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별세한 김상현 민주당 고문은
별명과 호(號)가 많다. 이수성
전 총리, 김재기 전 주택은행장과 더불어 '3대 마당발'로 꼽혔다. 시인 신경림은 김 고문이 내 편, 네 편 경계선이 없다며 무경(無境)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유신 다음 해인 1973년 구속됐던 김 고문은
자신을 고문했던 수사관이 길 건너 지나가자 무단 횡단으로 달려가 "그동안 안녕하셨느냐"고 반갑게 인사해 상대를 놀라게 했다.
▶그의 또 다른 호 후농(後農)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호 후광(後廣)을 따서 지었다.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무조건 DJ 뜻에 따랐던 반면 김 고문은 자기
정치를 했다. '김대중이 가꿔 놓은 넓은 뒷마당에서 농사짓고 실속을 챙기는 것은 김상현'이라는 말이 나왔다. DJ가
1987년 대선 때 후보 단일화 약속을 깨고 독자 출마하자 김 고문은 "명분이
없다"며 YS의 통일민주당에 잔류했다. 김 고문은 1990년 YS의 3당 합당도 거부하고 다시 DJ와 합쳤지만 그때는 이미 '딴 식구'였다.
▶16대 총선을 두 달 앞둔 2000년 2월 김 고문의 공천 탈락 소식을 듣고 서대문 집 앞에서 기다렸다. 자정 무렵 만취해서 귀가한 김 고문은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46년 동안 함께 정치해온 나를 쳐낸 것은 김상현의 비극이 아니라 김대중의 비극이다. 물구나무서서라도 16대 국회에 들어가겠다." 김 고문은 총선에선 낙선했지만 2년 뒤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돼 '물구나무 입성'에 성공했다.
▶1990년대 중반 후배 의원이 시내 호텔에서 김 고문과 마주쳤다. "형, 돈 좀 주라"고 했더니 김 고문이 "너 오늘 운이 좋다. 어느 놈한테 돈 좀 받았어"라며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수표 한 장을 꺼내길래
주려나 했더니 김 고문은 그걸 제 주머니에 넣고 봉투째 건넸다. 그가 떠난 뒤 세 보니 수표 19장이 남아 있었다. 김 고문은
"정치 자금은 생선이다. 썩은 생선과 가시만 조심하면 된다"며 남의 돈도 잘 받았고 주변에도 잘 나눠줬다.
▶기자들에게 넉살 좋게 기사 청탁도 잘했다. 한번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감이 안 된다"고 했더니 "음악적으로 부탁할 때 좀 써라. 체육적으로 나가기 전에"라고 공갈을 쳤다. 기자들에게 늘 "욕하는 기사라도 써라. 정치인은 부음만 아니면 무엇이든
이름이 많이 나오는 것이 좋다"고 했다. 김 고문
이름이 들어간 첫 기사를 쓴 것이 1998년이었다. 20년
만에 마지막 기사를 부음으로 바친다.
-김창균 논설위원, 조선일보(1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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