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속 상륙작전들]
[그날 노르망디에 神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속 상륙작전들
노르망디 해변 5곳에 연합군 투입… '2차 대전' 흐름 바꿔
2차 세계대전 속 상륙작전들
지난 6일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의 오마하 해변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기념식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등 25국 정상이 참석했지요. 마크롱 대통령은 “오늘날 우리는 유럽 대륙에서 다시 전쟁을 벌이고, 자유와 민주의 가치에 도전하며, 무력으로 국경을 바꾸고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를 보고 있다”며 “이곳에 상륙했던 이들의 용기를 떠올리자”고 연설했어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성공의 의의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소견을 밝힌 것이죠.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노르망디의 5개 해변에서 벌인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국과 추축국 간에 치열한 전투가 많았는데요.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왔던 여러 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볼게요.
시칠리아 상륙작전, 이탈리아 항복으로 이어져
시칠리아 상륙작전은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1943년 7월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상륙해 8월까지 공격한 사건입니다. 1943년 5월 연합군은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후 다음 목표를 이탈리아로 정했어요. 이탈리아를 항복시키고 지중해를 장악한 후, 독일 남부를 공격할 생각이었지요.
연합국은 이탈리아로 진격하기 전 시칠리아섬에 상륙하기로 했어요. 영국은 상륙에 앞서 독일에 연막작전을 펼치는데요. 시체를 구해 영국군 장교로 위장하고 ‘연합국이 시칠리아가 아닌 다른 섬에 상륙할 것’이라고 위조한 문서를 안주머니에 넣어둔 상태로 스페인 해안에 유기했어요. 독일군은 이 가짜 정보에 깜빡 속았고 연합군이 다른 곳에 상륙할 거라고 오판해 사르데냐섬 등에 군대를 배치했어요.
이 상륙작전의 연합군은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지휘하는 제8군과 미국의 조지 패튼 장군이 이끄는 제7군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7월 9일 밤, 악천후 속에서도 연합군은 공중 강하를 통해 중요한 다리와 교두보를 확보하려 시도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연합군은 시칠리아 남부와 남동부 해안에 무사히 상륙했답니다.
연합군은 공격 후 처음 3일 동안 약 15만명의 병력을 이동시켜 빠르게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와 교통 요충지를 확보했습니다. 영국군은 시라쿠사를 점령하고, 미군은 리카타를 점령했어요. 이어서 미군은 시칠리아 서북부에 있는 팔레르모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 진격했습니다. 8월 초, 미군은 추축국이 설정한 방어선의 주요 거점인 트로이나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했어요. 그리고 미군은 북부 해안을 따라 추축국 방어선을 돌파해 나갔습니다.
당시 조지 패튼 장군과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누가 더 큰 공을 세우는지 경쟁했는데요. 이는 미군이 먼저 동북쪽의 메시나를 점령하면서 조지 패튼 장군의 승리로 끝났지요. 시칠리아 전투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이탈리아 본토 공격을 위한 요충지를 확보했으며, 이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몰락과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이어졌답니다.
로마를 해방시키다
1943년 9월 연합군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지만 지형이 험난해 북진 속도가 느려졌어요. 연합군은 로마로 진격하기 위해 전열을 재정비했어요. 독일군은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요새화된 구스타프 방어선을 구축했지요. 방어선을 공략하기 위해 분투하던 연합군은 엄청난 사상자에 고전을 면치 못했어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합군 지휘부는 바다로 눈을 돌립니다. 구스타프 방어선을 우회하여 로마에서 남쪽으로 60km 가까이 떨어진 안치오에서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것을 계획했어요. 안치오에 군대를 상륙시키면 구스타프 방어선을 지키던 독일군의 전력이 안치오로 분산될 것이고, 이때 연합군이 약화된 방어선을 뚫는 작전이었죠.
1944년 1월 안치오 상륙작전이 시작됐고, 연합군은 어렵지 않게 안치오 해안가를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은 상륙 후 신속한 진격 대신 물자와 무기가 충분히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며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군의 반격을 대비했어요. 이로 인해 독일군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안치오에 상륙한 연합군은 곧 독일군에 포위되어 집중포화를 받았어요. 1944년 봄 내내 구스타프 전선에서도 교착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다시 전열을 정비한 연합군은 5월 말부터 강력하게 반격해 전세를 역전했고,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로마로 진격했지요. 6월 4일, 연합군은 마침내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이틀 전이었죠. 이처럼 안치오 상륙작전은 초반엔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로마 해방으로 이어져 연합군의 사기를 높이고, 이탈리아에서의 독일군 저항을 약화시키는 것에 기여했답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
독일은 1940년 5월부터 프랑스를 침공해 점령했는데요. 1943년 여름, 나치 독일이 유럽 대부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자 연합군 지도자들은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꿀 대규모 공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연합군은 독일군이 작전의 위치와 시기를 미리 알아버리면, 작전이 실패할 수 있었기에 기만 작전을 사용하며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려 노력했어요. 허위 정보를 무전으로 흘리고, 여러 지역에 고무로 만든 탱크와 나무로 만든 비행기 등 가짜 군비를 배치했지요. 또 이중 스파이를 이용해 독일군이 칼레 해협을 주요 상륙 지점으로 생각하게 만들려고 했죠. 이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때 독일군의 주력을 칼레 지역에 묶어두고, 노르망디 지역의 방어를 약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답니다.
D-Day(공격 개시일)인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하루 동안 약 16만명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변에 도착했어요. 당시 노르망디 공격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었습니다. 며칠 만에 약 33만 명의 병력, 5만대 이상의 차량, 약 10만t의 장비가 상륙했습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했어요. 1944년 말쯤에는 프랑스 전체가 독일로부터 해방되었고, 1945년 봄에는 연합군이 독일군을 격파했답니다. 역사가들은 종종 D-Day를 2차 세계대전 종전의 시작으로 언급하기도 한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조선일보(2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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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노르망디에 神은 없었다
부상병 향해 포탄 쏘지 않고 포로에게 가족사진 돌려주는
人間愛 없지 않았지만 전장에 神의 가호는 없었다
밤하늘 가득 낙하산 꽃이 피었다. 자정을 막 넘긴 6월 6일 0시 15분 연합군은 800여 대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1만3000여 명의 정예 요원들을 하늘에 흩뿌렸다. 독일 원수 롬멜이 말한 '세상에서 가장 긴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고사포탄으로 항로를 이탈한 수송기들은 무질서하게 공정부대원들을 토해냈다. 가장 근접한 게 8km, 멀게는 50km 이상 목표 지점에서 떨어진 곳에 착륙한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거대한 물웅덩이들이었다. 하늘에서의 침공을 대비해 롬멜은 디브강(江)의 갑문을 열어 해안 지역 평야를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고 그날 흙탕물에 빠져 죽은 병사의 수는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 아침 6시 30분, 노르망디 앞바다를 뒤덮은 연합군 선단을 처음 발견한 이는 독일 해안포 대대장 플루스카트였다. 황급하게 상황을 전하는 플루스카트에게 정보참모는 물었다. "그 배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나?" 플루스카트는 포대경(砲臺鏡)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내 쪽으로 오고 있네." 잠시 후 해변은 상륙주정에서 쏟아낸 연합군 병사들과 이를 막으려는 독일군의 교전으로 모래 반, 살점 반으로 변한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이하 구하기)'는 바로 그 아침의 상륙작전으로 시작된다.
20년 전 낮술을 마시고 이 영화를 봤다. 적게 마신 게 아닌데 영화 시작 오 분만에 술이 다 깼다. 이전까지의 전쟁영화를 보면 총에 맞아도 주변에 할 말 다한 뒤 "그럼 이만…" 하고 느긋하게 신체 활동을 종료하는 것이었다. 아니었다. 머리, 팔, 다리 등 몸통에서 뻗어나온 모든 가지들이 떨어져 나가고 부상당한 병사들은 "모르핀!"과 "마마!"를 외치며 죽어갔다. 오락영화 한 편 '때리러' 들어갔다가 지옥도를 보고 온 셈이다. 영화는 형제 넷 중 셋이 전사한 라이언 일가의 마지막 생존자를 찾아 어머니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노르망디를 헤매는 여덟 명의 레인저 대원 이야기다. 이 이상한 산수(算數)에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연출은 정밀하다.
연합군 사령부가 북유럽 탈환 계획인 오버로드(大君主) 작전을 입안한 게 1943년이다. 그리고 그 첫 타자로 준비한 게 1944년 6월 6일 0시 15분을 디데이로 잡은 넵튠 작전이었다. 날짜와 시간에 대한 암호명 디데이는 이후 보통 명사가 된다. 대서양 방어 사령관이었던 롬멜의 손님맞이 전략은 치밀했다. 이미 히틀러가 구축해 놓은 1300에km 달하는 대서양 방벽에 더해 체코 고슴도치(2m의 각진 기둥을 교차시킨 것으로, 보시면 안다) 등 수중 장애물 50만 개를 설치했고 500만 개의 지뢰를 묻었다(원래 매설 목표는 6000만 개). 초승달 모양의 노르망디 해안 오른쪽부터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라는 별도의 작전명이 붙었다. '구하기'의 주인공 밀러 대위(톰 행크스)가 상륙한 곳이 오마하다. 이곳에 주둔한 독일 정예 352사단은 동부전선을 경험한 병사들로 미군 피해가 가장 심했다. 영화에서는 독일군의 시점으로 해변을 난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기관총 진지만 90여 개 가까이 있었다. 상륙주정의 발판이 열릴 때마다 탄환들이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 병사들을 짓이겼다. 디데이 하루 동안 오마하에서 죽고 다친 미군은 2500명이었다.
전투 중 오로지 야만이 판친 것은 아니다. 포로들이 지닌 문서를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받은 한 미군 병사는 그들의 가족사진을 독일군 포로들의 주머니에 슬쩍 넣어주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고맙습니다"라며 흐느꼈다. 의무병이 부상당한 낙하산병을 치료하는 동안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던 독일군 야전포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미담으로 전쟁의 참상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이 작전으로 3000명 넘는 프랑스 주민이 죽었다. 노르망디는 프랑스 해방의 희생양이었다.
이 영화는 사실일까 허구일까. 미 육군은 형제를 같은 사단에 배치하지 않는다. 미 해군은 형제를 같은 배에 태우지 않는다. 그러나 전투의 규모가 클 경우 같은 날 죽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닐랜드 집안의 남자 넷은 2차 대전을 맞아 동시에 입대했다. 셋째와 둘째는 디데이 첫날과 다음 날에 전사했고 맏이는 미얀마 전선에서 실종되어 사망 처리된 상태였다. 막내만 살았는데 혹시 스필버그가 영감을 얻었다면 이 집안 이야기일 것이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 연합군 병사들은 이런 기도를 올렸다. "주여, 제가 오늘 얼마나 바쁠지 당신께서는 잘 아실 겁니다. 비록 제가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더라고 주께서는 저를 잊지 마소서." 독일군도 같은 기도를 했을 것이다. 연합군 만여 명과 그 몇 배의 독일군이 죽고 다친 그날 노르망디에 신은 없었다.
-남정욱 작가, 조선일보(17-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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