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 조선족
만주에 남은 조선의 후예… 독립운동 기지 역할도 했다

지난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한복 입은 여성이 등장해 ‘중국의 문화 침탈’이라는 논란이 일었어요. 중국은 여러 소수민족 중 조선족 의상을 입고 나온 것이라 주장했어요. /김지호 기자
지난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이 놀랐어요. 중국은 이 여성이 여러 소수민족 중 '조선족'의 의상을 입고 나온 것이라고 했어요. '중국의 문화 침탈'이라는 논란이 우리나라에서 거세게 일었어요. 조선족은 중국에서 부르는 명칭이고, 우리는 '중국에 사는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 뜻에서 재중동포(在中同胞)라고도 부릅니다. 중국 최대 민족인 한족(漢族)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인구 수로 15번째를 차지하죠. 이들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중국에 살게 됐을까요?
1860년대부터 본격화된 '강 건너가 살기'
중국의 동북 3성(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을 말하며 '만주'의 주요 지역을 차지하는 곳)에는 조선족 인구가 많은데요. 이곳은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었습니다.

현재 조선족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사람들은 19세기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조선 백성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전기 북방 변경에 출몰해 군사적 긴장을 일으켰던 만주족이 17세기 청나라를 세워 중국 대륙을 장악했고, 이후 조선의 국경 지역에선 이민족 침입의 우려가 줄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재해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선 북부 백성들은 조금씩 북쪽 국경을 넘어가 살게 됐죠. 지금처럼 국경을 엄격하게 통제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국경만 넘으면 조선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고 새 땅을 개척해서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860년대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돼 1870년 만주에 살았던 조선인은 7만7000명이었고, 1900년에는 22만명 규모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은 '간도'라 불리던 만주 일부 지역에 관리를 파견해 이 지역 조선인을 통치하려 했으나 1909년 일본과 청나라 사이의 간도협약으로 실패하게 됐습니다.
독립운동 기지와 일제의 이주 정책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당한 뒤 많은 한국인이 또다시 국경을 건너 만주 지역으로 망명했습니다. 이곳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기지가 됐고,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승리도 이 지역에서 벌어졌습니다. 일제 침탈을 피해 국경을 건너 새 터전을 잡은 민초도 많았죠. 당시 무장 항일 투쟁의 배경에는 이들의 피땀 어린 후원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군사 점령한 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곳에는 1932년 일제의 괴뢰(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이 들어섰는데요. 일본인·만주족·몽골인·한족·조선인 다섯 민족이 협력해 산다는 이른바 오족협화(五族協和)를 겉으로 내세웠어요.
한반도를 일본인이 사는 땅으로 만들려 했던 일제는 많은 조선인을 만주로 옮겨 살게 하는 정책을 세웠습니다. 그중에는 '한반도의 위아래를 뒤집어 만주에 포개 놓자'는 계획도 있었다고 합니다. 평안도·함경도 사람들을 만주 남쪽에, 전라도·경상도 사람들을 만주 북쪽에 살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에 비해 차별받는 '2등 백성' 신세인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화대혁명으로 고초 겪어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만주에 살던 조선인 중 약 80만 명이 한반도로 돌아갔습니다. 중국 정부는 1952년까지 중국 내에 정착한 나머지 조선인을 '중국인'으로 인정했는데 1953년 이들의 인구는 112만명 정도였습니다. 조선인이 많이 사는 옌볜(延邊)은 1952년 '조선족자치구'가 됐다가 1955년 '조선족자치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1966년부터 10년 동안 중국에서 극단적인 사회주의 운동인 '문화대혁명(문혁)'이 일어나면서 조선족 사회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자신의 고향이 한반도라고 생각하던 조선인들이 '우리는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인 중국 조선족' '우리 조국은 중국'이라고 여기게끔 '정신 개조'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어 책을 불태우거나 한국 지명이 들어간 간판을 내건 식당을 부수는 등 탄압이 이뤄졌습니다. 문혁이 끝나면서 이런 광풍(狂風)은 지나갔습니다.
대한민국 내 조선족 70만명 시대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조선족들은 대한민국을 오갈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시 옌볜 지역에 가서 여전히 조선족이 한국어와 한글을 쓰는 것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가 잘 보존돼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중국 내 조선족 사회는 다시 위기를 겪게 됐습니다. 중국 개혁·개방에서 동북 지역은 소외됐고, 상당수 인구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중국의 칭다오·선전 같은 대도시와 우리나라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현재 중국 내 조선족의 인구는 170만명 정도인데요. 가장 큰 조선족 도시로 알려졌던 옌지(延吉)에는 현재 70만명에 가까운 인구 중 15만명이 채 되지 않는 조선족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식당이라는 한글 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주인은 한족인 경우도 많습니다.
반면 한국 내 조선족 인구는 옌지시 인구에 맞먹는 70만명으로 훌쩍 늘어났습니다. 조선족은 그동안 한국과 중국 양쪽의 언어와 문화를 알고 있다는 장점으로 한·중 교류와 사업의 가교 역할을 해 왔지만, 한편으로는 일부가 폐쇄적인 공동체를 이루거나 범죄에 가담해 반감을 사기도 합니다. 같은 혈통이면서도 중국 국적을 갖고 있고, 중국과 한국 양쪽에서 을(乙)인 이들을 어떻게 현명하게 보듬고 나아갈 것인지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왜곡으로 이어진 중국의 논리]
현재 중국의 인구는 14억명이 넘고, 이 중 91%가 한족입니다. 나머지 9%는 조선족을 포함한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져 있죠. 중국이 이렇게 다양한 민족으로 이뤄진 나라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이론이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입니다. 중국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이뤄진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다는 얘기죠.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기보다 '모두 다 내 밑으로 들어오라'는 문화 제국주의적 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더구나 이 이론은 '현재 또는 과거의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논리여서 고조선·고구려·발해를 중국 역사로 왜곡하는 '동북공정'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좌) 2011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열린 조선족 민속 문화절 행사에서 조선족 동포가 장구춤을 선보이는 모습. /안준호 기자/(우)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사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중국인 거리 풍경. /오종찬 기자
-기획·구성=조유미 기자/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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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靑剛'은 '백청강'
요즘 한국에서 조선족 청년 '백청강(白靑剛)'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공중파 방송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그는 지금 중국 조선족 사회의 영웅이 됐다. 지난 10일 그가 연길(延吉)공항에 나타났을 때 수많은 현지 팬들이 공항에 몰려나와 "백청강"을 연호했다. 현지 신문들도 "백청강이 고향에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한국에서도,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도 '백청강'으로 불리는 이 22세의 청년을 '바이칭강'으로 불러야 한다고 우기는 기관이 있다. 한국의 국립국어원이다. 이 기관이 정한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백청강은 국적이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어 발음인 '바이칭강'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이 아니라 조선족 바둑기사 박문요(朴文堯)와 송용혜(宋容慧), 연변조선족자치주 이용희(李龍熙) 주장(州長)도 각각 '퍄오원야오' '쑹룽후이' '리룽시'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막무가내식 표기법은 수천년 전통을 가진 우리 고유의 한자어 발음을 무시하고, "모든 외래어는 현지 발음에 가깝게 적는다"는 원칙을 한자로 된 모든 인명에까지 무리하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립국어원이 무작정 중국어 발음을 쫓아가는 것과 달리, 정작 중국 내 조선족들은 우리 고유의 한자어 발음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연길공항에 내리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길'이라고 쓴 한글 공항 간판이다. 시내로 들어서면 '연길시 국가세무국' '연변일보' '중국인민은행' 등 모든 관공서와 금융기관, 상점 간판이 한국어로 되어 있어 읽기 편하다. 중국어 발음인 '옌볜르빠오' '런민인항'이라고 쓴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연변일보·요녕조선문보·흑룡강신문 등 한글로 된 신문들은 중국 지도자 '胡錦濤' '溫家寶'를 '호금도' '온가보'로, 北京과 上海는 '북경' '상해'로 적는다. 이들은 또 한자어를 단지 한글로 적는데 그치지 않고 적절한 한국어로 번역해 표기한다. 가령 두만강 하류 혼춘(琿春)시의 '口岸大路'는 '통상구대로'로 적는다. 쉽고 편리한 우리말로 적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다.
연변지역에서 보편적인 한자어의 한국식 표기법은 중국이 55개 소수민족의 고유언어 사용을 보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족 사회가 한국어 교육을 그만큼 중시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청(淸)나라를 세웠던 만주족은 고유언어 교육을 경시하다 지금 언어가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말은 정신과 직결된다. 국립국어원이 백청강을 '바이칭강'으로 표기하라는 것은 그에게 민족성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백청강'에는 민족성이 담겨 있지만, '바이칭강'에는 민족성이 없다. 이때 한글은 단지 소리를 옮겨 적는 도구로 전락한다.
한국에 주재하는 중국 외교관이나 기관 대표들도 한국어 발음으로 된 한글 명함을 사용해, 주재국의 언어와 발음을 존중해주고 있다. 이빈(李濱) 전 대사나 하영(何潁) 서울총영사, 차효연(次曉燕) 교육담당관, 양강(楊强) 국가관광국(國家旅遊局) 서울지국장 등이 그런 예다. 문제점투성이의 중국어 표기법으로 혼란을 초래하는 국립국어원에 말해주고 싶다. "백청강은 백청강이지 바이칭강이 아니다."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조선일보(1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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