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조선 숙종의 진짜 모습] [식중독에 걸린 경종]

뚝섬 2021. 9. 12. 06:01

조선 숙종의 진짜 모습 

 

 

'장희빈과 로맨스'로 유명… 실제론 강력한 왕권 휘둘러

 

국립고궁박물관이 '9월의 큐레이터 왕실 추천 유물'로 조선 19대 임금 숙종(재위 1674~1720)의 태항아리를 선정했어요. 조선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태(胎·태반이나 탯줄 등 태아를 둘러싼 조직)를 항아리에 보관했는데 이것을 태항아리라고 합니다. 새 생명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귀중한 공예품이라고 하는데요. 숙종은 우리가 TV에서 접한 모습과 다른 면모를 많이 지닌 인물이었어요. 그는 어떤 임금이었을까요?

나라를 재건한 군주로 평가받아요

숙종은 TV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임금입니다. 왕비였던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악녀'로 곧잘 등장하는 후궁 장희빈이 왕비가 됐다가, 다시 인현왕후가 왕비로 돌아온 뒤 병으로 죽고 장희빈은 사약을 받습니다. 숙종은 이 복잡한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이자 두 여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이거나, 천진난만하고 자상한 사람처럼 묘사되곤 했죠.

그런데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숙종은 이와는 사뭇 다른 군주로 보입니다. 정옥자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兩亂)으로 큰 상처를 입었던 조선 왕조는 17세기에 경제적 재건과 자부심 회복의 과정을 거쳤다. 견제와 균형, 상호 감시 체제가 확립됐고 국가 청사진이 제시됐다." 이것이 바로 숙종 때 일이었다는 겁니다. 그다음 숙종 재위 후반부에 해당하는 18세기 초부터는 조선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가 막을 열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강력한 왕권으로 '환국' 일으켰대요

이런 '국가 재건'에 군주인 숙종의 역할이 무척 컸어요. 이는 숙종이 조선 500년 역사에서도 드물게 강력한 왕권을 갖고 있어서 가능했어요.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숙종은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가 낳은 유일한 자식이었습니다. 왕이 되는 데 신하들의 도움을 받지도 않았고 임금 자리를 위협할 삼촌이나 사촌도 없었던 데다, 열네 살 때 왕이 됐는데도 어머니 명성왕후가 수렴청정(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이를 도와 정사를 돌보던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정통성'에서 남다른 위치에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지닌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방법이 바로 여러 차례의 환국(換局)이었습니다. 환국은 '시국 또는 판국이 바뀐다'는 뜻인데, 임금이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을 한 번에 뒤집어버리고 교체하는 '대규모 인사 조치' 또는 '숙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여러 당파 중에서도 남인 위주로 조정을 꾸려가던 숙종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을 중용했습니다. 1689년의 기사환국은 서인 배경의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남인 배경의 장희빈을 중전 자리에 앉히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숙종의 서인 공격은 집요했는데, 급기야 서인의 영수이자 거물 학자인 83세의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려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그 뒤 남인이 역공격을 당한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이 들어서고 인현왕후가 복위됐습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번갈아 왕비가 됐다가 쫓겨나는 과정이 그때그때 숙종의 면밀하고 냉혹한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으로 보는 쪽이 적절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자기 왕비조차도 정치에 이용한 셈이에요.

대동법 확대하고 상평통보도 만들었어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숙종의 실제 성격도 사극과는 많이 다릅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인현왕후에게 "주상(숙종)께서는 평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나는데 간악한 사람이 그걸 옆에서 부채질한다면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숙종이 분노했을 때는 꾸짖는 말을 그치지 못했고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불같은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숙종은 여러 훌륭한 업적도 남겼어요. 그는 공물을 쌀로 통일해 농민의 부담을 줄인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고, 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해 중앙과 지방 관청 등에서 쓰도록 했습니다. 상평통보는 속칭 '엽전'이라 불린 법적 화폐로, 쓰기 쉬워서 거래가 늘어났고 상업이 발달하는 계기가 됐어요.

일본을 상대로 국경회담 '울릉도 쟁계(爭界)'를 벌인 것도 숙종 때였어요. 당시 어부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 일본 어선을 발견하곤 일본에 가서 사과를 받고 돌아왔어요. 이를 계기로 조선 조정은 일본과 국경 회담을 벌여 1696년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다'라는 것을 공식 인정하게 했죠. 숙종은 또 1706년 충남 아산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세우게 하고, 이듬해 '현충사'라는 액자도 내렸어요.

[숙종의 아들 '경종'과 '영조']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는 1680년 스무 살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어 왕비가 된 인현왕후 민씨는 숱한 사극에 '착한 왕비'로 등장하죠. 아들을 못낳았는데, 이는 5년간 궁에서 쫓겨난 명분 중 하나가 되기도 했어요. 숙종의 뒤를 이은 20대 임금 경종(재위 1720~1724)은 장희빈(희빈 장씨)의 아들입니다.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1701년 사약을 마시고 죽었어요.

경종의 뒤를 이은 21대 임금이 이복동생인 영조(재위 1724~1776)였습니다. 조선 임금 최장인 52년간 왕위에 있었고, 탕평책을 써서 정국을 안정시켰으며 조선 후기 중흥을 이끈 왕이죠. 영조의 생모는 숙종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는 숙빈 최씨였습니다. 무수리 출신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가 '동이'예요.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연주 기자, 조선일보(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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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중독에 걸린 경종

 

유독 병치레 잦고 허약했던 경종
아픈 와중에 게장·생감 함께 먹더니 복통과 설사 심해져 결국 숨져

'영조가 독살했다' 소문 퍼졌지만 식중독 증세 악화로 사망 추측

 

최근 폭염과 습한 기후 탓에 식중독 발생 건수가 늘고 있어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발생한 전국 식중독 환자 중 45%가 6월에서 8월 사이에 발생했다고 하니, 각별히 주의해야겠어요.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었던 옛날에는 더운 여름철에 음식이 상하기가 쉬웠을 거예요. 상한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는 경우 역시 더 많았을 것이고요.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도 식중독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해요.

장희빈의 아들, 당쟁에 시달리다

1688년 10월 27일 숙종의 후궁 장씨가 첫 왕자 '윤'을 낳았어요. 장씨는 조선왕조실록에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기록된 장희빈이었죠. 당시 후사가 없었던 숙종은 왕자 윤을 원자로 삼으려 했어요. 원자(元子)란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을 말해요. 송시열 등 서인 측 신하들은 "윤은 후궁이 낳은 왕자이며, 중전이 아직 젊어 충분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땐 기다렸다가 원자를 정하는 게 왕실의 법도"라며 반대하고 나섰어요. 희빈 장씨에게 푹 빠져 있던 숙종은 반대하는 신하들을 귀양보내고, 서인의 딸인 왕비 인현왕후 민씨를 중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희빈 장씨를 새 왕비로 삼았어요. 그리고 1690년 윤을 세자로 책봉했죠.

그런데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는 곧 멀어졌어요. 숙종은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삼고, 희빈 장씨는 예전처럼 빈으로 강등시켰는데 1701년 인현왕후가 병을 얻어 죽고 말아요. 이내 희빈 장씨가 무당을 불러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혐의를 받게 됐죠. 이때 소론과 노론으로 갈려 당쟁을 일삼던 서인들은 각기 다른 주장을 했어요. 소론은 세자를 생각해 희빈 장씨를 용서해달라 했고노론은 큰 죄를 지었으니 벌을 내리라고 했어요. 결국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렸고 희빈 장씨를 감쌌던 소론 측 인물들을 조정에서 내쫓았어요.

세자 윤은 허약한 체질에다 어머니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시름시름 앓는 경우가 많았어요. 숙종은 노론의 우두머리 이이명을 조용히 불러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가 낳은 왕자 연잉군세자의 후계자로 삼아 정치를 배우게 하라고 지시했죠. 1720년 숙종이 60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자 그를 이어 몸이 허약한 세자 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경종이에요. 경종이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뒤를 이을 왕자가 없자 노론 측에서는 연잉군을 세제(世弟) 삼게 했어요. 1724년 경종이 죽자 연잉군이 왕위를 이어 조선의 21대 왕 영조가 되죠. 그런데 소론 측 사람들은 경종의 죽음에 의심을 품었어요.

음식 잘못 먹어 병세 악화

1724년 8월, 경종의 병이 갑자기 악화돼 음식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게장과 생감을 올리자 뜻밖에도 맛있다고 하며 잘 먹었대요. 그러나 다음 날부터 심한 복통과 설사로 의식을 잃었죠. 경종은 밤새도록 가슴과 배가 뒤틀리는 고통을 겪었다고 해요. 세제 연잉군은 경종의 기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인삼과 부자를 처방하라고 했어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먹이자 눈빛이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지며 기운이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잠시, 새벽 즈음이 되자 경종의 병세는 다시 위독해졌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경종의 병세가 설사와 복통이 심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식중독이 아닐까 짐작해요. 단백질이 풍부한 게장과 탄닌이라는 성분이 들어있는 감을 함께 먹으면 복통과 설사, 식중독을 일으키기 쉽다는 것이 한의사들의 설명이죠. 16세기 명나라 약학서 '본초강목'은 "게를 감과 함께 먹으면 복통이 나고 설사가 난다"고 전했어요. 게와 감이 만나면 독이 된다는 것이죠.

경종이 죽은 뒤 한동안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먹으라고 한 사람이 영조였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던 소론 측 인물들이 퍼뜨린 이야기죠. 소론 측 인물로 영조 때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는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관련돼 있다고 주장했어요. 역시 소론 측 인물로 반란을 일으켜 영조에게 심문을 받던 신치운은 영조 앞에서 영조가 왕이 된 뒤로 자신은 게장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영조가 준 게장을 먹고 경종이 죽었다는 것을 비꼬아 한 말이지요.

영조는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리라고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수라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경종을 따르던 소론 측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던 것이죠. 게장이나 생감이 경종의 죽음에 직접적 원인이 됐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허약해진 몸이 식중독 같은 병에 걸리고 식중독 치료에 도움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음식을 먹어 불행을 당한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식중독은 여름철에 걸리기 쉬운 만큼, 조심 또 조심해야겠어요.

 

조상들이 즐겨 찾던 식중독 특효약

 

조상들이 예로부터 식중독을 막기 위해 즐겨 먹은 음식은 매실과 생강, 후추예요. 생강은 고려시대 문헌인 ‘향약구급방’에 약용 식물로 기록돼 있어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재배된 것으로 짐작해요. 식중독균을 죽이는 살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죠. 매실도 식중독을 일으키는 여러 세균에 저항하는 효능이 있는데 고려 초기부터 약재로 쓰였어요. 후추 역시 고려시대에 전해졌어요. 민간에서는 아침마다 후추를 먹으면 더위와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생각했대요. 여름에는 후추 한 알만 먹어도 식중독 등 배탈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다고 해요.

 

-지호진·어린이 역사저술가/기획·구성=박승혁 기자, 조선일보(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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