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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공사관] [광화문 떠나는 미국 대사관]

뚝섬 2022. 8. 9. 07:44

[대한제국공사관] 

[광화문 떠나는 미국 대사관]

 

 

 

대한제국공사관

 

미국 워싱턴 로건서클,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붉은색 건물이 있다. 옛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이다. 이 건물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에서 열강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던 1891년. 고종은 특명을 내려 미 국무부 차관의 소유였던 이 건물을 2만5000달러를 들여 매입했다. 1910년 강제병합 직후 일제는 이 건물을 5달러에 빼앗았다. 되찾아오기까지는 102년이 걸렸다. 2012년에야 민관이 힘을 합쳐 이 건물을 다시 사들였고, 6년 뒤 원형대로 복원해서 개관했다.

▷1888년 1월 박정양 주미 공사는 백악관서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국서를 전달했다. 이때 박 공사는 청나라가 요구했던 영약삼단((另,영)約三端·세 가지 별도 약정이라는 뜻)을 어기고 청나라 공사를 배석시키지 않았다. 자주독립 국가로서 당당히 외교권을 행사한 것이다. 박 공사는 미행일기(美行日記)에서 “미국은 민주국으로 예절이 퍽 간편하다”며 세 번의 절 대신 악수로 인사를 나눴던 미 대통령과의 만남을 기록했다.

▷자주외교의 길을 모색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대한제국공사관 6곳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함께 일제히 폐쇄됐다. 주미 공사관을 제외하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청) 일본 등 해외에 설치됐던 공사관들은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05년 5월 런던의 주영 공사관에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관이었던 이한응 열사가 일제의 주권 침탈에 항거하며 31세 나이로 자결했다. 이 사실이 고국에 보도돼 항일운동에 불을 댕겼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자리에는 임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905년 12월 주청 공사관의 마지막 보고는 “한국의 일체 외교 교섭 사무는 일본 외무성이 담당한다고 한다”며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 훈시를 내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베이징 톈안먼 동쪽 둥자오민샹(東交民巷)에 있던 주청 공사관 건물은 1915년 철거됐다. 설치 기간이 가장 오랜 주일 공사관 터는 옛 주소와 과거 사진이 남아 있지만 그 위치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현재 우리나라 재외공관은 대사관 116곳을 포함해 모두 167곳이다. 청나라 허락을 받아 공사를 파견하고 일제에 의해 재외공관이 한순간에 폐쇄됐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대한제국공사관의 실태를 조사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널리 알리고 근대화를 모색하는 한편으로 외교활동의 거점이 됐던 곳”이라며 “기초 고증연구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망국의 위기에도 주권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역사를 기억 속에 남겨야 한다는 제안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동아일보(22-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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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떠나는 미국 대사관

 

주한미국대사관이 1968년부터 50년 넘게 사용해온 현재의 광화문 청사를 53년 만에 떠난다. 서울 광화문에서 50년 넘게 자리하고 있던 주한 미국대사관이 서울 용산구 용산미군기지 자리로 이전하는 계획을 확정했다고 서울시가 24일 밝혔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에 옛 의정부터 등을 복원하고, 용산을 거쳐 한강까지 연결하는 ‘국가상징거리'를 조성하는 등 광화문광장 일대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는 계획을 공개했다. 2021.06.24./뉴시스

 

을미사변 이후 암살 공포에 시달렸던 고종은 어떻게든 궁궐을 탈출하고 싶었다. 피신처로 미국 공사관을 택했다. 궐 밖 무사들이 경복궁 춘생문을 넘어가 고종을 파천(播遷)시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러시아(당시 아라사) 공사관으로 가게 됐다. 아관파천이다. 만약 미국 공사관 피신이 성공했다면 역사에 아관파천이 아니라 미관파천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 역사는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때 미국 공사관이 있던 자리가 지금 서울 정동 미 대사 관저이다.

 

▶광복 후 한·미가 정식 국교를 맺은 1949년, 미국 대사관은 현재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이 들어선 반도호텔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1968년 지금의 광화문 대사관으로 이전했다. 미 대사관의 광화문 이전 배경엔 한국의 눈부신 성장이 있었다. 한국에 대한 무상 원조를 담당하던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가 한국 정부에서 받은 광화문 땅에 1961년 쌍둥이 건물을 지어 하나씩 나눠 가졌다. 이후 USOM의 무상 원조 관련 업무는 줄어들었다. 반면 대사관이 처리해야 할 양국 정치·경제·문화·인적 교류의 비중이 커지면서 미 대사관이 USOM 건물을 차지하고 들어섰다.

 

▶세계 모든 강대국의 대사관은 첩보 활동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독일 슈피겔이 몇 해 전 메르켈 총리의 휴대전화를 미국이 10년간 도청했다고 폭로했다. 도청 아지트로 베를린 주재 미 대사관을 지목했다. 광화문 미 대사관도 예외가 아니다. 로비스트 박동선의 미 의회 로비로 시끄럽던 1976년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이 청와대를 도청했다고 폭로했다. 뉴욕타임스는 도청 방법까지 보도했다. 미 대사관이 청와대 유리창의 떨림으로 사람 목소리를 알아내는 원거리 탐지 장치를 동원했다고 했다.

 

▶미 대사관은 세계 많은 나라에서 테러 대상이다. 그런데 혈맹이자 동맹인 한국에서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광화문 미 대사관은 높은 담장에 육중한 2중 철문과 철조망, 바리케이드로 외부와 차단돼 있다. 대학생이 사제 폭발물을 투척하고, 반미 단체가 대사관 에워싸기 집회를 벌이며, 승용차로 정문을 들이받는 사고까지 터지는 마당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 대한민국의 영욕을 모두 지켜봤던 광화문 시대를 마감하고 옛 용산 미군 기지 내 캠프 코이너 부지로 이전하는 일이 최종 확정됐다. 새 대사관은 2년 후쯤 착공할 예정이다. 정동 공사관은 대한제국의 쇠망을 지켜봤지만 광화문 대사관은 대한민국의 기적적 도약을 지켜봤다. 용산에 들어서는 새 대사관은 한반도 통일을 보았으면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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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천안문 진압 반대한 자오쯔양 전 총서기 가족에 자택 퇴거 명령. 공산당 100주년 앞둔 속 보이는 역사 지우기.

 

-팔면봉, 조선일보(2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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