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유신삼걸' 두 절친... 결국 서로에게 칼끝을.. ]
[아베 신조의 정치적 자궁(子宮) 조슈]
아베 신조

참의원 지원 유세 도중 총격에 쓰러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몇 년 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난 적이 있다. 도쿄 도심에 있는 총리 관저의 집무실을 방문했는데 가방만 검색기에 통과시키고 들여보냈다. 명목상 국왕 다음 서열이라고 해도, 일본 정부 수반인데 의외였다. 당시 아베 총리는 한국과 가까워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한국 기자를 대우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경비가 손을 저었다. 함께 간 일본 지인은 “일본의 총리 경호는 대개 이렇다”고 했다.
▶아베 전 총리는 결국 ‘혐한(嫌韓)’ 정치인이 됐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한국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 막연히 낙관하고 있었다. 2006년 그가 낸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서 한국 언급은 232쪽 중 한 쪽도 못 되는 아홉 줄에 불과하다. “한일 관계는 낙관주의다. 한국과 일본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법의 지배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외할아버지 기시 전 총리와 아버지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은 유명한 친한 인사였고 아내는 한류 스타 박용하의 광팬이었다. 역사의 거리를 정치, 경제, 문화의 접근으로 메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착각이었다.

▶그에겐 한국과 관련한 몇 가지 소문이 따라다녔다. 아베 전 총리는 할머니를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를 낳고 아베 가문에서 바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 명문가에서 이례적이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차별을 받던 한국인이란 소문이 돌았다. 아베 일가의 본거지가 한국인이 많이 오가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란 점도 작용했다. 집권 초 일본 주간지 기자들이 소문을 확인한다고 달려들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그의 우경화 이후 조용해졌다.
▶아베 전 총리는 정치를 거부한 형 대신 일본 보수 정계의 황태자로 커 사상 최연소 집권당 대표, 사상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다. 68세였지만 세 번째 총리에 오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유지했다. 총리 임기 동안 무기력해진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중국과 거리를 유지하고 미·일 동맹을 복원해 세계 자유 진영의 안보 중심축으로 만들었다.
▶아베 전 총리가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 중 괴한 총을 맞고 숨졌다. 사무라이 같은 최후였다. 가까운 나라에서 되살아난 정치 테러가 섬뜩하다. 그의 모든 신념에 동의할 수 없지만 이 업적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한다. 그는 북한에 납치된 자국 국민을 구했고 남아있는 한 명이라도 더 데려오려고 죽을 때까지 힘썼다. 납치 범죄에 대해 김정일의 시인과 사과를 받아낸 정치인도 그였다. 일본에서도 이런 정치인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선우정 논설위원, 조선일보(2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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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전 日 총리 선거 유세 중 충격적 被殺. 과거 악연도 있지만, 진심으로 이웃 나라 충격과 아픔 위로할 때.
-팔면봉, 조선일보(2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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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삼걸' 두 절친… 결국 서로에게 칼끝을 겨눴다
'라스트 사무라이'
그 배는 검었다. 콜타르로 도장한 덕분에 구로후네(黑船)라고 부른 배 네 척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쇄국 200년 일본의 긴 잠을 깨웠다. 166년 전 딱 이맘때인 1853년 7월 8일 일이다. 숫자만 보고 '겨우' 네 척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지휘관인 페리 제독이 타고 있던 기함은 2500t, 그 옆의 순양함은 1700t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제일 큰 배가 100t 규모였으니 일본인들이 느낀 시각적 충격은 외계 문명과 조우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페리 제독의 내항은 메이지 유신을 촉발했고 이후 20년 동안 일본은 격렬한 정권 투쟁과 내전에 말려들어 간다. 신(神)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 인재를 쏟아붓는 경향이 있다. 그 시기 약속이나 한 듯 수많은 인재가 쏟아져 나왔고 이들은 마치 짠 것처럼 제 할 일을 마치고는 역사에 조용히 자기 이름을 묻었다. 그 마지막 주자가 사무라이의 본향,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다. 한동네에서 살았고 막상막하로 가난했고 말 그대로 콩 한 쪽을 쪼개 먹던 둘은 나중에 반란군과 진압군으로 만나 그 인연을 정리한다. 2004년 개봉한 '라스트 사무라이'는 이 둘이 격돌한 세이난(西南)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내용은 단순하다. 정부군의 훈련 교관이었던 미군 중위(톰 크루즈)가 반란군에게 생포되어 사무라이 문화에 빠진 끝에 아예 사무라이 갑옷을 걸치고 반란군의 선봉에 선다는 얘기인데 평가는 극단이다. 최고의 전쟁 영화라는 사람도 있고 일본 귀족 문화에 반한 미국 '쌍놈' 이야기라는 악평도 있다. 영상은 아름답다. 총과 대포로 무장한 정부군을 향해 말을 타고 돌진하는 반란군의 장려한 낙일(落日)은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벚꽃 엔딩처럼 애잔하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게 정부군의 절도 있는 행군 모습이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인들은 현대인처럼 걷지 않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시대물을 보면 사람들이 발로 땅을 스치듯 흐느적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온다. '난바'라고 하는 이 걸음걸이는 진흙탕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의 동작이 일상화한 것으로, 오른발이 나갈 때 오른쪽 상반신이 앞으로 나가고 왼발이 나갈 때는 왼쪽 상반신이 나가는 식이다. 이 걸음걸이로는 군대의 행진이 절대 불가능하다. 해서 새로운 걸음걸이를 만드는 것이 메이지 정부의 절실한 과제였다. 여기에 답을 준 게 1871년의 이와쿠라 시찰단이다.

새 정부를 세웠지만 메이지 정부에 구체적인 국가 발전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세계 최고만을 보고 오겠다는 신념으로 급하게 시찰단을 꾸렸고 이들은 무려 22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12국을 돌며 서구 문명의 정수를 체험한다. 시찰 결과로 얻은 게 두 가지다. 하나는 최대 위협이라고 생각했던 러시아가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럽 최강국이었던 프랑스 대신 독일 제국을 일본의 발전 모델로 염두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1871년이 독일 제국 탄생 원년이라 시끌벅적 화려했고 프랑스는 파리 코뮌으로 뒤숭숭해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일본인들의 지력을 너무 낮춰 보는 동시에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잘 몰라 하는 소리다.
발음이 세서 전통 강국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통일 전 프로이센은 약체 중 약체였다. 위치도 최악이었다. 위로는 스웨덴,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러시아, 서쪽으로는 프랑스, 그리고 밑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프로이센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 외교와 군사력 증강에 발버둥쳐야 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게 개혁 군주 프리드리히 1세다. 돈이 없었던 프로이센은 포병과 기병 대신 보병에 집중했다. 보병 훈련의 달인인 안할트 공국의 영주 레오폴드를 모셔왔고, 이 사람은 무지막지한 제식훈련을 통해 프로이센 보병을 유럽 최강으로 올려놓는다. 사정이 별반 다를 게 없던 일본이 롤모델로 프로이센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염원대로 일본은 얼마 후 아시아의 프로이센이 되었고, 힘이 생긴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던 것처럼 조선과 청나라를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정한론을 부르짖던 일본의 칼끝이 150년 만에 또다시 한반도를 겨누고 있다. 같은 칼에 두 번 찔리면 그때부터는 찔린 사람 책임이다. 감정적 대응은 잠시 미뤄놓고 제대로 일본 공부를 할 때다. 나를 잘 아는 상대보다 무서운 적은 없다.
-남정욱 작가, 조선일보(1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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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의 정치적 자궁(子宮) 조슈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征韓論)과 아베 신조의 대한관(對韓觀)
아베 신조의 사표(師表)는 조선침탈 선도한 조슈벌(閥)의 정신적 스승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정한론(征韓論)과 천황지상주의의 세례를 받은 그의 문하생들은 명치(明治)정부의 주체세력인 조슈벌(閥)을 형성해 한반도 강점(强占)을 주도했다. 일본 총리대신 아베 신조는 "요시다 쇼인 선생님의 사상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공언한 바 있다.

조슈번(일본어: 長州藩)은 지금의 야마구치현에 해당하는 스오국와 나가토국의 2개 구니를 지배했던 에도시대의 번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쇼인의 정한론(征韓論)

죠슈번 藩主 모리氏의 하기城 터가 위치한 指月山(좌측 상단 바다쪽으로 돌출한 부분)과 성밑거리(城下町). 마쓰모토川과 하시모토川이 감싸고 있다(아래).
1853년 미국 東印度(동인도)함대사령장관 페리 제독의 砲艦外交(포함외교)는 일본 지식인에게 국가적 위기를 한층 절박한 것으로 인식시켰다. 특히, 히라다(平田)派 國學 및 後期 미도(水戶)學이란 國粹主義的(국수주의적) 尊王사상에 의해 배양된 攘夷(양이)의 바람이, 西洋 열강에 굴복한 幕府(막부)의 허약외교에 대한 비판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통합의 새로운 基軸(기축)으로서 天皇의 존재가 急부상해 가지만, 그것은 어이없게도 征韓論(정한론)의 대두를 동반하고 있었다.
히라다派 國學과 후기 미도學에 대해선 뒤에서 재론하겠지만, 여기서는 먼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無知했던 역사의식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明治維新(명치유신)의 주체세력인 조슈 인맥이 쇼인으로부터 사상적 세례를 직접 받은 그의 제자들인데다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晉三)조차 『나 자신, 吉田松陰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고방식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전파하는「月刊 松下村塾」창간호(2004)에 실린 아베 신조의「應援 메시지」
페리의 공갈에 굴복해 幕府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상황에서, 요시다 쇼인이 「敵情(적정)탐사」를 위해 에도(東京)灣 입구의 요충 시모다(下田)로부터 密航(밀항)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罪囚(죄수)가 된 사실은 이미 지난 호에서 살폈다. 그때의 옥중에서 쇼인은 다음 내용의 편지를 그의 동지들에게 보냈다.
<魯(러시아)·墨(미국)과 강화를 했지만, 우리가 이를 결연히 파기함으로써 夷狄(이적)에게 信을 잃어서는 안 된다. 다만 章程(장정)을 嚴히 하고 信義를 두텁게 하면서, 그 사이에 國力을 배양해 取하기 쉬운 朝鮮·滿洲·支那를 복종시키고,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國富와 토지는 鮮·滿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歐美 열강과의 조약은 지키고, 그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조선 및 만주에서의 영토 확장으로 만회해야 한다』는 쇼인의 아시아 침략 구상은 후일 帝國日本의 국책으로 현실화된다. 다만 쇼인의 征韓論에는 약간의 전제 조건이 붙어 있기는 했다.
쇼인은 『朝鮮과 滿洲를 손에 넣으려면 艦(함)이 아니면 不可하다는 것이 나의 本志인데, 이는 天下萬歲(천하만세)를 이어 가야 할 業(업)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즉, 조선·만주에의 침략구상을 견지하면서도 『지금은 아직 국력이 이에 미치지 못한 즉 巨艦을 보유해야 할 것』이므로 그 실시는 잠시 유보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쇼인은 일본의 사무라이가 페리의 위압에 대해 싸움 한번 벌여 보지 못하고 굴복하고 만 것은 그 마음(心)이 바르지 않고, 뜻(志)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情況(정황)에서 긴요한 과제는 대포 및 군함을 만들기에 앞서 志를 단련하고, 氣를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쇼인의 논점이었다.

요시다 쇼인像(京都대학 부속 도서관 소장). 그는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을 육성한 國粹主義 사상가였다(사진 왼쪽). 1854년 3월 시모다(下田) 감옥에 수감된 쇼인. 6개월 후 그는 하기(萩)의 野山獄으로 이감되었다(사진 오른쪽).
잘못된 역사의식의 출발점
그는 특히 「敵을 알기」 이전에 「자기를 아는」 것이야말로 攘夷의 주체로서 자기를 천명·확립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優先(우선)되지 않으면 안 될 과제라고 강조했다.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이 육성된 요시다 쇼인의 松下村塾(쇼카손주쿠).
이어 그것은 『우리 國體가 외국과 다른 所以』를 명확히 하는 것에 의해 성취된다고 했다. 日本이 日本다운 까닭, 國體의 究明(구명)에 쇼인은 자기 나름으로는 골몰했다. 그리고 쇼인은 日本의 독자성을 中國과의 對比로 해명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易姓革命(역성혁명)으로 왕조를 바꿔 온 中國에 대하여 萬歲一系(만세일계)의 천황이 중심이 되는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하려 했다. 즉, 「天下는 天下의 天下」라는 중국에 대하여 「天下는 一人의 天下」인 일본이 비교우위에 있다는 발상이었다. 「人民이 있은 후에 天子가 있다」는 中國에 대하여 일본 本然의 모습은 「神聖(신성)이 있은 연후에 蒼生(창생)이 있다」, 즉 천황이 존재하고 나서 인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中國에 있어서 신하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主君을 구해 거취를 정하는 「품팔이 奴婢(노비)」인 것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譜代(보대)의 家臣이고,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흔쾌히 죽는, 절대적 君臣관계라고 했다. 이것은 앞서 萬歲一系의 천황이 영원불변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쇼인이 野山獄에서 풀려나와 幽閉되었던 그의 生家.
쇼인은 古代 한반도와의 關係史에 관한 한 픽션에 불과한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맹신자였던 것 같다. 「古事記」와 「日本書紀」는 신라·백제·고구려의 先進性에 열등감을 가진 왜국의 官邊(관변)학자가 국수주의적 史觀(사관)에서 서술한 史書임은 오늘날 일본 사학계에서 상식화되어 있는 사실이다. 「古事記」 등을 편찬한 관변학자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惡(악)감정과 亡國의 슬픔을 품은 백제의 亡命(망명)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소설적 史書를 비판적으로 읽을 만한 능력이 없었던 쇼인으로서는 國體가 顯現(현현)해 천황 親政(친정)이 시행되었던 일본의 古代에 있어서 조선의 諸國(가야·신라·백제·고구려)은 천황에게 朝貢(조공)을 했는데, 國體의 쇠퇴와 함께 「朝鮮 諸國」이 교만해지게 되었다고 믿었다.
쇼인은 國體가 손상된 武家政權期(도쿠가와 幕府 시절)에 있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정벌이 『神聖의 道에 부합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쇼인은 『神功皇后(신공황후)나 히데요시야말로 皇道(황도)를 밝게 하고 國威를 신장한 것으로서 「神州의 光輝(광휘)』라고 稱揚(칭양)했다. 征韓은 「神聖의 道」이고, 「皇道」를 명확하게 한 것, 「立國의 體(체: 본질)」에 合致(합치)되는 것으로서 이념화했던 것이다.

松下村塾의 내부
오늘날 일본 사학계에서 「神功皇后가 三韓을 정벌했다」는 허구의 기록을 믿는 학자는 거의 없다. 히데요시는 아직도 일본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역사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양심적인 학자의 판단으로는 「리얼리티가 없는 妄想家(망상가)」일 따름이다.
<疆域(강역)을 소중히 하고 조약을 嚴히 함으로써 二虜(2로: 미국과 러시아)를 羈縻(기미: 制御함)하고, 그 틈을 타 蝦夷(하이: 北海道)를 개간하며 琉球(유구: 오키나와)를 손에 넣고, 朝鮮을 取하고, 滿洲를 꺾고, 支那를 누르고, 印度에 臨(임)함으로써 進取의 勢를 펴고, 이로써 退守(퇴수)의 기반을 굳히고, 神功과 豊國(풍국: 히데요시의 나라를 의미하는 듯함)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바를 이룩해야 한다>
이런 쇼인의 관점에서 朝鮮 침략은 단순히 歐美와의 관계에서 잃었던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取하기 쉬운 곳을 取하자는 것이 아니다. 쇼인에게 있어 조선을 복속시키는 것은 天皇 중심적 日本의 본 모습, 國體의 불가결한 일환이었다. 따라서 征韓은 日本人다운 것, 代를 이어서 추구해야 할 숭고한 사업이라고 했다. 國體論에 의해 이념화된 조선침략론, 그것이 바로 征韓論인 것이었다.

「감옥을 강의실로 만든」 吉田松陰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일찍이 『새로운 가치관의 창출이 필요한 지금의 시대야말로 吉田松陰 선생의 松下村塾이 신선하게 느껴진다』(2004년 10월27일 발행 「月刊 松下村塾」의 격려사 중에서)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松下村塾(송하촌숙·쇼카손주쿠)는 어떻게 개설·운영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쇼인은 밀항미수罪로 野山獄(야산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1854년 10월)부터 동료 囚人(수인)들을 가르쳤다. 이런 면에서 보면 쇼인은 타고난 교육자라고 할 수 있다. 조슈번의 野山獄은 사무라이 신분의 감옥으로서, 오늘날의 교도소와는 달리 엄격하게 관리되지는 않았다.
囚人들은 그 가족이나 친척의 요청에 따라 수감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가족이나 친척이 집안 내부의 「말썽꾼」이나 「위험분자」를 세상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수감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엄혹한 連坐制(연좌제) 사회였다. 따라서 囚人들 스스로는 죄의식이 없었지만, 언제 출옥할지 알 수 없었던 만큼 절망적 상태였다.
쇼인은 囚人들을 위해 우선 하이쿠(俳句·배구: 일본의 短型詩)와 書道(서도) 공부 모임을 열었다. 이어 「孟子」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이 후일 「講孟余話(강맹여화)」로 정리되었다. 출옥 후 松下村塾의 助敎授(조교수)가 되는 도미나가(富永有隣)도 여기서 만났다. 간수들도 쇼인의 강의를 들었다.
나중에 쇼인의 애인이 되는 다카스 히사코(高須久子)도 옥중에서 만났다. 사무라이였던 남편이 죽은 후 사미센(三味線: 일본 전통 현악기)에 취미를 붙여 사미센의 선생을 집에 불러들였는데, 이런 행실을 염려한 친척들의 요청에 의해 野山獄에 입옥된 여성이었다.
野山獄에 수감된 쇼인에 대해 「처벌 수준이 너무 엄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이 藩內에 나돌게 되었다. 쇼인의 장래에 기대를 걸고 있던 藩主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 역시 그러했기에, 조슈번은 『병에 걸려 自家(자가) 치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쇼인을 출옥시켰다.
본가인 스기(杉)家의 「幽人室(유인실)」로 주거가 한정된 쇼인은 우선 친척들을 상대로 「孟子」 강의를 출옥 후 3일째(1855년 11월17일)부터 재개했다. 幽人室에서의 「孟子」 강의는 단순한 句文의 해설이 아니라 쇼인의 독자 해석으로 「재미있다」는 소문이 하기(萩) 城下로 번져나갔다.
그때 쇼인의 숙부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열었던 松下村塾은 이웃에서 塾을 운영하던 구보(久保五郞左衛門)라는 사람이 그 간판을 승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쇼인의 강의를 구보가 청강함으로써 쇼인은 자연스럽게 塾主가 되었다.

쇼인이 동료 죄수들에게「孟子」를 강의했던 野山獄터. 野山獄은 松下村塾의 前身이었다.
여기서 어린 시절의 쇼인에게 「조기교육」을 베풀었던 쇼인의 숙부 타마키 분노신(1810~1876)이란 인물을 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쇼인의 아버지 스기 유리노스케(杉三百合之助)의 첫째 동생인 다이스케(大助)는 藩의 兵學 사범 요시다(吉田)家의 養子로 들어갔다. 다이스케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다家와 兵學을 잇기 위해 쇼인을 養子로 맞았다. 그러나 쇼인은 여섯 살 때 養父 다이스케가 사망했기 때문에 山鹿流(야마카류) 병학 師範(사범)의 가문을 잇게 되었다. 여기서 스기의 둘째 동생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등장한다.
쇼인은 그때까지 親父로부터 「四書五經」 등을 배우고 있었다. 다이스케의 제자이기도 했던 文之進은 쇼인을 훌륭한 兵學者로 키우는 것이 형이자 스승인 다이스케에게 보답하는 도리라고 믿고 여섯 살짜리 조카 쇼인에게 스파르타式 교육을 강행했다. 그 스스로 개설했던 松下村塾에 쇼인을 기숙시키고 하루라도 빨리 요시다家의 堂主에 걸맞은 인물로 키우려고 면학을 독려했던 것이다.
그 결과, 쇼인은 10세 때(1839년) 조슈번의 교육기관 明倫館(명륜관)의 교단에 섰고, 11세 때는 藩主 다카치카와 많은 家臣들 앞에서 「武敎全書(무교전서)」 戰法編을 강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로부터 하기 城下에는 「마쓰모토(松本)村에 天才가 났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松下村塾의 교육기본과 敎授 방식
쇼인은 松下村塾에서 조슈번의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討幕(토막)사상」을 전파했다. 쇼인이 松下村塾에서 숙생들을 가르쳤던 기간은 1856년 8월부터 1858년 12월까지 불과 2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하생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쇼인은 『이곳 마쓰모토村으로부터 많은 인재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지만, 明倫館의 前 교수였던 쇼인의 밑에는 하기뿐만 아니라 조슈번 전체로부터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여성스런 목소리로 『공부하세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철야 강의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열강을 하고 난 다음 날 아침엔 강의실 구석에 곯아떨어져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쇼인의 교육기본은 「魂(혼)과 魂을 통한다」는 것이었던 만큼 村塾에 들어오면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상급 사무라이도, 아시가루(足輕·족경: 졸병)도, 平民도 차별 없는 교육을 받았다.
「학문이라는 것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알고,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힘을 기른다」-이것이 쇼인의 교육방침이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생각해 간다는 모습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쇼인은 塾生들과 함께 밭일을하는 등 몸과 마음의 兩面을 교육했다.
松下村塾에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었다. 塾生이 오면 수업이 시작되어 일대일 교육을 하고, 숙생들이 모이면 강론을 했다. 강의 수업은 실내에서, 議論·역사·독서 등은 야외에서 지도하기도 했다.
숙생은 통학 가능한 하기 城下 거주 무사계급이 많았고, 松本村에 사는 숙생도 26명이나 되었다. 수는 적지만, 멀리서 오는 숙생도 있었다. 통학이 어려운 숙생은 城下에 하숙하든지, 村塾에서 기숙하기도 했다.
수업은 쇼인뿐만 아니라 助敎授들도 맡았다. 쇼인이 野山獄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알게 된 도미나가(富永有隣), 쇼인의 4촌인 구보(久保淸太郞), 숙생 중 최고 우등생인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등이 助敎授의 역할을 했다.
정보의 중요성 강조
松下村塾의 기둥에는 「飛耳長目帳(비이장목장)」이라는 공책이 걸려 있었다. 쇼인이 교류하는 사람 및 오사카를 다녀오는 상인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기록해 두는 것이다. 이로 인해 쇼인은 현재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그 구체적 내용을 시골 구석인 하기에 있으면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숙생에게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숙생들에게 정보수집을 명하기도 했다.
조슈번에서는 쇼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松下村塾의 숙생 4명을 포함한 6명을 정보수집을 위해 京都에 파견했다. 쇼인이 추천한 젊은이가 藩의 업무로 교토(京都)·에도(江戶)에 파견근무 또는 출장을 가면, 쇼인의 정보망으로서 최신의 정보를 기록한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松下村塾은 간단한 구조이다. 나무로 기둥 두 개 위에 판자 지붕을 올려 만든 대문, 대나무로 대충 엮은 나지막한 담 안에 들어선 목조 건물이다. 처음에 강의실은 다다미 3개가 깔린 방 2개와, 다다미 4개 반이 깔린 방 1개 등 모두 3개였었다. 넓은 강의실이 필요할 때는 방 사이를 막고 있는 장지문을 떼내어 통방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숙생들이 늘어나자 옛 강의실에 잇대 다다미 8개짜리 방 하나를 증축했다(1858년 3월). 증축 강의실은 쇼인과 제자들이 몸소 지었다고 한다.

요시다 쇼인의 탄생지에서 내려다본 성밑거리 모습.
30세의 나이로 斬首당한 까닭
그러나 松下村塾은 곧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간다. 1858년 미국의 요구에 몰린 막부는 美日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요코하마·나가사키·하코다데·니가타·효고(兵庫)의 개항과 에도·오사카의 무역 등을 결정했지만, 美國에만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어 막부는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大老(대로: 비상시 막부 최고의 役職)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천황의 칙허도 없이 조약에 비준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1858년 11월, 京都에서 하기로 돌아온 松下村塾의 숙생으로부터 막부 老中(노중: 平時 막부 최고 역직이지만 비상시엔 大老를 보좌하는 副首相) 마나베(間部全勝)가 攘夷派를 엄혹하게 단속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쇼인은 격노했다. 그는 마나베 암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나중에 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쇼인은 조슈藩廳에 마나베 암살을 위한 무기·탄약의 제공을 요청하면서 하기에 남아 있던 숙생들로 요격대를 편성했다. 당시 에도에 있던 구사카 겐즈이 및 다카스기 신사쿠에게도 편지를 보내 계획에의 참가를 지시했다. 이에 대해 에도의 제자들로부터 「지금 움직이는 것은 時機尙早(시기상조)」라는 답장이 왔다. 쇼인은 격노했다.
더욱이 조슈번의 上役인 주후(周布政之助)도 쇼인을 방문하고 과격한 행동을 중지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쇼인은 듣지 않았다.
쇼인의 위험한 행동에 조슈번은 松下村塾의 폐쇄를 명했다. 그리고 1858년 12월5일, 쇼인을 野山獄에 再수감했다. 쇼인이 1859년 1월1일의 궐기를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로부터 쇼인을 에도로 호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쇼인이 에도로 보내지게 된 이유는 「안세이(安世)大獄」에서 옥사했던 「尊攘志士」 우메다 운빙(梅田雲湃)이 『하기에서 쇼인을 만났다』는 말을 남기고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1858년의 안세이大獄은 攘夷를 부르짖으며 막부를 흔드는 과격파를 막부의 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피의 숙청을 감행한 사건이다. 오바마藩(지금의 福井縣)의 藩士 우메다는 尊王攘夷의 이데올로그 중 하나였다.
막부의 최고재판소인 評定所(평정소)가 쇼인에게 신문한 것은 1856년 겨울에 운빙과 만나 대화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京都의 皇居에 막부 타도를 선동한 편지를 투입한 사실이 있는지 하는 두 가지 질문이었다. 여기서 만약 쇼인이 발뺌을 했다면 무사할 뻔했다.
그러나 쇼인은 『막부 타도를 촉구하기 위해 公卿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막부의 老中 마나베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고 자백했다. 評定所의 관리들은 예상도 하지 못했던 老中 암살계획에 깜짝 놀랐다. 評定所의 판결은 「死罪」였다. 판결 당일(1859년 10월27일)에 그는 참수되었다. 그때 쇼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쇼인은 에도로 호송되기 직전 野山獄에 갇혀 있을 때 숙생들에게 편지를 보낸 바 있는데, 그 내용을 현대문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幕府 및 諸藩 무사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신분에 관계없이 풀숲과 같은 곳에 사는 민초를 일으켜 세워 체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草莽崛起(초망굴기)」이다. 쇼인의 「초망굴기」는 훗날 다카스기 신사쿠 등 숙생들에 의해 실현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조선Pub(14-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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