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무덤의 음산함 속에서 영롱한 빛이… 무령왕의 보물을 만나다] ....

뚝섬 2021. 9. 19. 06:00

[무령왕릉 모든 유물, 최초로 한자리에 나왔다]

[백제 25대 무령왕, 일본 섬에서 태어난 '사마'… 위기의 백제 다시 일으켜]

[고마나루 언덕에 잠든 백제 부활의 꿈]

 

 

 

무령왕릉 모든 유물, 최초로 한자리에 나왔다

 

무령왕릉 50주년 특별전 개막… 국립공주박물관 현장을 가다 

50년 전 무령왕릉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지건길(왼쪽)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복원 작업을 마친 왕의 목관(오른쪽)과 왕비의 목관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현종 기자

 

“하이고, 저 나무판, 저….”

 

13일 충남 공주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실에서 고고학계 원로인 조유전(79)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탄식을 내뱉었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돼 보존처리를 마친 왕과 왕비의 목관(木棺)을 보고 50년 전 발굴이 엊그제 일처럼 되살아나서였다. “나무가 썩어 관 윗부분이 바닥으로 주저앉은 상태였어요. 밟으면 그만 폭삭 가루가 될 것 같아 건너가지 못하고 있는데 밖에선 (빨리 발굴을 끝내고 나오라고) 난리를 치지….” 관 맨 윗부분 부재가 의외로 단단해 살짝 밟고 간신히 건너갈 수 있었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무령왕릉 발굴 50년(1971-2021):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의 개막식에는 당시 문화재관리국의 젊은 학예연구사로 역사적인 발굴에 참여했던 조유전 전 소장과 지건길(78)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참석했다. 지 전 관장은 무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동물상인 진묘수(鎭墓獸)를 가리켰다. “마치 저게 날 꼭 껴안으며 달래줄 것처럼 보이더라고!” 귀여운 인형처럼 생긴 동물상이지만, 당시엔 처음 세상에 나오는 무덤의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무척 신비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금으로 만든 무령왕릉 왕비의 관꾸미개. /신현종 기자

 

내년 3월 6일까지 계속되는 이 특별전은 역대 최대 규모의 무령왕릉 관련 전시다. 2년 동안의 준비 끝에 공주박물관 내 전시실 두 곳을 털어 마련한 이 특별전은 1971년 발굴 이후 처음으로 무령왕릉 출토 유물 5232점 모두를 한자리에서 전시하는 자리다. 국보로 지정된 유물만 17점이다. 한수 국립공주박물관장은 “최소한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나기 전까지는 이런 전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작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반세기 전인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왕릉원(옛 송산리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도중 ‘벽돌무덤’ 하나가 발견됐다. 그것이 묘지석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한 한국 유일의 고대 왕릉이 고스란히 실체를 드러냈다. 고대사를 고쳐 쓰게 했다’는 한국 고고학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백제 무령왕릉 특별전 입구에서 전시 중인 무령왕릉 출토 은잔. 정교한 문양에 백제인의 내세관을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신현종 기자

 

전시실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는 첫 유물은 그동안 다른 유물에 비해 덜 주목을 받았던 은잔(銀盞)이었다. 공주박물관 윤지연 학예연구사는 “6세기 백제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연꽃과 신선의 세계 등 정교한 문양을 통해 가장 잘 담아낸 유물”이라고 했다. 이어 무령왕릉의 대표 유물이자 백제 문화의 정수라 할 만한 왕과 왕비의 관꾸미개·금귀걸이가 화려한 자태를 자랑했다. 우리나라 고대의 금 유물 중에서도 금 함유량 98% 이상으로 가장 순도가 높은 관꾸미개는 불꽃이 타오르거나(왕) 연꽃이 피어나는(왕비) 듯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 옆엔 달걀 한 개 무게에 육박하는 약 54g의 금귀걸이도 보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13일 충남 국립공주박물관에서 특별전 개막을 하루 앞두고 열린 언론 공개회에서 국보 왕의 금귀걸이가 전시돼 있다./연합뉴스

 

봉황과 금으로 장식된 베개와 발받침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드문 고대의 목제 예술품인데, 쉽게 훼손되는 목제품의 특징 때문에 오래 전시할 수 없어 그동안 복제품을 전시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14일부터 26일까지 베개와 발받침을 모두 진품 전시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최적의 전시 환경’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 만하다. 박물관 측은 관꾸미개, 금귀걸이, 청동거울, 진묘수 등 주요 유물은 진열장 유리를 저반사유리로 교체하고 조명과 받침대를 개선했다. 유물이 UHD(초고화질) 화면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비의 목제 베개(앞)와 발받침./신현종 기자

 

한수 관장은 “무령왕릉은 백제 고유의 예술과 기술이 드러나는 한편, 백제의 활발한 대외 교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해외 명품관’이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수입한 첨단 금속공예 기술과 도교 사상이 보이고, 목관은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으로 만들었으며, 유리구슬은 원료에 포함된 납의 산지가 태국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박물관 측은 “왕과 왕비의 장례 과정, 여러 유물의 용도 등 여전히 무령왕릉 유물은 풀리지 않는 많은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고, 이는 다음 반세기 동안 해결할 과제로 남아 있다”고 했다.

 

-공주=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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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5대 무령왕, 일본 섬에서 태어난 '사마'… 위기의 백제 다시 일으켜 

 /그래픽=안병현

 

올해는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백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 되는 해예요. 1971년 7월 충남 공주의 무령왕릉이 전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유물 4600여 점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한 우리나라의 고대 왕릉은 이것이 유일한데요, 무덤에 묻힌 주인공인 백제 25대 왕 무령왕(재위 501~523)은 어떤 임금이었을까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 받은 후 내리막길

백제는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 송파구)이 함락됐고, 백제 21대 왕인 개로왕(재위 455~475)은 살해당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전쟁에서 수도를 빼앗기고 임금이 잡혀 죽었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나라가 거의 멸망하는 위기를 맞았다는 얘깁니다. 마침 신라에 구원병을 얻으러 가 화를 피했던 개로왕의 아들(또는 동생) 문주는 남쪽 웅진(충남 공주)을 새 도읍으로 삼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쉽게 안정되지 못했고 귀족 세력이 왕권을 넘보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주왕(재위 475~477)은 즉위 2년 뒤 귀족의 손에 살해됐고, 그 아들 삼근왕(재위 477~ 479)도 2년 뒤 15세 나이로 갑자기 죽었는데, 정변이 일어나 살해됐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479년 왕위에 오른 문주왕의 조카 동성왕(재위 479~501)은 왕권 안정 정책을 추진해 성공을 거두는 듯했지만 말년에는 사치와 향락으로 비난받았고, 사냥하던 중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습니다. 21대부터 24대까지 네 명의 백제 임금이 연속해서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셈이죠.

배 타고 일본 가다가 섬에서 태어났어요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새 백제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 바로 무령왕이었습니다. 무령왕은 누구의 아들이었을까요? '삼국사기'엔 동성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졌어요. 이 때문에 지금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라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개로왕이 동생 곤지를 일본에 파견했는데, 곤지는 임신 중인 개로왕의 부인을 데려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에 갈 테니 형수를 내 아내로 달라"는 요청이었죠.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지만, 개로왕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이를 허락하면서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모자를 배에 태워 돌려보내라"고 했대요. 그런데 규슈 서북쪽 각라도(가당도·가카라시마)란 섬에 닿았을 때 아기가 태어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그 아이가 자라 무령왕이 됐다는 겁니다. 이 얘기는 무령왕이 일본과 뭔가 특별한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데, 실제로 무령왕릉의 목관은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백제 중흥 이끌었어요

461년생인 무령왕은 즉위 때 만 40세로 당시로선 늦은 나이에 왕이 된 셈이었어요. 하지만 여러 임금의 실패를 옆에서 면밀히 지켜보며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뒤 왕이 됐을 겁니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에 대해 "키가 8척(尺)이고 눈매가 그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고 했습니다. 당시 1척은 약 23㎝이기 때문에 무령왕의 키는 184㎝ 정도로 볼 수 있어요.

그는 동성왕을 살해한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고 비대해진 귀족 세력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 활발한 대외 교류에 나섰죠. 나라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줬고, 지방 곳곳에 제방 공사를 벌여 떠도는 백성들의 귀농을 유도했습니다. 중국 남조의 양나라, 신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펼치는 국제 네트워크를 재건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성공을 거둬 지금의 황해도 지역인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개로왕 때 뺏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쪽으로는 섬진강 일대까지 나아갔어요.

한마디로 무령왕은 백제의 '중흥(쇠퇴하던 것이 중간에 다시 일어남) 군주'라고 말할 수 있어요. 즉위 20년이 지난 521년 백제가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는 '갱위강국(更爲强國·다시 강한 나라가 됐다)'이란 자신감 넘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올해를 '백제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으로 기념하기도 합니다. 무령왕은 백제 왕으로선 오랜만에 천수를 누리고 만 62세에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중흥의 과업을 계승하고 사비(충남 부여)로 천도한 그 아들 성왕(재위 523~554)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무령왕에게 중국 관직 있었다는데…]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행적 등을 써놓은 것)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임을 확실히 알려주는 증거죠. '사마'는 무령왕(본명 부여사마)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앞 '영동대장군'이란 직함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령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양나라 황제가 백제 왕을 '천자의 제후'로 삼으며 준 형식적인 관직입니다. 이런 직함을 무덤 속에까지 기록한 것에 대해 사대주의라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대주의는 주체성 없이 큰 나라를 섬기며 존립을 유지하려는 걸 말해요. 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이 고대 세계의 국제적 관행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오늘날 외국에서 명예박사학위나 명예훈장을 받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죠.

 

-유석재 기자/기획·구성=김연주 기자, 조선일보(2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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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고마나루 언덕에 잠든 백제 부활의 꿈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와 석장리 사람들

꿈, 이상한 꿈―무령왕릉 발견기

1971년 7월 4일 국립중앙박물관 공주 분관 관장 김영배는 꿈을 꾸었다. 산에서부터 쫓아온 멧돼지 한 마리가 집 안까지 난장판을 치는 꿈을 꾸었다. 7월 5일 김영배는 송산리 고분 배수로 공사를 감독하다가 보고를 받았다. 인부가 찌른 삽에 벽돌벽이 나왔다고 했다. 벽을 죽 따라 파 들어가니 기왓장으로 가득 메운 아치형 문이 나왔다. 7월 7일 폭우가 쏟아졌다. 8일 아침 본관 관장 김원룡과 김영배는 막걸리와 수박과 북어로 위령제를 지냈다.

오후 4시 15분 아치형 문 맨 위쪽 기왓장 두 개를 빼내는 순간 찬 공기가 빠져나오면서 하얀 수증기가 뿜어 나왔다. 손전등으로 속을 비추던 김영배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꿈에 봤던 그 멧돼지가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잠시 뒤에는 기왓장 몇 장을 더 들어내던 김원룡이 놀랐다. 돼지 석상 앞 널판에 글자 열 개가 보였는데, 거기 적혀 있기를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 하지 않는가. 주인이 백제 25대 왕 무령왕이라고 밝혀놓은, 그것도 도굴 한 번 당하지 않은 왕릉을 발견한 것이다. 대한민국 고고학 사상 최대 경사(慶事)요, 낭보였다. 이후 열두 시간 동안 바보 천치가 쓴 대본에 광인(狂人)이 연출한 비극이 전개됐다.

族의 수도, 공주
 

 

기원전 18년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 온조와 비류 형제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웠다. 온조는 한수(漢水·한강) 남쪽 위례성에 십제(十濟)를 세웠다. 비류는 미추홀, 그러니까 인천에 나라를 세웠다. 미추홀은 곧 망했다. 비류가 죽고 바로 온조에 흡수됐다는 말도 있고 300년 뒤 고구려 광개토왕한테 망했다는 말도 있다. 이후 십제는 국명을 백제로 바꿨다.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위례성에 쳐들어왔다. 백제 개로왕이 전사했다. 이에 맏아들 여도(餘都)가 왕위를 이어받고 건국 후 493년 만에 남쪽 금강변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를 옮기면서 이들과 동행한 믿음이 있었으니, 바로 곰이었다.

금강변 새 수도는 고마나루라 불렀다. 고마는 곰이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고마나루는 웅진(熊津)이 되었고 훗날 고려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공주(公州)라 개칭했다. '곰주'라 발음되는 한자가 없어서 붙인 이름이 공주다.
 

 

1972년 고마나루에서 발견된 곰 석상. 곰 사당에는 모형이, 진본은 공주박물관에 있다.

 

신화에 따르면 단군은 곰의 아들이다. 고조선에서 부여, 부여에서 고구려로 물려받은 곰 토템은 백제까지 전승됐다. 고마나루에 깃든 곰 신화는 이렇다. '산중에 살던 암곰이 사내 하나를 납치해 아이 둘 낳고 살았다. 어느 날 동굴에서 탈출한 사내가 금강을 헤엄쳐 건너자 암곰이 울부짖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 고마나루에는 폭풍이 끊이지 않아 사람들은 해마다 곰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지금도 지낸다.' 시베리아와 중국 흑룡강성 일대에 퍼져 사는 에벤키족(중국명 어원커·卾溫克)도 똑같은 곰 신화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에서 인간화(人間化)된 곰 신화가 백제에서는 원형이 회복돼 있다.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 주변 옛 지명도 '곰말', 곰마을이었다. 지금도 일본인은 熊津이라고 쓰고 '구마나루'라고 읽는다. 熊本이라고 쓰고 구마모토라 읽고 熊川이라고 쓰고 구마가와라고 읽는다.

1972년 이 고마나루 땅속에서 곰 석상이 발견됐다. 공주 사람들은 그 자리에 곰사당을 세웠다. 역대 왕조에서 곰에게 제사를 지낸 웅진수신지단(熊津水神之壇)도 터가 남아 있다. 그 뒤 소나무숲은 그윽하기 이를 데 없는데, 옛 백제인들이 상륙했을 고마나루 백사장은 4대 강 사업 공주보 덕에 강물 속으로 말끔히 사라졌다.

구석기를 발굴한 석장리

그 백사장에서 전은성(63)과 김희환(76)과 김종근(79)과 박홍례(82)는 가난하게 살았다. 고마나루에서 강을 따라 25리 동쪽 석장리에서 나서 지금껏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김희환이 말했다. "하루 종일 산에서 나무 해다가 공주장에 짊어지고 가서 팔아먹고 살았다." 그러다 1964년 4월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큰일이 터졌다. 알버트 모어라는 미국인 커플이 백사장 옆 폭우로 무너진 흙더미에서 구석기를 발견한 것이다. 발견은 연세대 교수 손보기 팀의 본격적인 발굴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선사(先史)를 순식간에 제2빙하기인 55만~45만년 전, 심지어 70만년 전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로 이어졌다. 1964년 5월 1차 발굴부터 2010년 13차 발굴까지 현장을 지켜온 사람이 바로 위 네 사람이다.
 

 

석장리 구석기를 발굴한 석장리 사람들. 전은성, 김희환, 박흥례, 김종근(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475년 고구려에 패한 백제, 남쪽으로 내려와 새 도읍
'
곰族' 백제, 고마나루 정착.. 무령왕대에 화려한 부활
왕릉은 1971년 졸속 발굴
석장리 주민들 손때 묻은 구석기 유적지도 공주에

우금치에는 동학군 위령탑

 

"고맙지. 땅 긁어내서 돌 파내면 일당을 줬으니까. 3000원이었나? 짐승 털 발견하면 막걸리 한 말이랑 담배 한 갑을 준대. 그래서 찾아내면 그날은 잔치야. 나중 되니까 우리도 보는 눈이 생겨서 척 보면 범상치 않은 돌이 보이더라고." 주먹도끼, 찍개, 몸돌…. 유물들이 이들 손에서 땅 위로 튀어나오면 학자들은 분석을 했다. 해마다 봄 두 달 마을 사람이 총동원됐다. 발굴팀장 손보기는 젊은 주민들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며 지휘를 했다.

춘궁기 때 나뭇짐 지고 장터 가던 팍팍한 삶은 멈췄다. 연천 전곡리, 도라산역, 단양 금굴, 제천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전국 석기 유적지에는 '최초로 구석기를 발굴한 인부팀'인 석장리팀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김종근과 김희환은 외국 학술대회에도 교수팀과 동행했다.

구석기에 살고 있는 석장리

세월이 흘러서 석장리는 대한민국 구석기를 대표하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 앞에는 2006년 석장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박물관 옆에는 구석기를 개척한 손보기기념관이 서 있다.

그런데 석장리는 여전히 구석기다.

전은성이 말했다. "가난 탈출하게 해주고 마을 이름 빛나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 그런데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이면서 박물관에서 500m까지는 개발을 할 수가 없게 됐다. 땅값도 옆 마을 반도 안 된다." 네 사람, 이 발굴 현장 전문가들이 말했다. "단언컨대 석기는 강변에서만 나온다. 우리가 잘 안다. 우리 마을에는 석기가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좀 살았으면 좋겠다." 옛 사람 살던 땅 파놓았더니 그게 무덤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구석기라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석장리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고 구석기인들 노닐던 그 넓던 백사장은 아예 사라져버렸으니 이 어인 일인가.

꿈의 시대 웅진백제와 왕릉 발굴

고마나루에 상륙한 곰족 백제는 성을 쌓았다. 공산성이다. 이번에도 강 남쪽이다. 63년 뒤 재천도한 사비성도 백마강 남쪽이었다. 무시무시한 북쪽 오랑캐 고구려를 경계하는 왕성 설계다. 미래를 구상하며 임시수도로 삼았음이 분명한 이 공주 땅에 다섯 왕이 스쳐갔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머리만 보이는 고분이 고구려에 패퇴한 백제를 중흥시킨 왕, 무령왕이 잠든 왕릉이다.  발굴 과정은 절대 두 번 있어서는 아니 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박종인 기자

 

웅진 백제 네 번째 왕은 무령왕이다. 중국 사서 '양서'에는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패퇴한 백제가 고마나루에 자리를 튼 지 26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화려한 웅진백제는 바로 이 무령왕릉을 찾아내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송산리 고분은 일제 강점기 대부분 도굴됐다. 대표적인 도굴범이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다. 1927년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일본어 교사로 부임한 가루베는 1000기에 이르는 백제 고분을 도굴해 유물을 "빗자루로 싹싹 쓸어 담아갔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가루베를 '날파리 고고학자'라고 불렀다. 1932년 그 가루베가 송산리 고분 가운데 6호분을 쓸어가면서 놓친 곳이 봉분이 깎인 무령왕릉이다. 이제 이후 열두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본다. 발굴단장 김원룡이 이렇게 후회했다.
 

 

공산성에 복원된 백제시대 연못. 피라미드를 거꾸로 꽂은 듯, 설계가 기하학적이다.

 

"이 엄청난 행운이 멀쩡하던 머리를 돌게 하였다. 삽시간에 구경꾼과 경향 각지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신문기자들로 꽉 찼다. 카메라를 서너 개씩 둘러멘 기자들은 어서 사진부터 찍게 해달라고 야단이다. 한 신문사마다 2분씩만 찍기로 약속했는데, 안으로 마구 들어가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중략) 바닥 벽돌 틈에서 나무뿌리들이 수세미처럼 바닥을 덮었고 썩은 널 사이사이에 구슬이니 금장식들이 흩어져 있었다. 사실은 몇 달이 걸렸어도 그 나무뿌리들을 가위로 하나하나 베어 내고, 그러고 나서 장신구들을 들어냈어야 했다. 유물을 들어내고 바닥은 청소되었다.(하략)"

 

우금치에 있는 동학혁명군 위령탑.

 

발굴은 열두 시간 만에 끝났다. 몇 년을 걸려도 모자랐을 작업이었다. 악의도 아니었고 무식해서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총체적인 무지(無知) 탓이다. 대한민국 발굴사가 일천하고 왕릉에 대한 개념이 없던 탓이다. 무령왕릉은 대한민국 고고학 사상 최고 최대의 발견이며 최악의 발굴이었고 이후 각종 발굴 현장에서 어김없이 곱씹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지금 중장비를 동원해 시루떡 떠내듯이 땅을 떠내며 초고속 발굴 중인 경주 월성 발굴팀은 메주가 뭐고 된장이 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송산리 고분군은 공산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송산리에는 무령왕릉과 6호분을 재현한 모형왕릉실이 있다. 진짜 왕릉은 보존을 위해 1997년 뒤늦게 폐쇄됐다.

가보시라. 공산성에 올라 부활을 노리던 백제의 꿈을 느끼고 왕릉에서 그 백제의 화려함을 맛보시라. 시간이 남으면 남쪽 우금치에도 가보시라. 1894년 11월 관군에 패해 몰살된 10만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거기 서 있다. 유신 때 세웠다. 부활한 왕국 백제와 기력이 쇠한 조선 왕조. 우리 가슴을 울려대는 역사 흔적이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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