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용산(龍山)] [용산역 철도공장]

뚝섬 2022. 4. 17. 06:04

용산(龍山)

 

윤봉길·이봉창 잠든 곳… 한반도 교통·물류 중심지

 

1906년 용산역사와 광장/국학자료원

 

다음 달 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는 대통령 집무실을 서울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길 계획입니다. 한양 도성 바로 남쪽, 남산과 한강 사이에 자리 잡은 용산은 역사적으로 무척 파란만장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용산(龍山)이란 지명은 '지형이 이무기(전설상의 동물인 뿔 없는 용)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한강과 서울을 잇는 교통 중심지

용산 지역에 처음으로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은 백제 초기였다고 합니다. 백제가 초대 임금 온조왕(재위 기원전 18~서기 28) 이후 세력을 뻗으면서 용산을 비롯한 한강 일대가 백제 세력권에 들어간 것이죠.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491)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가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자 용산은 고구려의 영토가 됐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엔 '한산주' '한양군' 소속이었고, 고려 시대엔 '양주' '남경' '한양부'의 일부였습니다.

1392년 개국한 조선 왕조가 수도를 용산 북쪽인 한양으로 정하면서 용산은 교통과 물류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됩니다. 당시 한양은 동서남북 4대문(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 안을 의미했어요. 용산은 한양도성 밖의 교외인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이였죠. 지금은 한강 하구가 휴전선에 포함돼 수로 교통이 막혔지만, 옛날에는 서해에서 배를 타고 넓은 한강을 따라 한양 근처까지 들어올 수 있었거든요. 이 때문에 용산은 전국에서 몰려온 조운선들이 앞다퉈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한강을 중심으로 나라의 세곡(稅穀·세금으로 내는 곡식)을 수송하고 활발한 상업 활동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경강상인(京江商人)이었는데요. 이들의 본거지가 바로 용산이었습니다. 용산에는 세곡과 군량미, 군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어요. 18세기 무렵 용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도시'가 됐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화와 침략의 물결이 한꺼번에 밀려들다

1876년(고종 13년) 개항이 이뤄진 후 개화의 물결이 한양보다 한발 앞서 밀려온 곳도 용산이었습니다. 1884년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이 들어섰고, 1887년 선교의 자유가 승인된 이후엔 외국인들이 들어와 원효로를 중심으로 종교와 상업 활동을 펼쳤습니다. 1888년엔 한강에 증기선이 떴고 1900년에는 원효로 4가까지 이르는 전차가 개통됐죠.

하지만 외부의 압박에 의한 개항은 '문명의 유입'과 '외세의 침략'이라는 두 얼굴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용산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1882년 신식 군대와의 차별을 겪었다며 구식 군대가 분쟁을 일으킨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이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진입한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했습니다. 역시 한강과 한양 도성 사이라는 지정학적 이점 때문이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이긴 일본은 용산에 자기들 군대를 주둔시켰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또 승리하면서 용산의 비극이 본격화됩니다. 1904년 대한제국과 강제로 맺은 '한일의정서'에 '일본은 군사 전략상 필요한 곳을 일정 기간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용산에 일본군 수만 명이 주둔할 수 있는 대규모 군사 기지를 세웠던 것이죠. 그래서 990만㎡에 가까운 용산 땅을 헐값에 매입해 약 380만㎡를 군사 시설로 사용했고, 1945년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곳을 무력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독립유공자들이 잠든 곳

일본이 매입한 땅에 군사 시설과 함께 들어선 '철도 타운' 또한 문명과 침략의 두 얼굴이 극적으로 공존한 장소 중 한 곳입니다. 용산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철도 공장, 동쪽에는 철도국·철도 관사·철도 병원이 자리 잡았습니다. 일제는 한반도에 철도망을 만들어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침략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는데요. 그래서 용산에 한반도 철도의 핵심 기지를 만든 것이었죠.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용산에 '침략과 수탈의 중심 기지'가 생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용산이 '한반도 철도 교통의 중심'이 됐다는 것이죠. 경부선·경인선·경의선·경원선·호남선 같은 주요 철도 노선들과 모두 연결된 역이 바로 용산역이었습니다. 용산으로선 그림자인 동시에 빛인 셈이었죠. 광복 다음 해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첫 열차인 '조선해방자호' 제작이 이루어진 곳도 용산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용산은 또다시 많은 파란을 겪었습니다. 일본군이 물러난 용산 군사 기지엔 38선 이남을 일시 점령한 미군이 주둔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미군은 철수했지만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며 미군은 한반도에 돌아왔고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다시 용산에 주둔하게 됐죠. 얼핏 보면 일본군이 미군으로 바뀐 것 같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일본군 주둔이 침략을 위한 1904년 한일의정서에 의한 것인 반면, 미군 주둔은 정전협정 이후 북한과 중국의 재침략을 우려한 한국 정부의 요구로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용산의 미군 기지는 경기 평택으로 이전하는 중입니다.

누군가는 용산이 '오욕의 역사가 서린 곳'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공자들의 묘소가 된 용산 효창공원도 있습니다. 이곳엔 김구·윤봉길·이봉창·백정기·이동녕·조성환·차이석 같은 독립유공자들이 잠들어 있고 안중근 의사의 가묘(유해 없는 묘소)도 있습니다. 용산 해방촌은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38선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새로운 조국에서 살아갈 꿈을 꾸며 정착했던 곳입니다. 세계 각지의 문화가 집결돼 서울에서도 가장 국제화된 지역인 이태원, 한국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인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용산에 있습니다.

 

[경강상인]

경강(京江)이란 서울의 뚝섬에서 양화나루에 이르는 한강 일대를 이르던 말입니다. 조선 후기에 이곳을 중심으로 세곡 등 운수업과 상업에 종사했던 상인들을 '경강상인', 약칭 '강상'이라 불렀습니다. 17세기 이후 이들의 활동은 크게 활기를 띠었는데요.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1702년(숙종 28년) 이들은 쌀 1000석 정도를 실을 수 있는 배를 300여 척이나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경강상인은 전국적으로 활동하며 이윤을 남겨 국가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상업으로 번 돈은 배를 만드는 조선업에 투자해 근대적인 상업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쌀 매점(물건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 사들임) 등으로 인한 폐해도 컸습니다.

 

광복 다음 해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첫 열차인 ‘조선해방자호’. /코레일/(우) 왼쪽부터 용산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와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 /국가보훈처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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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철도공장

 

일제가 용산 땅 380만㎡ 빼앗아 군수물자 등 오가는 철도기지 건설
한반도 최대 철도공장도 세워

1946년 한국인 직원들 손으로 '조선해방자호' 만드는 데 성공

 

정부가 최근 서울 용산역과 인접한 옛 정비창 부지 51만㎡(약 15만4275평)에 주택 8000가구가 들어설 '미니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어요. 이 소식을 듣고 "아직도 서울 한복판에 빈 땅이 남아있었단 말이야?"라며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용산역 건물 서쪽으로 펼쳐진 이 땅은 사실 우리 근대사의 아픈 사연이 많이 쌓인 곳이랍니다.

◇일제, 용산에 '철도 타운' 건설

"왜인(일본인)들이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구역(용산)에 멋대로 군용지란 푯말을 세우고 경계를 정해 우리나라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대한제국기 선비 황현(1855~1910)이 1904년 '매천야록'에 기록한 내용이에요.

 

 

당시 러일전쟁(1904~1905년 한반도와 만주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일본이 한국과 강제로 맺은 동맹·협력 문서)를 구실 삼아 한반도 곳곳에서 넓은 땅을 군용지로 내놓으라고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했어요.

그중 용산역 일대 부지는 990만㎡에 이르는 광대한 규모였습니다. 일본군이 제시한 보상비는 고작 3.3㎡(1평)당 2전이었는데요, 당시 쌀 한 되(약 1.8L)가 20~25전이었으니 거저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 정부와 주민의 저항에 부딪혀 용산의 군용지 수용은 380만㎡가 됐고, 많은 주민은 하루아침에 살던 터전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용산에서 그들이 한국인의 피눈물 위에 건설한 것은 '철도 타운'이었습니다. 연구서 '철도와 근대 서울'을 쓴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한반도에 철도망을 만들어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침략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일제가, 서울 도성 남쪽인 용산에 한국 철도의 핵심 기지를 만든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용산역은 경인선, 경부선, 호남선 등 많은 노선의 시발점이거나 통과역인 교통의 요지가 됐습니다. 수많은 일본군 병력과 군수물자가 이 역에서 태우고 내려졌죠.

용산역을 기점으로 동쪽에는 철도국, 철도 관사, 철도 병원 등이 빼곡하게 들어섰습니다. 이 시설 바로 옆에는 일본군사령부가 자리 잡았죠. 그리고 서쪽에 들어선 것이 바로 '철도 공장', 최근 미니 신도시가 들어선다고 발표된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한반도 최대 규모 '용산 철도 공장'

일제는 1905년 용산역 서쪽에 철도 차량 수리를 위해 '용산공작반'을 설치했습니다. 1923년 '경성 공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죠. 기관차와 객차·화차를 직접 제작하고 수리하던 한반도 최대의 철도 공장이었어요.

용산 철도 공장에서 한국인 직원은 부서 배치와 기술 습득, 봉급 수령 같은 모든 면에서 일본인 직원보다 훨씬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하위 기술직급인 기수(技手)직의 경우 일본인의 평균 월급이 126원이었던 데 비해 한국인은 68원으로 54% 정도에 그쳤어요.

하지만 1945년 광복이 되자 용산 공장의 한국인 직원들은 일제 치하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을 총동원, 다음 해 '조선해방자호' 기차를 만들어 운행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해방자호는 국내 기술로 만든 최초의 열차였지요. 이후 철도 공장은 '서울철도국 용산공작창'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0년대부터는 생산 대신 정비만 담당하는 '정비창'의 역할을 했습니다. 2011년에는 이 임무마저 경기 고양의 행신역 등 다른 곳으로 넘긴 뒤 철거됐고 철도 공장의 100여 년 역사를 마쳤답니다.

[용산역 인부로 취직했던 이봉창]

1932년 1월, 일제 침략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일왕을 향해 폭탄 투척 의거를 했던 인물을 알고 있나요? 바로 독립운동가 이봉창(1900~1932) 의사입니다. 그런 그가 의거 전에 일했던 곳이 바로 '한국 철도의 중심지'였던 용산역이었답니다.

이봉창 의사는 1918년 용산역 조차계(操車係)의 말단 인부로 취직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은 일본인과 달리 승진이 지체돼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다 중상을 입는 일이 잦았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왜 이런 차별을 받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그는 4년 8개월 만에 사직했고, 결국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유석재 기자/기획·구성=박세미 기자, 조선일보(2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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