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짱깨’의 제국, 중국을 다루는 팁] [수교 30년·단교 30년의 날] ..

뚝섬 2022. 8. 28. 06:05

[‘짱깨’의 제국, 중국을 다루는 팁]

[수교 30년·단교 30년의 날] 

[침공했던 중국에 우호적, 타이완에는 몰염치] 

['하나의 중국']

 

 

 

‘짱깨’의 제국, 중국을 다루는 팁

 

[김순덕의 도발]

 

※‘짱깨’가 혐오 용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짱개주의의 탄생’이라는 책을 추천함으로써 복권됐다고 생각한다. 책의 저자인 김희교 광운대 교수는 투쟁의 언어는 자국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했다.

 

2022년 8월 24일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한지 서른한 번째 되는 기념일이었다. 우리로 치면 기쁜 광복절인데 그놈의 러시아로부터 전면침략을 당한지도 딱 6개월 됐다.

“승산이 있느냐”는 질문에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길 가능성을 묻지 않는다”는 대답한 인터뷰 기사는 가슴이 먹먹하다. 그들에게는 승리가 ‘언제’냐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생떼 같은 내 가족이 죽는데, 거의 한국 영토만큼 되는 우크라 땅 5분의 1을 잃었는데, 어떻게 이대로 끝낼 수 있겠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시민들이 독립기념일(8월24일)을 맞아 거리에 전시된 러시아군 탱크와 장갑차 등을 구경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지금 푸틴을 멈춰 세우지 않으면 전쟁이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란 대사의 말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이번 전쟁은 중국-인도 간 국경 분쟁이나 시리아 내전 같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 권위주의 러시아제국이 과거 지배했던 약소국을 다시 차지하겠다며 패권야욕을 불태운 데서 비롯된, 제국주의 전쟁이어서다.

 

시진핑, 윤 대통령에 미국 몰아내라 제의

 

같은 날,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베이징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축하서신에서 “중한 양국이 좋은 동반자가 돼야 한다”면서도 “양측이 큰 흐름을 잡고 장애를 배제”할 것을 언급했다. 여기서 ‘장애’란 당연히 미국을 뜻한다. 대면만남을 고대한 윤석열 대통령과 달리 ‘만남’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유라시아 대륙 또 하나의 권위주의 제국 중화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을 몰아내라고 양국 관계의 조건을 제시한 셈이다.

 

8월24일 서울과 베이징에서 동시에 개최된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축사를 대독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이는 7월 7일 인도네시아 발리 한중 외교장관 회의에서 박진 외교장관이 밝힌 우리의 외교입장을 거부한 발언이다. 그때 박 장관은 이렇게 말했었다. “(한국의) 새 정부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중시한다. 자유와 평화, 인권과 법치를 수호하기 위한 국제사회 협력과 공조에 적극 동참할 것이며 한중관계도 보편적 가치와 규범에 입각해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자유와 인권과 법치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규범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이를 이례적으로 강조했다.

 

“중국, 6·25 남침 유감 표명” 밝히긴 했다

 

30년 전 한중수교를 맺은 1992년은 ‘탈냉전’의 시대였다. 한때 세계 최강대국의 상징이었던 낫과 망치가 그러진 붉은 깃발은 1991년 12월 26일 소련 해체선언과 함께 크렘린 상공에서 내려졌다. 중국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국제적 고립에서 탈피하는 것이 절실한 시기였다.

 

1992년 8월27일 중국 대사관 관계자가 서울 용산구에 마련된 임시대사관에서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한국은 88서울올림픽 성공으로 5000년 한중관계에서 중국보다 당당할 수 있었던 특별한 시기였다. 수교 때 6·25 전쟁 당시 중국이 우리에게 가한 고통에 대한 사과를 ‘문서’로 못 받은 점이 아쉽고 안타까울 정도다. 외무부가 보도 자료를 통해 “중국 측은 6·25 참전은 당시 중국의 국경지대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며 이는 과거에 있었던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밝혔을 뿐이다.

 

(아래) 한중수교 공식 발표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92년 8월22일 1면 기사. 중국이 6·25전쟁 참전에 대한 ‘유감의 뜻’을 밝힐 예정이며, 이에 앞서 한국은 참전에 대한 중국 측의 사과 혹은 해명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동아 디지털 아카이브

 

세(勢)의 변화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건 중국의 오랜 특징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한중간의 세도 변한 탓일까.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놓고 ‘3불’(사드 추가 배치 불가, 미국 미사일방어체계 불참, 한미일 3각 군사동맹 불가)을 주장하더니 이젠 ‘1한’(배치된 사드 운용 제한)까지 들이대고 나섰다.

 

거짓도 기정사실화 하는 짱깨중심세상

 

3불이란 2017년 말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오매불망 한중 정상회담을 위해 엿 바꿔먹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7년 10월 중국과 그놈의 3불 협의를 했던 남관표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2020년 주일 대사관 국감에서 “합의도, 약속도 한 적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상관이었던 강경화 외교장관 역시 2020년 10월 26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합의가 아니라 협의”임을 확인한 바 있다. 3불에 구애받을 의무가 없다는 얘기다.

대만의 대(對)중국협상 전문가 린원청이 쓴 ‘중국을 다룬다’에 따르면, 중국은 외교나 협상에서 윈-윈이나 정직을 중시하지 않는다. 국제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패권적, 자기중심적 중국식 세계관을 갖고 있어 스스로 ‘원칙’을 정하고 상대국에 지키라고 강요한다. 기만적 전략을 중시하는 고대병법의 전통이 뿌리박힌 데다 ‘협상은 선전수단이고 보복의 도구일 뿐’이라고 보는 공산당 기질까지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이 외치는 사드 3불1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린원청도 “중국이 제기하는 대부분의 원칙들은 일종의 함정”이라고 강조했다. 사드 3불1한 역시 사실이 아닌 것도 기정사실화해버리는 공산당 특유의 전략일 수 있다. 중국이 매우 잘하는 일이 통일전선전술이다. 국익을 외면한 채 그쪽 편에서 섰던 친중 정치인들에게 나라 운명을 맡겼다는 것이 서글플 따름이다.

 

2020년 10월 당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사드 3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자유 아닌 기만이 지배하는 중국천하


1979년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나선 이래 미국은 이 나라가 잘 살게 되면 민주화할 것으로, 우리는 북핵 폐기를 도울 것으로 믿어왔다. 착각이었다. 미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을 개방시켰다고 합리화했지만 실은 중국이 소련 견제를 위해 미국을 이용했다는 분석은 섬뜩하다. 차도살인(借刀殺人)으로 소련을 제거한 다음, 공산정권 수립 100주년인 2049년까지 중국이 지배하는 ‘천하의 세계’를 노리고 있다는 게 미국 국방부 고문 마이클 필스버리의 주장이다.

이번 러시아전쟁도 중국은 은근히 즐기는 모습이다. 러시아가 길고 고통스러운 전쟁 비용을 치르게 해서 중국이 믿는 ‘서구의 쇠퇴’를 가속화해서는 시진핑은 평소 강조해 마지않는 ‘새로운 변혁기’를 맞을 작정이겠지만, 그렇게 해서 중국은 미국을 능가할 것 같은가. 한때 그런 예측이 숱하게 나온 것도 사실이다. 2028년께 중국의 명목GDP가 미국을 추월해 세계 선두에 오른다고 일본경제연구센터는 ‘2020년’ 예측했었다. 코로나19 충격에서 빠르게 회복했다면서, 애초 2036년 이후를 예상한 중국과 미국 간 GDP 역전이 7년 앞당겨질 것으로 관측했었다.

지금은 중국의 부상(浮上) 아닌 ‘쇠퇴’가 언급된다.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로렌스 서머스 미국 전 재무장관은 19일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년이나 1년 전에는 중국 GDP가 미국 경제를 언젠가 확실히 추월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명확하지 않다.” 중국경제가 총체적 난국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많다. 금융 오버행(잠재적 과잉물량), 명확한 미래 성장 동력 부재, 기업에 대한 정부 개입, 생산인구 감소….

 

안개에 싸인 중국 상하이 와이탄 전경. 동아일보 DB

 

자유 없는 짱깨처럼 살 순 없지 않나

 

한마디로 하면, 자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유라시아 대륙의 침략 제국 러시아처럼, 권위주의 제국 중국에도 개인의 자유는 없다. 개혁개방에 나섰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30년 전 결국 무너진 것도 소련에는 자유로운 금융도시 홍콩이 없기 때문이었다.

민주국가는 표현의 자유가 있고, 그래서 교정의 매커니즘도 작동한다. 자유와 인권과 법치,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흔들려도 그래서 다시 지켜진다. “중국은 대국이요, 우리는 소국”이라던 문 정권의 굴종외교를 떨쳐내고 국제사회 보편적 가치의 편에 다시 선 것만으로도 윤석열 정부 출범은 만세 부를 일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자유를 강조한 정부가 집권당 내에선 내부총질마저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다. 그러다 집권당 밖에서 나오는 소리까지 막으려 한다면…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우크라이나의 승리와 평화를 바란다.

-김순덕 대기자, 동아닷컴(22-08-27)-

______________

 

 

수교 30년·단교 30년의 날 

 

1992년 8월 24일 오후 4시 서울 명동 중화민국(대만) 대사관에서 열린 마지막 국기 하강식에 참석한 화교 여학생들이 청천백일기가 내려오자 북받치는 감정을 못이겨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조선일보 DB

 

30년 전인 1992년 8월 25일 자 조간신문은 전날 한국과 중국의 수교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1면부터 여러 면에 걸쳐 긴박했던 수교 막전 막후의 상황과 국제사회의 반응을 전했다. 그러나 이 못지않게 비중 있게 실었던 기사가 한·대만(중화민국) 단교 소식이었다. 조선일보도 사회면 톱 기사로 서울 명동 대만대사관 철수 현장을 담고 화교학교 밴드부가 연주하는 국가에 맞춰 청천백일기(대만 국기)가 내려오고 대만인들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전했다.

 

한·중 수교로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은 정점을 찍었다. 이를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외교·경제적 영향력은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러나 이런 당위성과 별도로 대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보인 모습에 대한 반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정부가 대만에 상황의 불가피성을 알리고 최대한 예우하며 퇴로를 열어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자성이다. 대만 내 반한 정서 확산으로 두 나라 간 감정싸움이 불거진 것도 단교 과정에서 쌓인 서운함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한·중 수교 30주년은 동시에 한·대만의 비공식 관계 전환 30주년이다. 한·중 수교 당일 퇴거한 대만대사관 자리에 중국대사관이 입성해 옛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지었다. 대사관과 맞닿은 대만계 한성화교소학(초등학교)도 최근 재건축됐다. 코로나 전까지 한국과 대만은 상대방 국민에게 매우 인기 있는 해외 여행지였다. 대만에서 한류 콘텐츠는 일상적으로 소비되고 있고, 흑당버블티로 대표되는 대만 식문화도 한국인 일상에 스며들었다. 여전히 동북아의 이웃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는 강력한 반공 체제→고속 경제성장→민주화라는 현대사의 서사를 공유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비공식’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대만과의 관계 설정에도 관심을 뒀으면 한다.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핵심 변수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둘러싸고 진행된 중국의 무력 시위에서는 양안 관계와 남북 관계의 유사점이 두드러졌다. 유사시 최접경 영토의 선제적 피점령 가능성(대만 진먼다오·한국 백령도), 군사 경계선의 무력화 위협(대만해협 중간선·비무장지대), 핵무기 보유에 따른 전력 비대칭 상황 등을 보면 그렇다. 최근엔 대만해협 유사시 주한 미군의 파병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양안 정세는 한반도 정세의 상수(常數)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이는 우리가 남북·한중 관계에서 대만과의 관계를 지렛대로 사용할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최근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서방 국가들도 대부분 우리처럼 대만에서 중국으로 ‘갈아탄’ 나라들이다. 이들이 대만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추구하는 국익은 무엇인지, 한반도 상황에 적용할 만한 것은 없는지 면밀히 살폈으면 한다.

 

-정지섭 기자, 조선일보(22-08-27)-

________________

 

 

침공했던 중국에 우호적, 타이완에는 몰염치

 

대한민국 망명객 받아준 건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인데 嫌中하면 안 된다며 사실 왜곡
국제사회에 낯부끄러울 뿐뿐

 

서울 중구 명동의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은 1992년 8월 24일까지는 중화민국 대사관이었다.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삼아 1912년에 탄생한 중화민국은, 제국주의 일본과 치열하게 싸우던 탓에 그 후방에서 자라나던 공산당을 제어하는 데 실패하고 1949년 타이완 섬으로 옮겨갔다. 1919년 상하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수뇌부에 폭탄을 던진 상하이 의거 사건 이후 국민당 및 장제스 총통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1992년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때까지 60년가량 중화민국과 국교를 유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게 되자 한국 외교부는 타이완 측에 대해 사흘 안에 명동 대사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 이전에도 타이완 중화민국과 단교하는 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타이완 측은 한국도 언젠가 단교할 것이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수립 교섭 상황을 미리 알려주어서, 자신들이 명동의 대사관을 처분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에 명동 대사관을 선물로 주고 싶었던 한국 측은 이 부탁을 거절하고, 단교 직전에야 일방적으로 타이완 측에 통보했다. 대한민국은 이때 중화인민공화국 측의 요구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 정부로 인정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국민당의 장제스 총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광복군을 후원해주었고, 1943년의 카이로 회담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문구를 넣어 주었다. 조선광복군은 광복 후 한국군의 원형이 되었다. 한편 1938년 김원봉을 대표로 하여 설립된 조선의용대 가운데 대부분은 공산당의 팔로군 측으로 옮겨갔고, 이들은 광복 후에 북한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이들이 북한에 들어오면서, 김일성은 이들과 함께 한국을 침공해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조선일보 2019년 6월 14일자 ‘조선의용대원 80%가 결성한 조선의용군, 北인민군의 뿌리가 됐다’).

 

최근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던 화웨이 런정페이 회장은, 자기 회사가 6·25전쟁 당시 중공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하는 상감령(上甘嶺) 전투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열변을 토한 바 있다(조선일보 2019년 5월 28일자 ‘장교 출신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상감령’ 언급하며 무역전쟁 결의’). 즉 북한의 불법적 침략에 맞서 싸우고, 나아가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한국군을 막아 선 것을 자기 회사의 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중국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받아주었으니 혐중(嫌中)하면 안 된다고. 이 사람의 말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 교묘하게 사실을 회피하고 있다. 어려웠던 시기 기댈 곳 없는 대한민국 망명객들을 받아준 것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아니라 장제스의 국민당이었다.

 

물론 정부가 곧 국민은 아니고, 중일전쟁 당시의 중화민국 시민 상당수의 후손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은 ‘항미원조’ 군대의 장병으로서 1951년 대한민국을 침공했고, 상감령 전투를 자랑스러워하는 화웨이 같은 기업을 만들어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 시민과 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비논리적으로 우호적이고, 중화민국 타이완에 대해 지나치게 몰염치하다고 생각한다.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문제에서 한국인은 의리보다 이익을 중시했다. 이러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니, 국제사회에 대해 낯부끄러울 뿐이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조선일보(20-09-26)-

_________________

 

 

'하나의 중국'

 

트럼프, 당선 후 대만 총통과 통화… '하나의 중국' 원칙 부정 뜻 비쳐
국공내전 벌였던 중국과 대만, 서로 자신이 합법적인 정부라 주장
1970년대 미국∙중국 수교 이후 대만은 정식 국가로 인정 못 받아

 

 최근 'G2'라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어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 직후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통화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중국의 무역 정책을 비판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 총통과의 통화로 '중국이 미국에 협조하지 않으면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을 비친 것이죠.

'하나의 중국'은 "중국 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은 별개 나라가 될 수 없으며, 오직 합법적 정부는 하나만 있다"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독립을 주장하는 중국 내 소수민족에게도 적용되고 있어요. 이 원칙에 따라 중국 정부는 자신과 외교 관계를 맺는 나라에 대만 정부와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이에 맞서 대만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중국을 대표하는 합법적 정부는 중국 정부가 아닌 대만 정부"라는 태도를 보였어요.

◇국공내전과 대만

대만이 중국 역사에 등장한 건 16세기 무렵입니다. 중국 대륙과 무관하게 여러 부족이 살고 있던 대만 섬을 아시아로 진출한 스페인과 네덜란드인들이 점령했어요. 이후 만주족의 침략으로 명나라가 멸망하자 정성공이 대만에 넘어와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명나라 부흥 운동의 거점을 마련했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정성공 세력을 진압하면서 대만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어요. 청나라 말기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만을 할양받았지요.

중국과 대만의 대립은 20세기 초에 시작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어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졌지만 중국 전역은 여러 군벌(軍閥·사병을 모아 지방을 지배하던 군인 세력)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답니다. 이에 중화민국 수립을 주도했던 국민당은 공산당과 손을 잡고 군벌 토벌에 나섰어요(1차 국공 합작).

그런데 국민당을 이끌던 쑨원이 죽자 국민당 군대를 이끌던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을 장악했답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장제스는 공산당과 합작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군벌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당 군대의 공세에 공산당은 전멸 위기에 몰렸지만, 중국 북서부 옌안으로 이동하는 대장정을 통해 무너진 조직을 정비할 기회를 마련했어요.

 

1945년 마오쩌둥(왼쪽)과 장제스(오른쪽)가 일제의 패망을 기뻐하며 건배하는 모습이에요. 두 사람은 제2차 국공 합작으로 함께 일제에 맞섰지만, 일제가 패망한 이후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어요. /위키피디아

 

장제스는 재차 공산당을 공격하려 했지만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위협이 커지고 부하들의 반발이 일어나면서 다시 공산당과 손을 잡고 중일전쟁에 나섰어요(제2차 국공 합작).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대만을 돌려받게 되자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시 내전에 돌입했답니다.

내전 초기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이 우위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전세는 공산당에 유리해졌어요. 국민당 관료들이 지나치게 무능하고 부패한 탓이었죠. 1949년 공산당이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자 장제스는 본토인 약 200만명을 이끌고 대만으로 탈출했어요. 장제스는 대만 토착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타이베이를 새로운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했답니다. 그해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언하였어요.

◇'하나의 중국'과 양안 관계

이후 두 나라는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어요. 1960년대까지는 미국 지원을 받은 대만이 유엔 상임이사국을 차지하는 등 국제 무대에서 앞서갔답니다. 무력 통일을 내세우던 중국은 미국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평화적·정치적 통합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지요.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 대만과 중국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었어요. 베트남전 패배를 계기로 공산권 국가와 관계 개선에 나선(데탕트·프랑스어로 '휴식') 미국이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을 수용했기 때문이죠.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고 '미·중 공동 성명'을 통해 중국 정부를 중국인들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인정했답니다. 그 결과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가 됐어요. 유엔은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같은 주요 국제기구에서도 추방당했고,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등 중국과 수교한 나라와 모두 공식 외교 관계가 끊어졌답니다. 미국은 비공식적 외교 관계로 대만을 지원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만은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후 양안 관계는 대만 정치 상황에 따라 우호와 갈등을 반복하고 있어요. 근래 대만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과 "하나의 중국을 버리고 대만이 별개 국가로 독립해야 한다"는 입장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답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대만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대만 독립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쯔위가 흔든 '청천백일기'

 

대만 국기는 ‘청천백일기’입니다. 붉은 바탕에 하얀 태양이 푸른 하늘에 떠있는 모습은 쑨원의 삼민주의를 상징하지요. 중화민국의 국기로 만들어졌지만 국민당 정부가 대만에 정착하면서 자연스레 대만의 국기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대만은 올림픽 등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이 국기를 사용하지 못해요. 중국 탓에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도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대만 운동선수들이 국제 대회에 나갈 때에는 국기 대신 대만 올림픽위원회의 깃발을 사용합니다.

 

지난해에는 아이돌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가 방송에서 청천백일기를 흔들었다가 중국 네티즌의 비난을 받는 일이 있었어요.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 사람들이 대만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를 인정하지 않아 생긴 일이었죠.

 

-윤형덕 하늘고 역사 교과 교사,  조선일보(17-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