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뚝섬 2020. 12. 27. 06:15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②

 

세상 보탬 되지 않는 자 가운데 글 쓰는 선비가 으뜸이다”

전북 고창 청보리밭. 농민의 지혜가 담긴 땅이다 

 

정도전과 서유구, 그리고 선비

 

고려 말기인 1375년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 정도전이 전라도 나주 소재동으로 유배됐다. 유학자가 왔다는 소식에 노인 하나가 정도전을 찾았다. 마중 나온 종에게 유학자가 하는 일이 뭔가 묻자 종이 답했다. “음양과 오행, 초목의 크고 시듦, 삶과 죽음의 이치까지 통달해 아는 사람이외다.” 그러자 노인이 이리 답하곤 돌아가 버렸다. “실상이 없으면서 이름만 있으면 귀신도 미워한다고 했고, 스스로 어질다 하고 남을 대하면 남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알 만하구나.”(정도전 ‘삼봉집’4, ‘금남야인·錦南野人’)

 

얼굴 화끈해진 정도전이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글자도 약간 알았고 사투리, 속담도 잘 알았다. 생면부지 유배객을 도와 집도 지어주며 두텁게 대접했다.(‘삼봉집’4, ‘소재동기·消災洞記’) 그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하는 어둡고 우매한 존재들(’삼봉집'3, ‘정몽주에게 보내는 편지[上鄭達可書·상정달가서]’)이 아니었다. 

전남 나주 백동마을은 고려 말 정도전이 유배됐던 곳이다. 백성을 우둔한 존재로 봤던 정도전은 그 농부들과 섞여 살며 대각성을 하고 혁명가로 변신했다. 세월이 흘러 19세기 조선 관료 서유구는 책상머리에 앉은 선비들을 비판하고 18년 동안 직접 농사를 지으며 백성의 실생활 향상을 위한 지식대백과 ‘임원경제지’를 저술했다.

 

부끄럽고 감동이 되었던 그는 훗날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부국(富國)’을 하고 천리 밖에서 적의 예봉(銳鋒)을 꺾는(折衝千里之外·절충천리지외) ‘강병(強兵)’을 하는 관리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런 세상이 오면 남쪽 변방에서 갇힌 채 죽더라도 한이 없겠다고 다짐했다.(‘삼봉집’3, ‘과거 떠나는 조박을 전송하는 서’[送趙生赴擧序·송조생부거서]) 하여 무장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연합 세력은 부패한 고려를 타도하고 새 나라를 세웠다.

 

세월이 까마득하게 흘러 19세기 초, 정계에서 물러나 농사짓던 조선 관리 서유구가 이렇게 기록했다. “메뚜기처럼 곡식이나 축내고 세상에 보탬 되지 않는 자 중에 글 쓰는 선비가 으뜸이다(空蝗黍粟無補於世者 著述之士實爲之最·공황서속무보어세자 저술지사실위지최).”(‘풍석전집’, ‘금화지비집’3, 금석사료서) 왕조들이 흥멸하는 동안에 무엇이 변했으며,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전 지구가 어지럽게 회전하던 19세기에 서유구는 곡식 축내는 선비들에게 무슨 화두를 던졌을까. 

전북 고창은 고부와 함께 19세기 말 동학혁명 발상지다. 해마다 봄이면 이곳 학원농장에서는 청보리축제가 열린다. 가난 탈출을 위해 농부들은 벼농사 대신 보리를 심었고 수확을 하는 대신 관광객들에게 보리밭 풍경을 선물해 부(富)를 거둔다. 부지런한 농부는 지혜롭다.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낙향 생활 18년과 대각성

 

정도전이 귀양살이를 하던 14세기 말, 고려 백성은 좋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 때리고 장을 쳐서 빼앗겨, 송곳 꽂을 땅도 없어 부모와 처자식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가 헤어지고 흩어지던 때였다.(1385년 11월 ‘고려사절요’, 1388년 7월 ‘고려사’, 식화1, ‘토지 겸병에 대한 상소’)

 

조선 왕조가 말기에 접어든 19세기도 마찬가지였다. 민간에서는 고질적 병폐인 삼정(환곡⋅전정⋅군정) 문란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고 권력 세계에서는 권력을 특정 가문이 독점한 세도정치가 한창이었다. 초계문신 출신인 김조순이 순조 장인이자 후원자로 등장하면서 세도정치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1806년 초계문신 동료 김달순이 상소 문제로 처벌받았다. 서유구 삼촌 서형수도 이에 연루돼 유배형을 받았다. 서유구는 곧바로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계 복귀까지 18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서유구는 고향 파주 장단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농사를 짓고 땔감을 줍고 ‘7척이나 되는 몸뚱어리가 조그만 거처조차 빌리지 못하며’ 살았다. 못이 박인 아들 손을 보고서 어머니 한산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에 살면서 호미도 못 알아보며 배에 곡식 채우고 몸에 비단 두르는 이들은 천지를 훔치는 도적놈이로다!”(정명현 등, ‘임원경제지,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12, p176~179) 그리고 서유구가 각성을 했다. 정도전처럼,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열려버린 것이다.

 

서유구(1764~1845).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용주의자다.

 

흙 국과 종이 떡은 가라”

 

워낙에 실용적 가풍 속에 성장한 서유구였다. 뇌속에 박혀 있는 그 실용주의적 시각과 18년간 몸으로 겪은 백성들 삶이 융합되면서 서유구에게는 고담준론하는 사대부들이 메뚜기처럼 보였다.

 

‘(사대부는) 조상 중 1명이라도 벼슬한 이가 있으면 눈으로는 고기 어[魚]와 노나라 노[魯]자도 구별 못 하면서 손으로는 쟁기나 보습을 잡지 않는다. 처자식이 굶주려 아우성쳐도 돌아보지 않고 손 모으고 무릎 꿇고 앉아 성리(性理)를 이야기한다.’ 독설은 이어진다. ‘왕은 앉아서 도를 논한다는데 뭘 논하는지 모르겠고 사대부는 일어나 행한다고 하는데 뭘 행하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서유구가 결론을 내린다. ‘(조선이) 천하의 가난한 나라가 된 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추세일 뿐이다.’(‘임원경제지’ 예규지 서문, 섬용지4 공업총정리, 정명현 등, 앞 책, p426, 427 재인용)

 

그래서 서유구는 방향을 틀었다. 공자 왈과 맹자 왈을 담은 경서와 현실적 준비 없이 세도정치 모순을 깨뜨리겠다는 이상주의적 경세론은 ‘먹지 못할 흙국이요 종이로 만든 떡(토갱지병·土羹紙餠)’이니, 자기는 백성이 현실에서 스스로 부국(富國)할 길을 트겠다는 것이다. 세상은 엄혹했다. 대표적인 경세론 학자인 정약용도 ‘내가 쓴 목민심서는 반 구절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선 안 된다’고 두려워할 정도였다.(정약용, ‘약암 이재의에게 보낸 편지')

 

서유구는 경세론을 포기하고 먹을 수 있는 국과 떡을 만들었다. 그게 ‘임원경제지’다. 농촌 경제를 열여섯 분야로 나눠 2만7000개가 넘는 표제어를 자그마치 250만자가 넘는 분량으로 설명한 책이다. 

 

‘임원경제지’는 259만 자가 넘는 글로 농업과 제조업, 상업과 예술 같은 민간 경제에 대한 모든 실용정보를 담았다. 사진은 잠업을 위한 뽕나무 재배와 수확 항목. 

잠업을 위한 뽕나무 재배와 수확 항목.

 

서유구가 겪은 참담한 나라

 

그 나라는 본인이 겪은 풍상은 유도 아니었다. ‘임원경제지' 가운데 생활용품을 다룬 ‘섬용지’ 서문은 이러했다. ‘한 항목이라도 한숨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벽돌 굽는 제도는 들어본 적이 없고 배는 겨우 다닌다는 이름만 있다. 수레는 아예 막막하다. 이래서 온 나라 사람이 지지리도 힘들게 이고 지고 다닌다.

 

우리 것이 이처럼 거칠고 졸렬하여 바다 건너 오랑캐 일본(海中之一醜·해중지일추)에게서 상품을 수입하게 될 줄 누가 생각했겠는가.’ 지식인들의 나태함과 비현실성을 한탄했던 서유구는 아예 독자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섬용지 독자들이여, 분개하는 바가 있을지어다’(其有所興慨者與·기유소흥개자여)!”(이상 국역: 정명현 등, 앞 책, p937)

 

이 모든 원인은 사대부, 바로 조선의 지식인들이었다. ‘우리 사대부들은 벌레와 물고기 이름을 고증하는 학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여 어부와 나무꾼이 비속어로 전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래서 (잘못된 지식을) 시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풍석전집’, 금화지비집 ‘낙랑칠어변’, 김대중, ‘풍석 서유구 산문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11, p118, 재인용)

 

서유구가 존경하고 따랐던 연암 박지원 눈에도 세상은 똑같았다.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는 ‘호질(虎叱·호랑이가 꾸짖음)’이라는 소설이 나온다. 창귀들이 선비를 잡아먹자고 추천했으나, 호랑이는 “유자(儒者)는 딱딱해서 체하거나 구역질이 난다”고 망설인다. 그러다 북곽선생이라는 고상한 유자를 만났는데, 그가 호랑이를 극구 칭찬하자 호랑이가 이리 말했다. “유자가 아첨꾼이라더니 참말이구나!”(박지원, ‘열하일기’ ‘호질’) 지식을 담당한 선비들의 나태함에, 결국 ‘사용하는 기구는 간편해지는데 조선은 옛 방법을 고집해 백배로 힘들면서 깨닫지 못하니 온 나라가 궁핍해진 이유가 이것이다.’(‘임원경제지’ ‘전공지 서문’) 

 

인용문과 출처까지 세밀하게 적시한 '임원경제지' 본문.

 

백성의 백과사전, 임원경제지

 

그래서 ‘임원경제지’에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국을 끓이는 방법과 사람이 씹어 삼킬 수 있는 떡 만드는 법들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과거와 현재, 나라 안과 밖이 다 다르므로, 오로지 조선에 필요하고 시행 가능한 정보만을 담았다고 했다.(‘임원경제지’ ‘예언’) 밭고랑 간격과 깊이는 어찌해야 하며 화훼를 심을 때는 어찌해야 하며 도배는 어떤 종이와 기름과 풀과 아교를 써야 하며, 금과 은, 구리와 철 따위 금속을 어떻게 채취하고 가공하고 활용해야 하는지 적었고, 물건을 사고팔 때 가까운 장터는 몇 리쯤 되는지 거리표까지 삽입해 설명해 놓았다. 임원경제연구소 소장 정명현은 이렇게 평했다. ‘어떻게 전국 자료를 이렇게 자세히 조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정명현 등, 앞 책, p1459)

 

그 모든 분야에 서유구는 중국과 조선, 일본 책까지 인용해 가장 실용적인 정보를 골라서 설명해놓았다. 현대 논문처럼, 출처는 명쾌하게 밝혀놓았다. 이 가운데 요리법을 다룬 ‘정조지’는 최근 풍석문화재단 음식연구소에서 그 몇 메뉴를 그대로 재현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허망했던 백과사전의 종착지

 

그런데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18년 시골 생활 후 관직에 복귀했으나 세상은 소란했다. 훗날 그가 스스로 쓴 묘지명 ‘오비거사생광자표(五費居士生壙自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근심스러운 처지에 근심을 잊기 위해 온갖 서적을 널리 수집해 임원경제지를 편찬했으니 이 일에 골몰한 것이 앞뒤로 30여년이다. 그런데 인쇄를 하자니 재력이 없고 장독대 덮개로나 쓰기에는 충분하니 이 또한 낭비로다.’(김대중, 앞 논문, p165, 재인용)

 

결국 ‘임원경제지'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나라가 망하고 암울한 식민 시대, 1930년대에 조선 지식인계에 국학(國學) 부흥 운동이 벌어지면서 다른 실학자들 저서와 함께 전질 필사되며 햇빛을 보았다. 그나마 그때도 각광받은 인물은 다산 정약용이었다.

 

이제 21세기가 20년이 흐른 지금에야 서유구와 임원경제지와 그가 품었던 실용주의 철학이 눈길을 끈다. 게다가 그가 관찰한 ‘가난한 나라 되는 법’은 지금도 유효하지 않은가.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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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만든 국과 종이로 만든 떡을 누가 먹으랴!”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①

 

내 인생은 낭비” 관찰사 서유구

 

올해 복원된 전라감영 동헌 앞에는 낯선 돌이 두 개 서 있다. 하나는 가석(嘉石)이고 하나는 폐석(肺石)이다. 가석은 경범죄를 저지른 자를 그 위에 앉혀서 죄를 뉘우치게 하는 돌이다. 폐석은 억울한 백성이 그 옆에 서 있으면 관리들이 자초지종을 물어 사연을 풀어주는 돌이다. 행정과 사법을 동시에 담당했던 조선시대 지방관 통치 율법을 상징한다.

 

19세기 초 이 전라감영에서 만 19개월 근무했던 행정가가 있다. 1833년 4월 부임했을 때 나이는 만 69세, 고희(古稀)였다. 이 늙은 관찰사는 임기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이름하여 ‘완영일록(完營日錄)’이다. 그가 결재한 모든 공문서가 첨부돼 있고, 사건과 사고, 민간 풍습과 가뭄 때 고구마를 들여와 시범 재배를 한 사실까지 다 기록돼 있다. 이 사내는 또 한자로 250만 자가 넘는 백과사전을 혼자 지었다. 그 속에는 화훼와 음악, 회화와 건축, 기상과 천문과 의학과 문화예술과 가정경제까지 다 들어 있다. 책 이름은 ‘임원경제지’다.

 

이만하면 웬만한 업은 다 성취했을 법한데, 그가 스스로 남긴 묘지명에는 이리 적혀 있다. ‘내 인생은 낭비투성이였다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더 남겼다. ‘흙으로 만든 국과 종이로 만든 떡은 만들지 않겠다네.’

 

자, 이 사내 이름은 서유구(徐有榘)다. ‘榘(구)’는 모날 구자다. 직선과 네모를 뜻한다. 친구들끼리 부르는 이름 자(字)는 ‘준평(準平)’, 목수들이 쓰는 수평계 이름이다.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 선비 치고는 작법이 범상치 않다. 민란(民亂)이 급증하던 19세기 초 흙국과 종이떡을 거부하고 낭비투성이 삶을 살았다는 서유구 이야기. 

전라감영이 있는 전북 전주 풍남문. 1833년 고희(古稀) 나이에 전라관찰사로 부임한 서유구는 19개월 임기 동안 꼬박 ‘완영일록’이라는 업무일지를 남겼다. 그는 ‘비실용적인 학문은 못 먹는 흙국과 종이떡과 같다’고 했다. 대신 자신은 세상을 위해 실용적인 학문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과거 부정과 왕세손 이정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그 아들 정(琔)을 왕세손으로 삼았다. 정은 아비 사도세자 대신 그 맏형인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했다. 자그마치 24년 뒤인 1775년 11월 30일 영조는 왕세손을 왕좌에 앉히고 본인은 대리청정하는 위치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조정 대신들은 물론 왕세손까지 극구 반대했으나 영조는 ‘결재 거부’ ‘단식투쟁’을 내걸고 관철했다. 대리청정을 못하게 하면 아예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우기기도 했다.(1751년 5월 13일, 1775년 11월 30일, 12월 7일, 12월 8일 ‘영조실록’)

 

사흘 뒤 대리청정 축하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합격자를 고르고 나니 최수원, 조영의, 조우규 세 응시자 답안지가 똑같았다. 과거 문제지는 물론 모범 답안지까지 유출된 것이다. 왕좌에 앉은 왕세손은 이들 합격을 취소시켰다. 훗날 왕위에 오르며 왕세손은 이름을 산(祘)으로 개명했다. 그가 조선 22대 국왕 정조다. 왕이 됐어도 과거장 꼬락서니는 변함없었다. 청탁과 남의 글을 베끼는 차술(借述)과, 책을 들고 들어가는 협책(挾冊) 행위가 곳곳에서 적발됐다. 처음에 “일단은 참겠다”며 넘어갔던 정조는 나중에는 “‘부정행위 처벌' 명령을 궐문에 걸라”고 분기탱천하기도 했다.(1782년 1월 10일, 1794년 1월 6일 ‘정조실록’)

 

친위대 초계문신과 서유구

 

과거가 난장판이니 또 다른 인재 충원 루트가 필요했다. 그게 초계문신(抄啓文臣: 인재를 골라서 왕에게 아뢰어 등용한 문신)이다. 즉위 후 6개월 뒤 정조는 창덕궁에 왕립도서관 규장각을 세웠다. 규장각 간부인 각신(閣臣) 6명은 공무 중 면책특권을 비롯한 많은 특권을 누렸다. 한성 안팎으로 말을 타고 다니는 ‘어마어마한’ 특권도 있었다.(1776년 9월 25일 ‘정조실록’) 그리고 5년 뒤 37세 이하 과거 합격생 가운데 초계문신을 뽑았다. 정조는 이들을 규장각에 근무시키고 직접 가르쳤다. 왕이 관료를 직접 양성한 것이다. 1781년 16명을 비롯해 정조가 죽은 1800년까지 초계문신은 모두 139명이 선발됐다. 1789년 15명에는 정약용이, 1790년 19명에는 문제적 인물 서유구가 들어 있었다.

 

교육은 혹독해서 초계문신들은 ‘동몽(童蒙·어린아이)같이 맞으며 생도(生徒·학생)같이 단속 당했다.’(정약용, 경세유포 권1 춘관예조 3) 활쏘기 또한 교양 필수였는데, 정약용도 못 쏘았고 서유구도 못 쏘았다. 서유구는 특히나 젬병이었다. 1791년 10월 2일 초계문신들이 활쏘기 훈련을 받았는데 대부분 활을 쏘지 못했다. 실망한 정조는 시험을 중단시키고 병영에서 훈련을 명했다. 많은 이가 재시험을 통과했으나 서유구는 ‘구제불능 최하급이라(下愚不移·하우불이) 깎아내지 못할 썩은 나무 같았다(朽木不可雕也·후목불가조야).’ 고문관 서유구는 또 숙직을 하며 훈련을 해야 했다.(1791년 10월 27일 ‘승정원일기')

 

그런데 공부는 뛰어났다. 1789년과 1790년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한 시경 강의 후 정조가 출제한 시험 문제 590개 가운데 후배 서유구는 181개, 선배 정약용 답안은 117개가 채택됐다.(정명현 등 ‘임원경제지,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12, p149 이하)

 

똑같이 전도유망한 초계문신 선후배 정약용과 서유구는 이후 인생도 많이 닮았다. 활쏘기를 잘 못한 것도 닮았고(정약용은 아예 자기 문집 ‘다산시문집’에 ‘북영벌사기(北營罰射記: 벌받은 활쏘기 훈련기)’를 남길 정도였다), 학문에 뛰어난 것도 닮았다. 그런데 우리는 실학, 하면 다산을 떠올리고 서유구는 잘 모른다. 이 사연은 뒤에 하기로 하자. 

복원된 전라감영. 동헌 앞마당 통로 좌우에는 사법행정과 관련된 돌 두 개가 서 있다.

 

5020권짜리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겨울 청나라로 떠난 연행사 일행이 만 석 달 만에 돌아왔다. 1777년 2월 24일 창덕궁에 입궐한 일행은 이렇게 보고했다.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020권이 지금 막 실려 오고 있나이다.”(1777년 2월 24일 ‘정조실록’) 고금도서집성은 청나라 최대이자 지금도 최대인 중국 백과사전이다. 가격은 은화 2150냥이었다.

 

선대인 영조 시대는 학문의 암흑기였다. 전주 이씨 왕실 계보를 왜곡한 청나라 책이 수입되자 영조는 일체의 중국 서적 수입을 금지하고 책 판매상인 책쾌(冊儈)도 한동안 금지했다. 정조가 즉위하고, 학문을 통해 왕권 강화를 꿈꿨던 정조는 청나라 학술 서적을 직접 명했다.

 

도서집성 상자를 열어보니 종이가 저급한지라 죄다 뜯어내고 제본을 다시 했더니 두 권 늘어난 5022권이 되었다. 그 책마다 제목 ‘도서집성’ 네 자를 모두 지사(知事) 조윤형이 썼다. 함께 근무하던 이덕무가 “최소한 도서집성 네 자는 왕희지보다 낫다”고 놀릴 정도였다.(노대환, ’18세기 동아시아의 백과전서 고금도서집성', 2015)

 

정조가 원했던 책은 새로운 백과사전인 ‘사고전서(四庫全書)’였는데 아직 미완성 상태였다. 그래서 연행사 부사 서호수가 청 학계를 잘 아는 유금을 통해 고금도서집성을 대신 구입했다.(김윤조, ’18세기 후반 한중 문인 교유와 이조원', 한국학논집 51집, 계명대한국학연구원, 2013) 

 

전라감영에 복원된 ‘가석(嘉石)’. 경범죄를 저지른 백성을 앉혀놓고 죄를 반성하게 하는 기능을 했다. 지방 감영과 한성 형조에 설치돼 있었다.

 

핏줄에 흐르는 실용주의

 

그 서호수의 아들이 서유구다. 서호수는 규장각 각신이었고 동생이자 서유구 삼촌 서형수는 초계문신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서명응은 1776년 규장각이 설립되고 첫 제학(提學)이었다. 서명응은 농서 ‘본사(本史)’를 손자와 함께 지었는데, 그는 손자에게 이리 말했다. “자고로 어렵고 난삽한 말을 써서 읽는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린 듯이 한다면 후세에 글 못 읽는 사람들이 이 책을 장독 뚜껑으로 쓰게 될까 두렵다.” 서유구는 기쁘게 깨닫고 책을 완성했다.(서유구, ‘풍석고협집’ 6 잡저 ‘발본사·跋本史’)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독자로 하여금 두 번 세 번 읽게 해야 명문(名文) 취급받던 시대에, 이 서씨 3대는 그렇게도 실용적이었다. 서유구는 중국 고대 실용지식을 담은 ‘주례 고공기’를 삼촌으로부터 배우다가 “대장부 문장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책상을 치며 소리지르는 아이였다.(서유구, 앞 책 ‘서형수 서문’)

 

모날 구 자를 아들 이름에 넣은 사람이 서호수였고, 그 두 사람에게 실용주의적 시각을 내려준 사람은 고증학의 대가인 할아버지 서명응이었다. 피는 쉽게 속이지 못한다.

 

민란, 흙국과 종이떡

 

자, 세월은 바야흐로 민란의 시대로 흐르고 있었다. 국왕을 보필하며 학문과 정치를 찬란하게 빛낼 임무를 띤 초계문신 출신들은 그 민란의 시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대표적인 초계문신 김조순은 정조 본인이 순조의 장인으로 낙점했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했던 김상헌의 후손 김조순은 이후 60년 넘도록 이어진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국가를 자기 재산 내지는 금고로 생각했던 세도가들은 금고를 털어내듯 가렴주구와 학정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 나라는 빈털터리였다. 예정대로 민란(民亂)이 폭발했다.

 

1800년 정조가 죽었다. 기둥이 쓰러진 초계문신 출신 관료들은 방황했다. 1801년 천주교를 믿는다는 빌미로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당했다. 서유구는 삼촌 서형수가 동기 김달순의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정계에서 축출당하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806년이었다. 그가 물러나 초야에 묻혀 산 세월이 또한 18년이었다.

 

정약용도, 서유구도 그 민란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다. 정약용은 곧 조정에 복귀해 세상을 바꾸겠노라며 1표2서(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지었다. 서유구는 달랐다. 민란에 대한 답은 굶주림에 있었다. 막강 세도정치를 허물어뜨리고 세상을 바꾸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그 18년 세월을 농사짓고 땔감을 주워 등을 덥히며 백성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한때 경서를 공부했으나 옛 사람들이 이미 모두 말해버렸으니, 내가 거기다 두 번 말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또 경세학을 공부했으나 처사들이 이리저리 한 말은 못 먹는 흙국이고 종이떡(土羹紙餠·토갱지병)’이었다. 그런 노력이 또한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서유구, ‘행포지서·杏蒲志序’, 1825)

 

좋은 말과 아름다운 이론이 난무하지만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기는 먹을 수 있는 국과 떡, 실용적 학문으로 백성을 배부르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그 떡과 국 맛을 보기로 하자.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0-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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