땅, 예루살렘

 

최근, 트럼프의 예루살렘 돌발 발언으로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3대 종교가 탄생한 도시다. 현재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지만, 국제법상 어느 나라의 소유도 아니다. 서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신성시되는 곳으로, 현재까지도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예루살렘(Jerusalem)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를 뜻하는 곳으로,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 성지가 모두 모여 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있다가 그 이후에는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았다. 1917년 영국 정부는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 건설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밸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돈줄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전쟁 자금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후 수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이 시작됐다. 예루살렘은 1981,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픽사베이

 

오래된 분쟁의 시대, 떠돌게 된 유대인

 

유대인들은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중동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해 살았다. 그러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독립을 위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서기 135년 로마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모두 추방당했다. 그 후 유대인들은 나라와 땅을 잃고 유럽과 세계 각지를 떠도는 신세가 됐다.

 

유대인들은 유럽 각지에 흩어져 정착했지만, 여기서도 멸시와 탄압을 피하지 못했다. '유대인은 예수를 살해한 집단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고, 상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며 악착같이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돈밖에 모르는 민족'이라고 폄하하는 일도 흔했다. 흑사병 창궐과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죄 없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은 '우리는 신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며 언젠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19세기 무렵 이를 현실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시오니즘' '밸푸어 선언'


당시 유럽에서는 "단일민족은 민족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민족국가를 세워야 한다" '유대주의(Judeaism)'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시오니즘(Zionism·예루살렘 중심부에 성지가 있는 언덕 시온(Zion)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도 불린 이 운동을 펼치던 유대인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민족국가를 세울 기회가 되었다.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1917년 영국 국적의 유대인 로드쉴드에게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를 인정할 것을 약속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는 미국 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밸푸어 선언' 이후 영국은 유대인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했고,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아온 아랍인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갑자기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고 나라를 세운다는 건 이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랍인들은 영국의 이중적인 태도에도 크게 분노했다. 밸푸어 선언에 앞서 영국 고등판무관인 맥마흔이 1915 "아랍인이 오스만제국에 맞서 전쟁에 참가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랍인들은 영국과 유대인을 향한 폭동을 일으켰고,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밸푸어 초상화와 선언문 /위키미디어커먼스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분쟁의 본격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표면적인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1947년 승전국들의 합의에 따라 홀로코스트(독일의 유대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럽 유대인들의 이주로 시작됐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이스라엘)가 건설되면서 거주민들은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어 쫓겨났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 모인 유대인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는 모습. 액자 속 인물은 시오니즘 운동을 공식적으로 처음 주장한 오스트리아 국적의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 /이스라엘 외교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이 갈등이 깊어지자, 유엔(UN) 1947년 예루살렘을 국제법상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으로 선포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도시는 동예루살렘(요르단령)과 서예루살렘(이스라엘령)으로 분리됐다. 그러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전체를 수도로 천명했다. 그러나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예루살렘 전체가 수도라는 이스라엘 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후 옛 땅을 되찾으려는 팔레스타인 민족과 새로 얻은 나라를 지키려는 이스라엘의 무력 충돌이 70년간 이어졌다.  

6일 전쟁과 10월 전쟁. /플리커, 미국중앙정보국

 

그러나 이전부터 수천 년 이어진 종교적·민족적 갈등부터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국제·정치적 문제들까지 얽히면서, 이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누구도 손대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해왔다. 2000여 년 전부터 이곳은 각자 성지 회복을 꿈꾸는 세 종교 간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유럽 기독교 사회와 이슬람교도들은 중세 십자군 전쟁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통치,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등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대립해온 것이다.

 

70년 만에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손들어준 트럼프


1947
년부터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이라고 모든 국가가 준수해왔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0년 만에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손을 들어줬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AFP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 6일 백악관 연설을 통해 "이스라엘은 다른 모든 자주국처럼 자국의 수도를 결정할 권리를 가진 자주국"이라며 "이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할 때"라는 입장을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일(현지 시각)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공식 수도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한 뒤 들어 보이고 있다. /EPA 연합뉴스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의 지위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협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합의돼야 한다는 견해를 유지해왔다. 미국도 지금까지 2국가 해법*에 따라 예루살렘을 어느 국가의 수도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1995년 의회가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시행하지 않기도 했다.

*2국가 해법: 1967년 중동전쟁(6일 전쟁)으로 정해진 경계선을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를 각각 건설해 다툼을 중단하자는 평화 유지 방안.
 

 

 "예루살렘은 3000년 동안 우리의 수도" 정당성 주장


트럼프 대통령의 이같은 입장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평화를 위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며 환영 의사를 밝혔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12 10(현지 시각) 예루살렘 수도 인정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예루살렘은 3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수도였으며 다른 어떤 민족의 수도였던 적이 없다"고 밝혔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겠다고 밝힌 이후 전 세계 이슬람권이 강하게 반발하자 수도 인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신화통신 

 

AFP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네타냐후 총리는 이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것은 성경에 나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현실을 인정해야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국제법상 예루살렘이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유엔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새 인티파다 운동 전개" 분노 들끓어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유혈사태의 위험도 커졌다. 발언 직후, 팔레스타인 각지에서는 시위대가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들은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웠고, 유대인들이 예수의 탄생지라고 믿는 베들레헴의 크리스마스트리 전등도 꺼버렸다. 팔레스타인 교육부는 이날 휴교령을 내리고 교사와 학생들에게 항의 집회에 참가할 것을 독려했다. 

 

2017년 12월 6일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가자지구의 한 거리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AFP 연합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TV 연설에서 "(트럼프의) 이번 조치가 종교전쟁을 부추기고 팔레스타인을 끝나지 않을 전쟁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는 트럼프를 향해 "지옥의 문을 연 결정"이라며 비난하면서 "8일부터 새로운 인티파다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내 이슬람 단체들은 이날 공동 성명을 내고 "12 6일부터 사흘을 '분노의 날(days of rage)'로 지정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분노를 보여주자"고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미 국무부는 이날 "미국 시민권자는 이스라엘 여행을 자제하라"고 경고했다.

 

 저히 중립 지켜온 국제사회 "입장은 변함없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에 철저한 중립을 지켜왔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어떤 나라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쌍방 협의로 결정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모습. /조선DB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독일 대사들은 12 8(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 후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텔아비브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기 위한 준비를 하겠다는 미국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의 결정은 유엔 안보리 결의에 맞지 않고 중동 지역 평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영토로 간주한다" "예루살렘 수도 결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협상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EU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이어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의 수도여야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협상을 통해 결정되는 이뤄지는) 그때까지 EU 5개국은 예루살렘에 대한 어떤 나라의 통치권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AFP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도날드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이날 브뤼셀에서 28개국 정상회의를 마친 이후 트위터를 통해 "EU 정상들은 2개 국가 해법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확인했으며 예루살렘 관련 EU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트위터 캡처 

 

EU 5개국 대사들은 '2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도 밝혔다. 이들은 "2국가 해법으로 이어질 평화 협상 재개를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준비가 됐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지역 내 모든 국가가 침착하게 협력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AFP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도날드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지난 12 14(현지 시각) 브뤼셀에서 28개국 정상회의를 마친 이후 트위터를 통해 "EU 정상들은 2개 국가 해법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확인했으며 예루살렘 관련 EU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스라엘(The State of Israel)

 

이스라엘의 정식 명칭은 이스라엘 국(The State of Israel)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이주해 와 1948년 건국한 나라이다. 이스라엘이란 나라 이름은 '하느님이 지배하신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의 조상 야곱이 신에게 받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남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으며, 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토의 전체 면적은 20,770㎢로 한반도의 약 10분의 1 정도 크기이지만, 남북으로 470km, 동서로 최대 135km에 달하는 좁고 긴 모양 때문에, 사막과 고원 등 다양한 지형을 갖고 있다.

수도는 중부의 예루살렘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여, 각국 대사관은 모두 지중해와 인접한 텔아비브에 있다. 행정 구역은 6개 주로 나뉘며, 유대인이 이주해 오기 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 구역인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중동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크네세트라는 의회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며, 의회는 4년마다 총선을 통해 선출된 12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공식적인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지만, 의회 다수파의 지도자인 총리가 실질적인 행정 권한을 행사한다.

 

 통곡의 벽(Wailing Wall)

 

 예루살렘 서쪽 성벽(Western Wall) 일부를 통곡의 벽이라 부른다. 그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 비극을 지켜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이 성벽 앞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양지호 기자, 조선DB

 

이곳은 유대교에서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기도의 장소로,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 거리로 남아있다.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는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 성지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1929년에는 '통곡의 벽 사건'이라 불리는 폭력 및 대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종교 분쟁은 1928 9월 일부 유대교 신자들이 남녀가 따로 모여 앉아 예배를 올려야 한다는 유대교식 집회를 위해 벽에 막과 분리대를 설치하면서 시작됐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성지라 여기는 곳에 일방적으로 공사를 하는 유대인들에게 큰 분노를 느꼈고, 돌을 던지며 이를 제지하려고 했다. 당시의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유대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적 감정이 크게 악화됐다.

2차 세계대전 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에 속하였으나, 1967 6월의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해 성벽은 이스라엘로 넘어왔다.

 

예루살렘은 종교의 성지인 만큼 많은 종교영화의 배경이 되었다. 영화 '벤허'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미국 남북전쟁 영웅이었던 루 월리스 장군이 1880년에 쓴 베스트셀러 소설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1925년 프레드 니블로 감독이 연출한 무성영화 '벤허' 1959년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제작비 1500만 달러를 들여 만든 대작으로 20세기 최고의 종교영화로 손꼽힌다. 

 

 나탈리 포트먼이 연출하고 주연한 영화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를 다룬 작품으로 2015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며 화제를 모았다. 이밖에 예루살렘이 배경이 된 영화로 '예루살렘Z : 좀비와의 전쟁', '킹덤 오브 헤븐' 등이 있다. 

 

-구성 및 제작=뉴스큐레이션팀 오현영, 조선닷컴(1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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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누구의 땅인가

 

'완전' '거룩' 뜻 지닌 예루살렘
유대교·이슬람·기독교 얽히며 "누구의
聖地" 두고 싸움
대사관 이전 논란도 가세하며 "국제사회 공동관리" 의견 묵살
무장봉기 우려만 갈수록 커져

 

예루살렘의 역사는 극적(劇的)이다. 마치 누군가 정교하게 짠 대본 같다. 유일신(), 두 민족, 그리고 세 종교가 수천 년간 한데 얼려 크고 작은 서사(敍事)를 만들어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속에는 '평화' '완전함' 또는 '거룩함'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많은 종교인에게 예루살렘은 평생 순례하고 싶은 영성의 고향이기도 하다.

핵심은 동(
)예루살렘 올드 시티다. 성전산(Temple Mount)이라 불리는 안쪽 옛 터에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0세기, 그 바위 위에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다. 같은 자리에서 성전의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다. 결국 서기 72년 로마는 헤롯 성전을 무너뜨렸고, 7세기에 이르러 폐허 위로 이슬람의 역사가 덧대어졌다. 옛 유대 성전 터 위에 이슬람 성지가 들어섰다. 지금은 알 아크사 사원이 황금의 돔 사원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유대인들은 옛 성전 서쪽 벽(통곡의 벽) 앞에 모여 메시아의 임재와 성전의 재건을 대망한다. 그뿐이랴. 성전산 옆, 성묘교회를 중심으로 예수 십자가의 흔적들이 이어진다.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가 한자리에 겹쳐 있다. 지구 상에 이렇게 깊게 종교적 자취가 모여 있는 곳이 또 있던가?

예루살렘은 비극(
悲劇)의 무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이 도시를 각자 자신들의 수도로 선포하며 양보 없는 싸움을 해왔다. 2000 9, 이곳에서 시작된 제2차 인티파다(무장봉기) 4000명이 숨졌다. 이전부터 테러와 살상도 그치지 않았다. 거룩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잃어왔다. 선민(選民) 의식에 기대어 약속의 땅을 고수하려는 이스라엘과, 이슬람 성지를 침략자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무한 반복 중이다. 유대 성전 터 위로 이슬람 사원이 올라타 있으니 나누어 가질 수도 없다. 빼앗느냐, 빼앗기느냐의 싸움에서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유태인들의 성소인 '통곡의 벽'과 이슬람교의 성지 '오마르모스크'(오른쪽 뒤쪽). /조선일보 DB

 

답은 있다. 이 도시를 누구의 소유로도 인정하지 않고 국제 사회가 공동 관리하면 된다. 일체의 무기 반입을 금지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각자의 종교에 따라 성지를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안도 이미 오래전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은 바로 일축했다. 이 와중에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텔아비브에 있는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다시 3차 인티파다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전황 (戰況)은 악화되고 있다.

예루살렘은 교훈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건넨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가르친다. 어쩌면 (
)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성지를 일부러 이곳으로 모았는지도 모른다. 땅에 매몰되어 벌이는 분쟁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계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정작 중요한 것은 성지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평화임을 언젠가는 깨닫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선각자들이 있었다. 땅을 건네주고서라도 평화를 얻겠다던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수상은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냈지만 유대 근본주의자에게 생명을 잃었다. 회색분자라는 오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해야 한다고 소리쳤던 팔레스타인 출신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도 이미 타계했다. 갈등이 심화되는 비극의 시대, 예루살렘은 라빈과 사이드의 후예를 기다리고 있다. 민족과 종교의 정수(
精髓)가 고작 1㎢도 안 되는 올드 시티에 달려있다는 것은 자존심 문제다. 사람을 살려내고, 평화를 세우는 사명이 종교의 본령이라면, 언젠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 땅을 둘러싼 갈등이 그치고 평화가 도래하는 날, 그날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은 진정한 성지가 될 것이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조선일보(17-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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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오브 헤븐'

 

십자가와 초승달의 끝없는 복수극 


" 원하신다"
는 구호 앞세워 11세기 예루살렘 쳐들어간 십자군 인종 청소 하다시피 주민 학살

무슬림 영웅 살라딘이 탈환했으나 "모두 죽여버리면 된다" 증오심은 분쟁의 극단 오가며 여전한데 

 

살라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이 이름에는 성경 구약의 인물이 둘이나 들어 있다. 유수프는 '요셉', 아이유브는 ''이다. 그러니까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 요셉'이라는 뜻이다. 이 살라딘과 예루살렘 성의 기사 발리안이 벌인 피 말리는 공방전을 다룬 작품이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으로, 영화의 기원은 십자군 원정이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는 성지인 예루살렘을 짐승들이 모욕하고 있다며 파병을 주장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은 이교도에게는 해당하지 않으니 맘껏 죽이라며 교리까지 세탁했다. 우르바누스는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말로 연설을 끝냈다. 이 말은 나중에 십자군의 구호가 된다.

신이 원하셨던 그해 815일 십자군은 서유럽을 출발한다. 아랍인들이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유럽인들이 종교를 이유로 쳐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세금을 걷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을 폐쇄한 적도 없고 기독교인을 핍박한 기억도 없다. 십자군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대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웠다. 1099 6, 십자군은 예루살렘 성문 앞에 다다른다. 십자군은 한 달 만에 성문을 뚫었고 꿈에 그리던 성지에 입성한다. 이렇게 건설된 것이 에데사, 안티오키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십자군 왕국 벨트다. 요 대목에서 등장한 아랍의 영웅이 살라딘이다. 아랍 세계를 통일한 그의 최종 목표는 당연히 예루살렘의 재탈환이었다.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도중 벌인 살라딘의 보복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잘라낸 십자군의 머리를 투석기에 담아 날려보내는 것은 기본이었다. 양쪽 모두 인간에서 이탈한 채 누가 더 잔인할 수 있는지 경쟁하듯 베고 썰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대략 이 지점이다.

 

감독은 그 누구도 다시는 같은 소재로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어마어마한 볼거리를 쏟아놓는다. 섬광이 충돌하는 것 같은 기병전은 애피타이저다. 예루살렘 성을 놓고 벌이는 공성전(攻城戰)에서는 중세 전투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데, 성을 공격하는 위협적인 공성탑의 모습은 영화가 끝나고도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다. 전투만 죽어라 하면 영화가 아니라 게임이다. 캐릭터들이 펄떡펄떡 살아서 뛴다. 살라딘이 아랍 세계의 총사령관으로 떠올랐을 때 예루살렘의 왕은 보두앵 4세였다. 영화에서는 은색 가면을 쓰고 나오는데 문둥병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틴에이저가 제일 무섭다. 보두앵은 나이 열여섯에 500명의 기병으로 살라딘의 3만 대군을 격파한 전설의 사나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그는 겸손해진다. "신 앞에 서면 변명은 없어. 누가 시켜서 했다 혹은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건 안 통하니 명심해." 보두앵이 발리안에게 읊조리듯 들려준 충고다. 발리안과 보두앵의 여동생 시빌라 공주와의 로맨스는 설정이다. 속물인 남편에게 질린 시빌라가 발리안에게 끌리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시빌라는 남편인 기 드 뤼지냥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인물 하나는 훤했기 때문이다.

잘생긴 것 빼고는 특별한 재능이 없었던 기는 예루살렘과 살라딘이 처음 맞붙은 하틴 전투를 말아먹는다. 그걸 시작으로 십자군 도시들이 차례로 살라딘의 손에 넘어간다.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 성벽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살라딘에게 회담을 요청한 발리안은 성 안의 이슬람교도를 모조리 죽이고 이슬람 성소를 불태우겠다고 협박한다. 88년 전 성을 함락시킨 십자군은 인종 청소를 하다시피 이슬람 병사들과 주민들을 학살했다. 살라딘은 그런 참혹한 일을 재현하지 않았다. 대신 성안의 십자가를 떼어내 거리로 끌고 다니며 침을 뱉었다. 십자군에게는 그게 더 치욕이라는 것을 살라딘은 알고 있었다. 다만 모욕의 한계는 명확히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는 성묘 교회는 손도 못 대게 했다. 이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원정을 100년 이상 벌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서양과 동양의 전쟁은 끝난 것일까.

'킹덤 오브 헤븐' 개봉 2년 뒤에 나온 '킹덤'이라는 영화가 있다(싸구려 영화 아니다). FBI와 사우디 테러 조직 간의 피 튀기는 대결을 다뤘는데 폭탄 테러로 연인을 잃고 오열하는 요원의 귀에 대고 주인공은 말한다. "울지 마. 다 죽여버리면 돼." 테러를 지휘한 아랍 노인은 총격전 끝에 입에 피를 물고 죽어가면서 손자에게 속삭인다. "괜찮다, 아가. 모두 죽여버리면 된단다." 선뜩하다. 헤븐(천국)은 사라지고 킹덤(왕국)만 남아 증오심이 양쪽을 오가며 증폭되는 중이다. 세상의 분쟁이 하나씩 사라진다면 아마 이 갈등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십자가와 초승달(이슬람의 상징)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정욱 작가, 조선일보(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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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갖지 못한 도시, 예루살렘

 

다윗부터 6일전쟁까지 3000년 예루살렘, 치밀한 고증으로 서술
수많은 사람들이 탐내 긴 세월 피로 얼룩진 땅
이곳을 보고 무엇이라 얘기할까?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유달승 옮김

서기 70 7월 하순, 몇 달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6만명의 로마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예루살렘 성벽 너머는 50만명의 유대인이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 속에 연명하는 생지옥이었다. 병사들은 금화를 삼키고 탈출하는 예루살렘인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뒤졌다.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성전(聖殿)에 불을 질렀고 유대인들의 목을 베었다. 성전 수장고에 숨어 있던 여자와 어린이 6000명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유대 군벌들은 자중지란 속에 무너졌다. 현장을 목격한 역사가 요세푸스는 "태초부터 그런 잔인함을 용납한 도시는 어디에도 없으며, 한 세대를 그처럼 사악하게 양육한 시대도 없었다"고 했다.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땅

역설적이게도, 예루살렘은 파괴됐기 때문에 거룩함의 원형으로 남았다. 나라를 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파괴된 예루살렘을 애통해하며 경외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성전의 몰락을 예수의 계시가 진실이라는 증거로 삼았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는 신이 유대인들로부터 거둬들인 축복을 이슬람에 내린 증표로 여겼다. 마침내 예루살렘은 "하나의 신(
)이 사는 집이자, 두 민족의 수도이며, 세 종교의 사원이고, 하늘과 땅에서 두 번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가 된 것이다. '예루살렘 전기'는 기원전 1000년 안팎의 이스라엘 왕이었던 다윗으로부터,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태어난 독립국 이스라엘이 아랍 연합군을 궤멸한 1967 '6일 전쟁'까지 3000년의 역사를 짚어나간다. 저자는 이스라엘 독립에 큰 역할을 한 유대 명문가 출신으로, 케임브리지대에서 제정 러시아 역사를 전공한 논픽션 작가. 마치 삼국지를 읽는 듯 등장인물들이 생동하고, 현장 묘사에도 실감이 넘친다. 각주가 53, 정기간행물, 논문, 1~2차 사료로 구분된 참고문헌 목록만 25쪽에 달할 만큼 엄밀한 취재와 연구가 낳은 결과물이다.

"피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

이 도시에서 평화는 늘 짧았고 피와 보복의 시간은 길었다. 서양의 모든 정복자는 예루살렘을 원했다. 예루살렘을 품에 넣은 자는 서구 세계를 장악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대, 로마제국, 십자군, 아랍과 페르시아 제국, 나폴레옹도 그랬다.

 

수많은 제국의 왕과 영웅들이 한때 점령했으나 결국 놓아 보내야 했던 도시 예루살렘. 이스라엘은 이곳에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격리하는 콘크리트 분리 장벽을 세웠지만, 예술가들은 그 장벽까지도 풍자의 소재로 삼았다. 캄보디아, 브라질, 케냐, 중국 등의 빈민촌에서 벽화 작업을 해온 익명의 예술가‘JR’의 작품. /예루살렘=이태훈 기자

 

1099 7월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이슬람 성직자와 금욕주의 수도자 1만여명을 성전산에서 살해했다. 포로가 된 자들은 신발 한 짝 가격에 노예로 팔려갔다. 그로부터 100년이 채 안 된 1187 6, 후일 십자군을 몰아내는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은 예루살렘의 십자군 사령관 발리안에게 말한다. "우리는 너희가 과거 예루살렘 주민들을 다룬 것과 똑같이 죽이고, 노예로 삼고, 잔인하게 다룰 것이다." 살라딘의 정복 활동은 피로 얼룩졌지만, 그는 늘 아들에게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일을 경계하고, 거기에 몰두하지 말며, 습관으로 만들지 말라. 피는 결코 잠들지 않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정복의 열망은 나폴레옹도 사로잡았다. 나폴레옹은 1798 335척의 함선과 35000명의 병사를 데리고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가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에게 해군을 궤멸당해 중동에 갇힌다. 나폴레옹은 이듬해 "직접 예루살렘에 들어가 예수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 자유의 나무를 심고 전쟁에서 죽은 프랑스 병사들을 성묘(
聖墓)에 묻겠다"며 팔레스타인을 공격해 들어간다. 하지만 무슬림 지배자와 영국군의 협공에 만신창이가 된 채, 부하들을 버려두고 프랑스로 패주해야 했다.

◇살인도 사기도 "신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욕망은 수도자들까지 사로잡았다. 1846년 부활절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들이 성묘교회에서 누가 먼저 기도할 것인가를 놓고 부딪쳤다. 처음엔 십자가와 촛대 등잔을 휘두르던 이들은 결국 수도복 아래 숨겼던 총과 칼을 꺼내들었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오토만 제국의 군인들이 개입할 때까지 양측 수도사 40여명이 죽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뒤 스스로를 비잔틴 황제의 계승자로 여겼던 러시아의 황제들은 19세기가 되면 매년 2만여명의 순례자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제정 러시아 멸망의 한 원흉으로 지목되는 수도사 라스푸틴은 당시 예루살렘에 대해 "아테네에서 온 수녀들이 술을 만들어 팔았고, 성지에 주저앉은 러시아와 라틴유럽 여성들은 몸을 팔았다"고 기록했다.

"이 도시에선 사실의 역사에 대해 묻지 말라"

광신(
狂信)의 틈바구니에서 사기꾼들도 판을 쳤다. 대표적인 이가 구약성서의 비밀암호를 해독해 솔로몬의 보물 위치를 알아냈다며 사기극을 벌인 영국인 몬티 파커다. 그는 영국·러시아·스웨덴의 귀족들, 밴더빌트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까지 끌어들였다. 1911년 세 번째 발굴 시도 때는 예루살렘 성전산으로 숨어 들어가 바위 돔 경내의 땅을 팠다. 금세 발각돼 도망쳤지만, 이미 파커가 솔로몬의 왕관, 언약궤, 무함마드의 칼을 훔쳐갔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무슬림들은 "모든 그리스도교인과 영국인들을 죽이겠다"며 폭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파커와 일당은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훔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스라엘
이 독립한 뒤, 예루살렘의 뒷골목에서도 냉전이 벌어졌다. 미국 부영사는 CIA "막달라 마리아 교회의 황금 돔 수리에 80만달러를 지원하라"고 조언했다. "미국이 하지 않으면 소련의 KGB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가득하다. 이 책에 따르면, 다윗은 단순히 용감한 소년이 아니라 고대의 '스나이퍼'였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벽화를 통해 확인된 바, 고대 제국 군대에서 돌팔매 부대는 궁수들 옆에 편제된 특수 저격 부대였다는 것이다.

사람은 신을 예루살렘에 가뒀다고 믿었지만, 예루살렘은 늘 그 사람들을 지배해왔다. 역자인 한국외대
유달승 교수(이란어과) "각국의 종교문학에서 예루살렘은 관능적이고 활기 넘치는 미인이었다가 추잡한 매춘부로, 또 연인에게 버림받아 상처 입은 공주로도 그려진다" "역사 속 수많은 영웅이 미인을 탐하듯 예루살렘을 탐했지만 영원히 예루살렘을 얻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태훈 기자, 조선일보(1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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