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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진시황이 쌓은 건 사라지고 명나라때 성벽만 남아

뚝섬 2021. 7. 21. 06:21

만리장성 

 

President Nixon and Pat Nixon, Pat Nixon, William Rogers, Chinese officials, Pat Buchanan, Oliver Atkins, Ron Walker, and entourage at the Ba Da Ling portion of the Great Wall. February 24, 1972. WHPO 8548-26A

 

지난 1일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경축 대회에서 시진핑 중국 공산당 주석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연설을 했어요. 시 주석은 연설 중 “외부 세력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압박하면 14억 중국 인민들의 피와 살로 만든 강철 만리장성 앞에서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말했어요. 중국의 강함을 드러내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다른 국가들에 겁을 주려 했다는 해석이 나왔어요.

 

시 주석이 언급한 만리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로 알려져 있어요.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고, 그 장대한 규모 때문에 로마의 콜로세움 등과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죠.

 

만리장성은 수천년에 이르는 중국의 긴 역사 동안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지어지고 방치되고 다시 지어지는 일이 반복됐어요. 북방 이민족 침입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죠. 동서로 펼쳐진 하나의 긴 성벽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론 따로 떨어진 성벽도 있고 각각 지어진 것을 후에 연결한 것도 많아요.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6000㎞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1만리(약 4000㎞)보다는 긴 길이예요. ‘만리’라는 이름은 사마천의 ‘사기’에 ‘장성이 1만여 리 된다’고 기록된 데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중국 정부는 만리장성 길이를 당초 6300㎞에서 2009년 8851㎞로 늘려 발표했다가 2012년엔 고구려와 발해가 쌓은 성까지 포함해 2만1196㎞이라고 발표해 논란이 되기도 했어요. 어쨌든 이렇게 거대한 장성을 쌓는 데는 셀 수 없이 많은 인력이 동원됐을 거예요. 만리장성이 중국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볼게요.

 

◇”사내아이 낳지 마라” 백성의 눈물

 

만리장성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진시황(기원전 259~기원전 210)입니다.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 중국 최초로 통일 제국을 이룬 황제였어요. 당시 북쪽 몽골 초원에 위치한 흉노족이 자꾸 진나라 국경을 넘어와 골칫거리였죠. 그래서 진시황은 이들을 막기 위해 그 이전 춘추전국 시대에 쌓았던 성벽들을 보수하고 연결해 북쪽 방어선을 만들었어요.

 

당시 장성은 흙에 물을 개어서 다지거나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아 지었어요. 그래서 전쟁 시 방어용으로 쓰기엔 그렇게 튼튼하진 않았대요. 진시황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장성 축조에 동원됐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어요. 하지만 백성들이 불렀다는 한 서린 노래가 전해져요. “사내아이라면 낳지를 마라. 보지 않았는가. 장성 아래 징용되어 죽은 남자들의 해골이 겹겹이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이후 진시황이 사망한 뒤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나라는 멸망합니다.

 

장성은 나중에 한나라(기원전 206~220) 때 다시 지어졌어요. 한나라의 국력을 강화한 황제로 꼽히는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는 장성을 서쪽 둔황까지 연장했어요. 이 시기 한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의 교역을 활발히 하기 시작했는데, 장성은 흉노 등 북방 유목민으로부터 안전하게 교역로를 확보하는 역할을 했대요. 이후 흉노 세력이 쇠퇴하면서 수백 년간 장성 증축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어요.

 

만리장성 뚫고 중국 차지한 몽골

 

송나라(960~1279) 때는 북방 유목 민족인 거란·여진·몽골 등이 장성 안으로 쳐들어와 중국 영토를 일부 지배했어요.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 역시 다른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새로 성벽을 축조하기도 했지만, 몽골군에게는 소용이 없었죠.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됐어요.

 

오늘날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1368~1644) 때 세운 것이에요. 몽골 고원으로 쫓아낸 원나라가 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어요. 영락제(재위 1402~1424) 때 건설을 시작해 수도 베이징 주변을 중심으로 건설됐어요. 16세기 말 서쪽으로는 자위관(嘉峪關)에서 동쪽으로는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이 완성됐어요. 그러나 17세기 만주족이 만리장성을 뚫고 내려와 베이징을 함락하며 결국 명나라는 멸망하고 청나라가 시작됐습니다.

 

형태 온전한 건 20%뿐

 

현재 남아있는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시절 것이지만, 그것조차 형태가 온전한 것은 2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요. 비바람에 자연스레 허물어진 것도 있고, 주민들이 집이나 농장 등을 짓는 데 쓰려고 성벽을 부수고 벽돌을 가져간 경우도 많았대요.

 

북방 이민족과의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만리장성이 지금은 중국의 자부심이자 상징이 됐어요. 베이징 근교 바다링(八達領) 장성에 가면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을 지낸 마오쩌둥이 남긴 말이 비석에 새겨져 있어요.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말이죠. 중국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이 내전을 벌이던 시절인 1935년 공산당 군대인 홍군이 국민당 군대에 쫓기던 중 마오쩌둥이 이 말을 했다고 해요. 홍군은 수많은 산과 강을 넘어 1만2000㎞가 넘는 대장정을 완수하고 옌안에서 힘을 결집했어요. 공산당은 국민당을 몰아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어요.

 

만리장성은 현대사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했어요.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냉전 중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어요. 닉슨은 바다링 장성에 올라 “위대한 민족만이 이처럼 위대한 장성을 세울 수 있다”고 했어요. 만리장성에 올라 덕담하는 미국 대통령의 모습은 냉전이 끝나고 화해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어요.

 

[달에서 만리장성이 보인다?]

 

서양 사람들은 일찍부터 만리장성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했어요. 18세기 말 영국 국왕 조지는 최초로 중국에 통상 사절단을 보냈는데, 당시 중국에 대해 부정적 기록만 남긴 사절단이 만리장성에 대해서만은 그 규모에 압도당한 듯 찬사를 남겼죠. 이후 19세기 말엔 서양에서 “만리장성은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라는 말도 나왔어요.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고 돌아온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에게 만리장성이 달에서 보이는지 물었을 때 암스트롱은 처음엔 “보인다”고 했지만, 나중에 ‘지리학 잡지’에서 “내가 관찰한 건 그냥 구름덩어리였다”고 바로잡았대요.

 

※참고문헌: 줄리아 로벨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이형준 ‘교과서에 나오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김연주 기자, 조선일보(2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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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2000년을 쌓아올린 지구 최대 인공 구조물

 

베이징 인근 진산링에서 바라본 만리장성.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지구상 최대 인공구조물이다. /연합뉴스


2007년 7월 7일 오후 7시, 세계 신(新) 7대 불가사의가 세상에 공표됐다. 새 7대 불가사의는 기존 7대 불가사의에서 하나의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체됐다. 유일한 건축물이 바로 중국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보하이만 산하이관에서 실크로드 동쪽 끝 타클라마칸사막의 자위관(감숙성 소재)까지 길이가 6700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구조물이다. 이는 서울~부산 간 거리(450km)의 15배 정도이다.

만리장성은 중국 춘추시대 (BC 770〜BC 476)부터 명나라(AD 1368〜AD 1644)까지 끊이지 않고 인간의 손길이 닿은 지구상 최대 인공 구조물이다. 그래서 만리장성을 중국 역사의 숨결을 전해주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만리장성은 현대 중국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

■ 2000여 년에 걸쳐 쌓아올려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 제(齊)에서 시작돼 전국시대 연(燕), 조(趙), 위(魏), 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했다. 진시황이 통일 이후 연, 조 등이 북변(北邊)에 구축했던 성을 증·개축해 감숙성 남부 민현에서 랴오둥의 랴오양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에 대한 방어선을 만들었다. 한나라에 이르러 영토 서쪽 끝인 둔황 바깥쪽 위먼관까지 장성이 연장됐다.

북방 이민족이 중원을 지배했던 시기와 만리장성의 바깥 북쪽까지 영토를 확장한 당나라 시절에는 만리장성을 거의 방치한 상태였다.

만리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 규모를 갖춘 것은 한족 왕조인 명나라 때이다. 명나라는 만리장성 지대를 9개의 군관구로 나누어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 요지, 즉 옌먼관, 쥐융관, 구베이커우, 장자커우 등지에 견고한 관성을 설치했다. 청대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만주, 몽골을 나누는 정치·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됐다.

 

감숙성 하서주랑의 중간에 위치해 고대 실크로드의 교통요지였던 가욕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발해만의 산해관이라면 가욕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있어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지형을 활용한 전략이 돋보이는 곳이다.


■ “만리장성은 완벽한 군사 요새”

만리장성은 크게 관(關), 봉화대, 성벽으로 나뉜다. 관은 방어가 용이한 군사 요충지에 설치한 대형 교두부로 설계했고, 도시 성곽 둘레를 판 못인 해자 등과 같은 다양하고 효과적인 방어 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다. 봉화대는 적의 침입과 동향을 전달하는 가장 오래되고 효과적인 통신 시스템인데, 주로 산이나 언덕 꼭대기에 있다. 성벽은 만리장성의 가장 주요한 시설이다. 성벽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벽체 높이는 8.1m다. 벽체의 단면은 사다리꼴 형상으로 밑변이 6.5m, 윗변이 5.8m이다. 군사 요충지나 평지에는 높게 축성하고, 군사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지역이나 산악지대는 상대적으로 낮게 쌓았다.

만리장성은 전쟁을 수행하기에 완벽한 군사 시설로 설계돼 있다. 총안(銃眼)은 2m 정도 높이의 요철형 벽체이고,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적을 향해 활이나 총을 발사하는 동시에 자기 몸을 보호하는 엄폐물 기능을 제공한다. 벽체로부터 안쪽 1m 정도에 설치된 낮은 벽체는 여자도 쉽게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여장(女墻)으로 불리었고, 병사와 말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구조물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돈대(墩臺)는 일반적으로 2층 구조인데, 위층은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고, 아래층은 병사들의 식량과 말의 사료, 장비와 화약 등을 보관하는 창고 겸 무기고로 설계됐다. 성문에는 5〜6m 폭의 30도 정도 경사진 마도(馬道)가 설치돼 적은 병사를 가지고 많은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만리장성에는 빗물을 즉시 배출하는 배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침수로 인해 성벽이 파손되는 것을 예방하고 있다.

 

만리장성이 바다로부터 시작되는 동쪽 끝 노용두(老龍頭) 장성. 중국 하북성 진황도 산하이관에 있다. /뉴시스


다짐 토벽, 찹쌀 풀로 벽돌 쌓기

만리장성은 그 지역에서 얻기 쉬운 자재를 사용하고 당대 기술력에 가장 적합한 시공 방법을 채택했다. 근세로 내려오면서 총이나 대포 등 무기의 파괴력이 커지면서 이를 견뎌낼수 있는 돌과 같이 강도가 큰 성벽 자재가 사용됐다. 성벽은 사용되는 자재 종류에 따라 흙을 드롭 해머로 이용해 다져서 만드는 다짐 토벽, 벽돌을 사용한 벽돌 성벽, 돌을 사용한 석(石) 성벽 등으로 구분된다.

다짐 토벽은 수나라 시대 이전에 축성된 만리장성에 사용된 공법이다. 이는 성 벽체 모양의 나무 거푸집을 짜고, 흙을 채워 다져서 정해진 벽체의 높이와 길이가 될 때까지 여러 층의 다짐 흙체를 연속적으로 시공하는 방식이다. 흙이 없는 사막 지대에서는 흙 대신 바위 부스러기와 버드나무 가지를 섞어서 벽체를 만들었다. 토벽은 시공이 간편한 반면에 시간이 지나가면서 쉽게 붕괴되거나 파괴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벽돌로 만리장성을 쌓는 것이 보편화된 것은 벽돌 생산 기술이 발달한 당나라 이후이다. 그 당시 벽돌이 비싼 자재였기 때문에 큰 도시의 성문이나 이에 인접한 성벽의 벽체 재료로서 일부만 사용됐다. 이런 벽돌 성벽도 벽돌을 외벽 자재로 썼고, 전통적인 축성 자재인 흙을 내벽 채움재로 이용했다. 명나라 시대에 와서 벽돌 생산 기술이 한 단계 더 높아지면서, 고품질 벽돌이 성벽 자재로 광범위하게 쓰이게 됐다. 찹쌀과 차조로 풀을 쑤어 혼합한 회반죽으로 벽돌을 하나씩 붙이는 축성 공법은 벽돌이 깨지면 깨졌지 뗄 수가 없었다. 이런 공법은 당시 새롭게 보급된 화약 무기 공격에 매우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었다. 또한, 만리장성의 성벽이 현재까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된 것은 이러한 효과적인 공법의 덕택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산악 지대의 성벽은 주변의 돌을 이용했다. 성벽 자재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가공한다. 이 때에도 접착제는 찹쌀 풀을 혼합한 회반죽을 이용했는데, 이는 자연적인 풍화 작용뿐 아니라 당대 최고 무기 공격에도 견뎌내는 매우 효과적인 건설 자재이다. 베이징 근교에 있는 바다링(八達嶺) 구간의 만리장성 성벽을 보면서 우리는 공법의 우수성을 오늘날에도 재확인할수 있다.

 

만리장성 위치


군인, 민간인, 죄수가 동원된 건설

고대에는 인력에 의존한 건설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리장성 건설에 동원된 건설 인력은 군인이 주력이었지만, 민간인과 죄수도 있었다. 중국 역사서인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나라 장수 몽염이 흉노족을 정복한 후 진시황은 몽염에게 명령해 만리장성을 재축성하도록 했다. 이 일에 30만명의 병사가 동원됐고 9년이 걸렸다. 북주(北周) 시대에는 180만명의 건설 인력이 투입돼 만리장성을 축성했는데, 대부분 징집된 민간인이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수나라가 내몽고 지역의 만리장성을 축성하는 데에 100만명을 투입했다. 진나라의 경우에는 30만명의 군인 외에 50만명의 민간인을 만리장성 건설에 징발했다. 당시 법에 의하면, 죄수는 4년 동안 강제 노역하도록 했는데, 이 규정을 잘 활용해 죄수들을 만리장성 현장에 투입했다.

 

폭설에 뒤덮힌 만리장성.


■ 20% 정도만 온전히 남은 중국 최고 관광자원

베이징 근교 바다링 제6루를 지나 해발 888m 지점에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은 이는 진짜 사나이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고 마오쩌둥이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중국 통계에 의하면 매년 1000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만리장성을 찾는다. 1987년 유네스코가 선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만리장성은 중국 제일의 관광 자원이 됐다.

하지만 만리장성이 2000년에 걸친 자연 재해와 훼손으로 ‘천리장성(千里長城)’으로 전락했다는 중국 관련 학회 발표가 있다. 해당 학회는 총 6700km 중 온전히 남은 성벽은 20% 정도인 1200km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학회는 최근 이루어지는 인위적인 파손과 개발이 더 큰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보존의 긴급성을 촉구했다.

 

-이영환 건설산업硏 본부장, 조선닷컴(1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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