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는 문명사회의 핵심 가치… 요즘 법치국가인지 의문스러워
정의를 법 위에 두려는 시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근대국가와 문명사회를 뒷받침하는
가장 핵심적 가치는 법치주의(法治主義)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시대에 법의 우위를 분명히 확립함으로써 힘없는 보통 사람들도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존 롤스가 말한 정의의 첫째 원칙 '사람들이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나누어 가져야 한다' 역시 법치주의 확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과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정의의 하위 개념은 아니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가
한 손에 저울을, 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은 법과 정의가 상호 보완적 가치임을 설명한다. 근대법이 '사적 정의 실현'을
엄격히 금지하는 것 역시 힘을 가진 자가 자유와 정의를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우리가 과연 법치국가에서 살고 있는가, 문명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의문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 당장
현대중공업 사태만 해도 그렇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합병은 고사(枯死) 직전에 내몰린 조선 산업을 살리기 위한 국가 차원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 사실을 노동조합도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합병 이후 구조조정이 예상된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법이 침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도 정부도 여당도 말이 없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대한민국에서 한 기업의 인수·합병을 둘러싸고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유출했다는 이유로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당한 외교관 K씨 일은 또 어떤가? 필자 역시 그
행위 자체를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다. "정상 간 통화 내용까지 유출해 정쟁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비난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야당 주장처럼 이번 사건이 '인민재판'처럼 다뤄지는 측면은
없는가? 되돌아볼 일이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나라에서 법원에 대해서 이토록 잔인한 수사를 한 사례가 대한민국밖에 어디 더 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그는 왜 이렇게 절규하는가? 사법 농단을 했다면 국가의 근본을 뒤흔든 중대 범죄다. 이미 여론
재판은 끝이 났다. 이제 법적인 판단이 남아 있을 뿐이고 그가 호소할 곳은 법정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법치국가이고 문명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국민 상당수가 '정의'를 '법'의 상위 개념으로 보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국정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촛불 혁명이 만든 정부라는 표현에 그 생각이 단적으로 함축돼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법치 파괴'를
통치 수단으로 삼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 혁명은
박근혜 정부를 탄핵한 것으로 완성되었다. 탄핵은 대한민국의 헌법과 제도에 따라 질서 있게 진행됐고 그것이
촛불 민심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그 결과로 탄생한 정부일 뿐이고 국민은 법과 제도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라고
권한을 위임했다. 어느 누구도 '촛불의 정의'가 그들만의 것이라고 한 적이 없다. 촛불 정의를 위해 법을 무시하라고
허락한 적도 더더욱 없다. 그런데 왜 아직도 촛불 민심을 내세워 법치를 위협하려 드는가? 정의를 법 위에 두려는 위험한 시도를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이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기본이고 상식일 것이다.
-신동욱 TV조선 뉴스9 앵커, 조선일보(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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