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17만명 강제 이주
'지옥 열차' 타고 6000㎞ 강제 이주… 척박한 땅 개척

그래픽=안병현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이끈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가 최근 카자흐스탄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홍범도 장군이 머나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별세한 걸까요? 그 배경에는 1937년 러시아 연해주 등에 살던 우리 동포 약 17만명이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야 했던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은 1991년 독립하기 전까지 옛 소련의 일부였습니다. 홍범도 장군 역시 소련이 강제 이주시킨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죠.
느닷없는 강제 이주
1937년 9월 9일 밤, 고려인(옛 소련 지역에 사는 우리 동포) 이주민을 태운 첫 수송 열차가 러시아 동쪽 연해주의 라즈돌노예역을 출발했습니다. 1주일이나 2~3일 전, 심지어 바로 전날 '짐을 싸고 역에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열차가 기적을 울리자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얼굴에는 슬픔과 눈물이 가득했고 "슬퍼 말라. 또 올 날이 있으리라"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김호준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
고려인 대다수는 재산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화물차와 가축 운반차에 짐짝처럼 실려 시베리아를 횡단해야 했습니다. 유리창 하나 없이 문을 널빤지로 막아 '검은 상자'라고 한 열차 안에서 3~4주 동안 무려 6000㎞를 이동했습니다. 그동안 굶주림과 추위, 질병, 사고로 숱한 동포가 안타깝게 죽어갔습니다. 강제 이주를 전후해 숙청당한 사람까지 합치면 당시 고려인 사망자는 2만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나라 없는 약소민족의 비애였습니다.
소련 당국은 강제 이주 직전 고려인 지도층 인사 2500명을 '일본 간첩' '반(反)혁명자'라는 구실로 체포해 대부분 총살했는데, 김단야·박진순 등 소련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이때 희생됐습니다.
스탈린의 민족 탄압 정책
고려인 강제 이주는 특정 민족을 철저히 탄압하는 '국가 테러리즘의 극치'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책임자는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었어요. 그는 훗날 북한의 남한 침공 계획을 승인하고 지원해, 한반도에 6·25전쟁의 비극을 일으킵니다.
스탈린은 왜 고려인을 강제 이주시키라고 지시했던 걸까요? 그는 중·일 전쟁이 닥치자 '일본이 연해주로 쳐들어올 수 있는 상황에서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고 의심했다고 합니다. 또한 고려인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치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우려했다고 해요. 최근엔 소련이 '고려인의 독립운동이 오히려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고 걱정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중 어떤 것이라 해도 결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이주시킨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민족 무대를 넓힌 개척자' 고려인
중앙아시아로 간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에 7만여 명, 카자흐스탄에 9만여 명이 배치됐고 이후 다른 지역으로도 분산됐습니다. 생전 처음 겪는 열악한 환경과 맞닥뜨린 이들은 절망했습니다. 마을 하나 없는 벌판도 많았고, 땅굴을 파고 거주하거나 움막에서 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들은 끝내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넓이가 한반도의 18배인 중앙아시아에서 조금씩 적응해 가며 벼농사와 목화 농사를 시작해 경작지를 크게 늘렸습니다. 1983년에 이르면 소련 전역의 쌀 생산량 300만t 가운데 카자흐스탄에서 90만t, 우즈베키스탄에서 50만t이 생산됐다고 해요.
고려인의 임차 농업 방식도 주목받았어요. 이 방식은 거주지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거예요. 고려인들은 1년 중 8~9개월을 가족과 떨어져 황량한 들판에서 땀을 흘린 결과 임차료를 내고도 많은 농산물을 자기 몫으로 챙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근면함 때문에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대체로 다른 소수민족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올라섰다고 합니다. 교육열도 대단했고,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노력도 지속됐습니다.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6년 이들은 비로소 거주 이전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에 대해 '불법적 범죄 행위'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중앙아시아 여러 신생국에선 토착민이 세력을 얻고 고려인이 차별 대우를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이들 중 일부는 다시 러시아나 한국으로 이주했죠. 현재 러시아와 옛 소련 지역의 고려인은 약 50만명입니다. 이들에게는 "유라시아 중심부 지역을 한민족의 활동 무대로 만든 선구적 개척자"라는 긍정적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연해주]
강제 이주 전 소련에 있던 대다수 고려인은 연해주(프리모르스키)에서 살았어요.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러시아 동쪽 영토 중에서도 두만강을 경계로 한반도와 맞닿아 있는 16만5900㎢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예전엔 발해 영토였고,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 영토가 됐습니다. 그 직후 조선 농민들이 경작지를 찾아 두만강을 넘어 월경하면서 러시아 이주가 시작됐습니다. 1882년 연해주에는 조선인 이주자 수가 1만명을 넘어서, 8000여 명이었던 러시아인보다 많아졌어요.
이곳은 20세기에 들어서서 항일·독립운동의 기지가 됐습니다. 한반도와 인접해 있고 일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곳이었기 때문이죠. 연해주의 조선인 수만 명이 의병 운동에 참여했고, 최재형·이범윤 등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계획을 세운 곳도 연해주였습니다. 1920년에는 러시아 혁명기의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인 300여 명을 학살한 '4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유석재 기자/기획·구성=김연주 기자, 조선일보(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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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국민 코리안'의 탄생?
고려인·조선족·자이니치… 나라 빼앗겨 생긴 이름들 이젠 국민마저 내편 네편… 모든 '코리안' 통합은 요원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달 전 카자흐스탄 출장 중 여러 고려인을 취재하면서 그런 생각이 굳어졌다. 고려인은 중앙아시아 동포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일제 압제를 피해 러시아 연해주에서 살던 고려인 17만명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명령으로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에 흩어졌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19만명, 카자흐스탄 10만명 등 약 55만명이 살고 있다. 1910년 나라 망하지 않고 백성 보호하는 튼튼한 국가를 만들었다면 그 후손이 머나먼 땅에서 태어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자칫하면 '최고 존엄' 떠받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으로 살 수도 있었다. 어머니가 평안북도 영변 출신이다. 6·25전쟁 중 외할아버지가 자식들 데리고 남으로 피란하지 않았다면 '조선 사람'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압록강 넘어 만주 땅에 오갔다던 할아버지가 시인 윤동주 살던 용정이나 소설가 김학철처럼 연길에 정착했다면 지금 중국 조선족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하와이에 이주했다면? 강제징용으로 일본 땅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면? 미주 한인(재미 동포)이나 자이니치(재일 교포)로 살았을 수도 있다. 이러니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일은 기적일 수밖에.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관통한 모든 한국인이 다 그렇다. 100여 년 전 제대로 된 나라 만들지 못한 까닭에 모든 개인이 역사의 파도에 휩쓸렸다.
한국인·조선인·조선족·고려인·한인·자이니치 구별은 그러므로 역사적 우연의 산물이다. 영어로는 모두 '코리안'으로 부른다. '사우스 코리안' '노스 코리안'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구별하더라도 다 같은 '코리안'이다. 그러나 우리말에는 이들을 아우르는 말이 없다.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이 저서 '한국 사람 만들기'에서 지적했다. "유대인(Jew)들은 어디에 살든 유대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 '코리안'에 해당하는 한국말이 없다. '한국 사람'은 진행형이다."
100년 전 3·1운동으로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과제는 독립이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과제는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 즉 국민국가 만들기였다. 대한민국은 분단·전쟁 같은 고난을 딛고 산업화·민주화를 거쳐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 나라로 발전했다. 이제 대한민국의 과제는 갈라지고 찢긴 '코리안'을 포용·통합하고 이를 더 큰 도약의 자산으로 삼는 '코리안 빌딩(Korean building)'일 것이다.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낸 책 '통일의 시대가 오는가'에서 통일 후 국호를 '우리나라'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다면 '코리안 빌딩'은 '우리나라 사람 만들기'이다. 이를 위해 조 교수는 "우선 대한민국을 좋은 나라로 만들어 우리나라가 도달해야 할 이상에 근접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껏 벌어진 일을 보면 모든 '코리안'을 포용·통합하는 일은 요원한 일로 느껴진다. '관제 민족주의'(최장집 교수)로 대한민국 안에서도 내 편 네 편 가르는 형편이다. '사우스 코리안'조차 '레프트 코리안'과 '라이트 코리안'으로 갈라지고 '국민'과 '비(非)국민'으로 나뉠 판이다. '비국민 코리안'은 100년 전처럼 압제를 피해 나라를 떠날지도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다. 오늘 귀국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엊그제 카자흐스탄에서 독립운동가 유해를 봉환했다. 바람직한 일이다. 이제는 편 가르기를 넘어 '코리안 빌딩'이라는 커다란 통합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 지난 세기의 잘못을 바로잡는 길이다.
-이한수 문화부 차장, 조선일보(1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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