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之利'로 미국 설득하라
한·일 갈등은 미국 입장에선
두 나라 국내 정치용 카드일 뿐
중국이 누리는 漁夫之利 납득시켜야 美 제대로 움직여
몇 달 전 미 국무부 관리가
워싱턴의 아시아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일 갈등 해법을 자문했다고 한다. 한일 관계가 위안부 합의 파기,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초계기 갈등으로 이어지는 동안 워싱턴도
아시아의 두 동맹국 머리 위로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사와 관련된 한일 갈등이 격화될 때마다 워싱턴에선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한국은 목소리를
높이고, 일본은 물밑에서 움직이고, 미국은 "아, 또 시작인가"
하면서 뒷목 잡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막후에서 수습하는 식이었다.
백악관에서 아시아를 담당했던 전직 관리는 "한일 간에 분쟁이 생겨 양측이 입장을 설명하러 온다고 하면 다들 겁을 냈다"고 했다. 한국 측은 흥분해서 일본을 비난하고, 일본은 자기들이 사과했던 목록을 들고 와서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라고 주장한다. 그러고 나선 이미 다 아는
역사와 감정이 뒤섞인 길고 긴 설명을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미국은
"이해한다"며 한일 양국을 달래야 했다.
미국은 최근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로
격화된 한일 갈등 해결을 적극 돕겠다고 하면서도 '중재'란
표현은 애써 피하고 있다. 미국이 속 시원하게 중재에 나서지 않는 것은 우선 한일이 모두 미국의
동맹국인 만큼 어느 한쪽을 편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한일 간 과거사에서 비롯된 갈등이 대부분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이다. 미국 입장에선 해결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중재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무모하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은 또 한일 양국 지도자가 한일 갈등을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워싱턴 시선으로 보면 한일 갈등은 양국 지도자가 자기 정치하는 데 이용하는 카드에 불과한데, 미국이 거기 끼어들어 들러리 서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요즘 워싱턴은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재까진 아니더라도 한일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한 발짝 더 나간 듯하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과 매슈 포틴저 NSC 아시아 담당 보좌관이 곧 한국과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일이 서로 담력 시험하듯 물러서지 않고 있어 상황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악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미국 국익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워싱턴에선 한국 외교를 '오로지 일본과 대결하는 구도에서만 세상을 보는 감정적 외교'라는 프레임으로 본다. 억울하지만 그간 현장의 대미 외교가 세련되지
못했던 결과이다. 지금도 정부는 일본의 일방적 조치의 부당성에 초점을 맞춘다.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가 세계 무역 질서를 해쳐 결국 미국 국익에도 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무역 분쟁을
외교 수단으로 쓰는 트럼프 행정부가 맞장구치기엔 애매한 주장이다.
미국의 역할을 제대로 끌어내고 싶다면 악화일로의 한일 갈등을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중국을 이롭게 할 뿐이란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요즘 워싱턴의 모든 관심은 중국으로 통한다. 어떤
현안에 대해 토론해도 미국 최대 안보 위협이 된 중국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로 이어진다.
한국은 한일 관계라는 작은 틀에서 벗어나 판을 크게 읽어야 한다. 안정적 한일 관계가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얼마나 중요한지 설득하는 쪽이 미국을 움직이는 데 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미국도 움직일 공간이 생기고 한국도 이 갈등에서 출구를 찾을 수 있다.
-강인선 워싱턴지국장, 조선일보(19-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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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 일본을 다룬 중국의 전략
1945년 8월 15일 장제스(蔣介石)는 수도 충칭(重慶)에서
대일(對日) 항전 승리를 선언하는 연설을 한다. 그는 연설 말미에 일본의 침략으로 2000만 명이 희생되어
복수심에 치를 떠는 국민에게 뜻밖의 당부를 전한다. 중국은 일본 군벌을 적으로 삼았을 뿐
인민을 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일본인에게 노예적 굴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중국 국민을 설득한 것이다.
나아가 지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선의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중국의 전통이며, 폭력으로 폭력을
보복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때의 관대한 전후 처리 방침은
훗날 '이덕보원(以德報怨·덕으로 원수를 갚음)' 연설로 널리 알려진다.
1949년 대륙을 장악한 중국 공산당 정권은 국민당과 경쟁이라도 하듯 한술 더 떴다. 공산당
지도부는 옌안(延安) 시절부터 '죄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있을 뿐 일본 인민에게는 죄가 없다'는
논리로 일본군의 전의(戰意)를 내부에서 해체하는 심리전을
항일 전략으로 삼던 터였다. 공산당 관할 전범 재판에서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해진 일본인은 한 명도
없었다. 이러한 '군국주의자·인민 구별론'은 1972년 국교 정상화에도 적용된다. 저우언라이는 일본 인민에게 부담을 지우는 배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고, 중국은 수교 성명에서 공식적으로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국에 대한 전쟁 배상 청구를 포기'하였다.
중국의 관용은 일본에 역사 망각의 면죄부를 주는 선심도, 공짜도 아니었다. '마음의 빚'을 떠안은 일본은
1979년부터 40년 동안 경제협력사업(ODA)으로
중국에 무려 3조6500억엔을 제공해야 했다. 중국은 이를 종잣돈 삼아 일본을 능가하는 경제 굴기(崛起)를 성취했다. 중국의 관대한 전쟁 책임 추궁은 도덕적 우위를 확보한
채 일본의 부채의식을 최대한 외교 자산으로 활용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였던
것이다. 한때 한국도 누렸던 그 외교 자산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일보(19-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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