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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의 중심, 해협의 역사] [홍해의 암묵적합의가 깨졌다]

뚝섬 2023. 12. 19. 06:40

[국제분쟁의 중심, 해협의 역사]

[홍해의 암묵적 합의가 깨졌다] 

[운하 사고로 본 수에즈 152년史]

 

 

 

국제분쟁의 중심, 해협의 역사 

 

두 육지 사이의 좁은 바다를 뜻하는 해협(海峽)은 요충 중에서도 요충이다. 육지에서 포격해 배가 지나갈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좁은 바닷길은 많은 나라의 목줄을 쥐고 있다. 해협 중에서도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바로 옆의 다르다넬스 해협은 늘 유럽의 중대 관심사였다.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튀르크에 멸망하며 이 두 해협이 모두 튀르키예 수중에 떨어졌다. 기원전 12세기 트로이도 여기에 있었고, 기원전 5세기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이 도주할 때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에 나설 때도 이 해협을 건넜다.

 

▶19세기 러시아 흑해 함대가 지중해에 진출하기 위해 손에 넣어야 했던 곳도 당연히 이곳이었다. 크림전쟁은 그런 러시아를 막으려 영국·프랑스가 이 지역에 원정한 전쟁이었다. 1차 대전 때도 격전지였다. 영국이 독일의 배후를 치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 앞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을 펼쳤다가 오스만 제국군에 패했다. 지난해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해협의 전략적 가치를 새삼 입증했다. 튀르키예가 모든 군함의 두 해협 통과를 금지하자 러시아가 흑해 함대를 보강할 길을 잃고 말았다.

 

▶바다 사이 좁은 육지 길인 ‘지협’의 전략적 가치도 못지않다. 북미와 남미 대륙을 잇는 지협에 자리 잡은 파나마는 자신의 지정학적 가치를 활용해 콜롬비아에서 독립했다. 파나마에 운하 건설을 추진한 미국이 독립을 도왔다. 해협과 지협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전혀 다르지 않다. 미국은 파나마에 운하 관할권을 돌려주면서 평시, 전시를 막론하고 개방돼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아시아에도 중요한 해협이 있다. 전 세계 해상 물동량의 20%가 통과하는 믈라카 해협과 중국과 대만 사이의 대만 해협이다. 국제사회는 믈라카 해협을 특정국의 영해가 아닌 국제 수역으로 관리하며 해적 퇴치에도 함께 나서고 있다. 대만 해협은 언제 중국의 공격으로 미사일이 날아다닐지 모른다.

 

최근 가장 걱정인 해협은 홍해 남쪽 끝에 있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이다. 이곳을 지나면 수에즈 운하다. 예멘의 이슬람 반군 ‘후티’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에 대한 보복이라며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지나는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다. 전 세계 해상 컨테이너 30%가 오가는 이 해협은 워낙 좁아 미사일 공격에 취약하다. 가자지구 전쟁으로 이란이 자국 앞바다인 호르무즈 해협도 위협하고 있다. 이곳이 막히면 세계 유가가 폭등한다. 모두 이성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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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의 암묵적 합의가 깨졌다

 

[新중동천일야화]

 

경쟁은 하되, 충돌은 없다?

 

 

홍해는 아름다운 바다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2200㎞에 이르는 바닷길 곳곳은 산호와 망그로브 및 1000종이 넘는 각종 해양 식생을 자랑한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바다 원시림이다.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어종의 14%가 홍해에 서식한다. 다이버들이 열광하는 이유다.

 

홍해는 번영의 바다다. 아라비아반도 동쪽 걸프 해역(페르시아만)이 석유로 흥했다면, 반대편 홍해는 교역로의 번영을 구가해 왔다. 인도양과 지중해의 물길을 이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한다. 세계 해상 물류의 12%, 아시아-유럽 교역 물량의 40%가 홍해를 지난다. 석유 시대 이후를 준비하는 사우디는 홍해에 공을 들이고 있다. 5000억달러 규모의 네옴 신도시 구상은 사우디 미래의 사활을 건 프로젝트다. 왕세자는 이란과 마주해 골치 아픈 동부에서 서부 홍해의 네옴으로 미래 성장의 중심을 옮기고자 한다. 수단항만 개발에 30억달러, 90여 섬 관광지 개발에 150억달러를 투자하는 등 사우디가 주도하는 홍해 프로젝트는 인근 연안 국가들의 부를 확대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 국가들의 국내총생산은 현 1조8000억달러에서 2050년 6조1000억달러로 3배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의 역내 위상도 올라갈 것이다.

 

홍해는 경쟁의 바다이기도 하다. 국제사회의 홍해 항만 및 군사 기지 교두보 경쟁이 치열하다. 11국이 최소 12곳 이상 해군 주둔 시설을 운영하는 중이다. 사우디는 제다의 킹 파이잘 해군기지를, 이집트는 홍해 유역 최대 규모 해군기지인 베레니케항을 자랑한다. 역외 국가들도 발을 들이밀고 있다. UAE는 이집트의 아인 소크나에 이미 대규모 투자를 해왔고, 에리트리아에도 해·공군 기지를 설치한 바 있다. 튀르키예도 눈에 띈다. 2018년 과거 오토만 제국 영토였던 수단의 수아킨섬을 99년 동안 해군 및 군사 시설로 사용할 계획임을 발표하자 사우디와 이집트가 아연 긴장하기도 했다. 압권은 홍해 입구에 위치한 지부티다.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의 기지는 물론 중국 최초 해외 기지까지 주둔 중이다. 홍해의 관문 바브알만데브 해협의 주도권을 다툴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이 국가들 간 암묵적 합의는 있다. 경쟁은 하지만 충돌은 피한다는 것이다. 홍해가 국제 교역을 지탱하는 혈맥이라는 공동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함께 해적 퇴치 작전을 벌이는 등 협력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번영의 바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 무대인 홍해가 요즘 심상찮다. 가자 사태 이후다. 예멘의 후티 반군이 홍해를 지나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선박을 공격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티의 드론 공격이 보고되고 있다. 지난 15일 2건 선박 피격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이전에도 후티 반군의 해상 공격과 선박 나포 사례도 있었지만 간헐적이었고 명분도 약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후티 반군은 명분을 잡아챘다. 팔레스타인을 핍박하는 이스라엘과 미국 선박을 응징하겠노라 선포함으로써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반칙이자 불법이다. 그러나 현지 분위기는 좀 다르다. 중동의 저잣거리 정서는 반이스라엘 감정이 우세하다.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반기는 이가 다수다. 후티 지도자들은 차제에 레바논의 실질 권력인 헤즈볼라 정도의 인지도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을까? 한편 후티 반군에게 재정과 무기는 물론, 전쟁 교리까지 제공하는 이란은 속으로 웃고 있을 것이다. 10월 초 하마스의 공격이 없었으면 사우디와 이스라엘 수교가 곧 성사될 참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페르시아만 진입을 의미했다. 턱밑까지 이스라엘군이 밀고 들어올 수 있다는 부담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하마스의 도발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수교 교섭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피해가 늘면서 역내 친이란 무장 집단을 통해 이스라엘을 공격할 명분을 얻었다. 이란은 북쪽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의 이맘 후세인 여단, 가자지구의 하마스, 그리고 남쪽 예멘의 후티 등을 통해 언제든 이스라엘을 칠 수 있음을 드러내는 중이다. 전선을 홍해로 밀어낸 셈이다. 한 때 이란 호르무즈를 세계가 주목했고, 당시는 이란이 수세였지만 이제는 홍해가 주목받으며 이란이 공세적 위치에 있다.

 

세계는 긴장하고 있다. 미군 함정도 피격 대상이 되다 보니 언제 어떻게 상황이 증폭될지 모른다. 이스라엘은 공격을 당하면 가만히 있는 나라가 아니다. 후티의 공격을 상찬하는 역내 극단주의자들은 확전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공급망과 물류에 타격이 크다. 홍해를 지나는 상선들은 긴장하고 있다. 전쟁 위험으로 인한 보험료가 급등하다 보니 선박당 수만 달러 추가 보험 비용이 들고 있다. 안전을 위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으로 우회하는 선박도 적지 않다. 세계적 해운 회사 머스크와 하팍로이드는 자사 선박의 홍해 항행을 중단시켰다. 하마스와 후티 등 비국가 행위자 도발의 연쇄 효과로 전 세계 교역까지 흔들리는 격이다.

 

후티 반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게 급선무이지만 묘안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사태로 정신없는 이 상황에 국제사회가 대규모 후티 진압 작전을 전개하기는 어렵다. 일단 미국이 주도하는 홍해 안전 항행 태스크포스 등 위력을 통한 방어적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가 간 공조도 절실하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중국 측에 태스크포스 동참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가자 사태가 해결되어야 후티의 무차별 공격 명분도 약화된다. 팔레스타인의 피해가 늘어간다면 후티는 물론, 역내 친이란 무장 집단은 더 격렬하게 공세에 나설 것이다. 홍해의 안전 항행은 가자지구에 달려 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 조선일보(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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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 사고로 본 수에즈 152년史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세계의 급소’ 수에즈운하… 이집트, 중동戰때 화물선 띄워 6년 봉쇄

 

1869년 개통한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최단 항로다.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든지 아니면 수에즈 지협(地峽)의 육로를 통과해야 했다. 예컨대 런던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선박으로 이동한 다음 이곳에서 낙타 수천 마리로 승객과 화물, 물과 석탄 등을 홍해 연안까지 옮기고 이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봄베이로 이동하는 식이다. 그나마 철도를 부설한 후 육로 운송이 훨씬 개선됐다. 영국은 이 방식 그대로 유지하면 경제·군사적 우위를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최단 항로가 열렸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다. 이집트인 12만명 이상이 희생됐고, 강제 동원된 농민들의 봉기가 계속됐으며, 엄청난 공사비로 이집트 정부는 파산 직전에 몰렸다. 프랑스는 운하가 열리면 지중해의 마르세유가 세계 경제의 허브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증기선 발달과 운하 개통의 시너지로 세계 해상 패권을 장악한 영국이었다. 1869년 11월 17일 사이드 항구에서 열린 수에즈 운하 개통식을 그린 작자 미상의 그림.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때 프랑스가 이집트에 접근해 운하 건설을 제안했다. 1854년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친분이 있던 태수 사이드(Said Pasha)로부터 운하 개통 후 순이익의 15%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운하 건설 허가권과 99년간의 조차권을 획득했다. 곧 자본금 2억프랑의 수에즈운하회사를 설립하고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회사가 발행한 주식 40만 주 가운데 17만7642주는 사이드, 20만7000주는 프랑스인 투자자들, 나머지는 명목상 이집트의 상위 군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차지했다.

 

1859년 4월 착공한 공사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네코 운하 공사 때와 비슷하게 12만 명 이상의 이집트인이 희생되었다. 콜레라가 창궐하여 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이 때문에 강제 동원된 농민들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엄청난 공사비는 이집트 정부를 거의 파산 상태로 몰아넣었다. 원래 계획했던 시간의 두 배인 11년의 공사 끝에 1869년에 가서야 지중해 측 포트사이드(Port Said, 태수 사이드의 이름을 따왔다)와 홍해 측 수에즈 사이 162.5㎞를 수로로 연결했다. 개통 당시에는 하상 부분의 폭이 22미터, 수면 부분의 폭은 60~90미터, 깊이 6미터에 불과했고, 운하 통과 시간은 49시간 걸렸다.

 

프랑스 엔지니어, 이집트의 자금과 인력을 들여 건설했지만 완공 후 운하로 인한 이익은 영국에 돌아갔다. 수에즈운하가 열리면 지중해에 위치한 마르세유가 세계 경제의 허브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 개통 첫해부터 통과 선박 60%가 영국 선박이었다. 차이는 더 벌어져 20년 후 영국 선박이 75%, 프랑스는 8%에 불과했다. 런던~봄베이 항로는 5300㎞나 줄었다.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범선 항해는 석 달이 걸리지만 운하를 이용하는 증기선은 단 3주 만에 갈 수 있었다. 증기선의 발전과 운하 개통의 시너지로 영국이 세계의 해상 패권을 잡았다.

 

수에즈 운하

 

영국은 개통 6년 만에 사실상 운하를 지배할 기회를 얻었다. 1875년, 운하회사 대주주인 태수 이스마일(Isma’il Pasha)이 이집트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보유 주식 17만6602주를 내놓았는데, 이는 전체 주식의 44%에 해당했다.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르고 엄청난 피해를 본 프랑스로서는 이 주식을 사들일 여유가 없었다. 영국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식 매집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유대인 은행가 라이어널 로스차일드에게 397만6582파운드를 빌려 주식을 구매했다. 엄청난 거액을 빌릴 때 담보가 무엇이냐고 묻자 ‘영국 정부요’ 하고 답했다는 고사가 유명하지만, 과연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명확하다. 오히려 로스차일드가 총리에게 먼저 주식 매수 관련 정보를 제공했고, 대출액의 2.5%에 달하는 커미션에다가 연 5% 이자를 받아서 정말로 짭짤한 이익을 챙겼다. 아무런 문서나 담보 없이 두 사람 간 신사협정으로만 이루어졌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많은 거래여서 후일 정치적 비판에 직면했지만, 그런데도 이 파격적 거래 덕분에 영국은 운하의 운영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영국이 더욱 확고하게 운하를 지배하게 된 계기는 1882년 이집트에서 일어난 쿠데타와 그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사태였다. 영국은 합법적 질서를 회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출병해서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쉽게 진압에 성공했다. 이후 운하 지역 정세가 안정을 찾은 뒤에도 영국 점령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영국은 매년 자국군의 점령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결국 20세기 들어서도 비공식적으로 이집트를 지배했다. 1888년 수에즈운하 국제협약을 통해 운하는 모든 국가들에 열려있는 국제 수로라고 선언했지만,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선박의 통과를 거부했다.

 

영국의 지배는 1952년에 종식되었다. 이해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1956년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그대로 두면 중동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유조선을 이집트가 통제해서 경제가 마비될 우려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함께 군사작전을 펴서 ‘평화유지군’을 상륙시켜 운하의 북부 지대를 점령했다.

 

말레이시아를 출발해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가던 파나마 선적 컨테이너선‘에버기븐’이 지난달 23일 수에즈 운하에서 좌초한 모습. 일본 회사가 소유하고 대만 해운사가 운영하던 길이 399m, 폭 58m의 거대한 배가 대각선으로 수로를 가로막으며 좌초하면서, 물류 지연으로 천문학적 액수의 피해가 발생했다. 지난달 29일 촬영된 위성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그러나 세상은 1882년과는 달라져 있었다. 이집트는 원유 수송을 막았고, 소련이 이집트 편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헝가리에서 소비에트 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소련군 탱크가 부다페스트로 진입하던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 시점에 재선에 성공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칫 세계적인 위기가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몰래 공모하여 중동 지역에서 사고를 쳤다는 식으로 파악했다. ‘극대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앤서니 이든 영국 수상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경제적 압박을 가해서 영국군을 철수시켰다. 프랑스는 격분했으나 그렇다고 혼자서 버틸 수는 없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 글로벌 게임을 주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군의 철수 이후 나세르는 운하 통제권을 다시 장악했고, 범아랍주의(Pan-Arabism) 운동의 지도자로 각광받았다. 운하 입구에 있던 레셉스의 동상은 흥분한 이집트 군중이 파괴했다. 그 이후에도 유사한 사태가 재발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갈등이 다시 폭발한 1967년, 이집트는 15척의 화물선(‘yellow fleet’)을 운하에 세워 두어 통행을 막았다. 운하 불통 사태는 1973년에 가서야 풀렸다.

 

수에즈 지역은 역사의 ‘급소’라 할 수 있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길목인 이곳은 고대 이집트와 페니키아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늘 주요 세력들이 부딪치는 지점이다. 하루 50척의 거선(巨船)들이 오가며 세계 상품 교역량의 12%를 책임지는 수에즈운하는 여전히 세계의 핵심 요충지다. 평소 잘 느끼지 못했지만 배 한 척의 사고로 통행이 막히자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지점인지 통감하고 있다.

 

[수에즈 운하 원조는 파라오 때의 네코 운하]

 

수에즈운하의 원조는 고대 이집트의 네코 운하다. 파라오 네코 2세(재위 기원전 610-595)는 이집트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계획했다. 다만 이 운하는 두 바다를 직접 연결하는 게 아니라 홍해와 나일강의 한 지류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수로의 길이는 뱃길로 4일 걸리는 거리이고, 폭은 삼단 노선 2척이 나란히 노를 저어 항해할 정도로 파냈다. 수로의 물은 나일강에서 수로로 흘러든다. 물길은 부바스티스 시의 약간 남쪽에서 시작하여 파투모스 옆을 지나 홍해로 흘러나간다... 네코 왕 치세에 이집트인 12만명이 수로 공사를 하다가 사망했다. 그런데 네코는 공사 중에 다음과 같은 신탁의 제지를 받고 작업을 중단했다. 즉 그가 후대의 바르바로이(‘이방인’)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네코는 수로 작업을 중단했다.”(헤로도토스)

 

네코 2세는 기껏 외국인에게만 좋은 일을 한다는 신탁을 받고 운하 건설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후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가 이 운하를 완공했다. 그렇지만 토사가 쌓이거나 나일강으로 바닷물이 밀려드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물길이 자주 막혔다. 기원전 3세기 초, 알렉산더 대왕 사후 권력을 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 운하 바닥을 준설하고 확장했으나 이후 다시 물길이 막혔다. 로마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서기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이처럼 뚫렸다 막혔다를 반복하다가 어느 시대 이후엔가 토사가 쌓여 완전히 폐쇄되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오늘날의 운하가 개통되었다.

 

-주경철 교수, 조선일보(2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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