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법무장관이 부러운 이유
[특파원 리포트]
한국 집권 세력의 시각을 빌린다면 미 법무부는 ‘적폐 청산’의 전초 기지로 너무도 좋은 환경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사태, 트럼프 자녀·측근 탈세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트럼프 정권의 민주당 의원 및 기자 사찰 논란 등 전(前) 정권을 겨눈 이슈들이 줄줄이 몰려 있다.

메릭 B. 갈랜드(Merrick B. Garland) 법무장관이 9일 워싱턴 DC 법무부에서 낙태법으로 텍사스를 고소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한국 정권 방식대로라면 이렇게 진행됐을 것이다. 미 법무장관은 검찰총장 역할을 겸한다. 연방 검찰의 정권 수사를 걱정할 일도, 소위 ‘검찰 개혁’ 작업을 벌일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검찰이 조 바이든 대통령 차남의 탈세 의혹 수사를 진행 중이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법무장관 지휘 아래 각종 조사위가 앞다퉈 정적들의 치부를 까발리고, 친여 매체들은 ‘유혈 수사극’을 연중무휴 생중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론 이와 거리가 멀다. 지난 3월 취임한 메릭 갈런드 장관은 언론 인터뷰는 물론 브리핑에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주인공’이 된 뉴스를 찾기가 힘들다. 법무부가 최근 한 달간 법무장관 명의로 내놓은 보도 자료는 5건이다. 같은 기간 국무부는 77건, 국토안보부는 13건이었다.
갈런드 장관은 취임 이후 측근들에게 “(트럼프라는) 괴물에 곧장 달려들면 그 괴물에 더 끈질긴 생명력을 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트럼프의 과오를 들춰내는 데 집중할 경우, 우리도 그들처럼 ‘당파적 전사’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트럼프 정부를 겨냥한 각종 조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관련 부서에 전적으로 맡기고 있다. 법무장관이 정치의 최전선에 서서 수사 지휘권을 수시로 발동하고, 정권 수사를 진행하는 검찰 수사팀을 도중에 ‘공중분해’시키는 한국 방식과 상반된 모습이다.더보기 Click
갈런드 장관은 지난 2월 인사청문회에서 “법무장관은 대통령의 변호사가 아닌 국민의 변호사”라며 “기소와 수사를 정파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막겠다”고 했다. 그는 “민주당원을 위한 규칙과 공화당원을 위한 규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같은 달 박범계 법무장관은 “나는 장관으로 일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당) 국회의원”이라며 정파성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갈런드의 ‘소신’에 대해 미국 민주당 일각에선 비판도 나오고 있다. 트럼프와 측근들에 대한 수사에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갈런드 장관은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그에 대한 기획 기사에서 “그는 각종 ‘반(反)트럼프 조치’를 기대하고 있는 민주당에 ‘카타르시스’를 안기지 않을 것”이라며 “대신 그는 트럼프 행정부 때 뒤틀렸던 법무부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결국 이것이 더 큰 승리 아닌가”라고 했다.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조선일보(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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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의 페미 선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7)는 포브스지가 선정하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에서 10년째 1위를 하고 있지만 여성계 반응은 부정적이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임에도 별다른 여성 정책을 내놓은 것이 없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독일의 양성평등 순위는 6위에서 11위로 뒷걸음질쳤다. 공개 석상에선 “(페미니스트) 배지를 달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 반전이 일어났다.
▷그는 8일 나이지리아의 페미니즘 작가 응고지 아디치에와 여성계 인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페미니즘이란 기본적으로 남녀가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뜻에서 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말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2017년 주요 20개국(G20) 여성경제정상회의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라고 묻자 부정적으로 답한 때와는 180도 달라진 것이다.
▷왜 묻지도 않았는데 ‘페미 선언’을 한 걸까. 혹자는 여당인 기독민주당 지지자들의 보수적 정서를 감안해 말을 아껴오다 26일 총선 후 퇴임을 앞두고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선거 판세가 좌파 사민당으로 기울자 진보 표심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가 일관된 태도를 보여 온 건 아니다. 2005년 총선에선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선거 전략에 맞춰 “내가 당선되면 양성평등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며 여성임을 내세웠다. 집권 후엔 “메르켈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모호함으로 일관했다. “유연하고 실용적” “노회한 정치꾼”이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왔다.
▷메르켈 총리는 ‘사이다’ 언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 조용하고 느리게 움직인다. ‘답답하다’는 뜻의 ‘메르켈스럽다’는 유행어도 있지만 1인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대통령제와 달리 다양한 정치세력과의 연정이 필수인 의원내각제에선 ‘메르켈스러운’ 리더십이 통한다. ‘유럽의 병자’ 독일을 ‘유럽의 경제 발전소’로 일으켜 세우고 글로벌 금융 위기, 난민 위기, 코로나 위기를 극복한 건 그의 신중하고 유연한 말과 행동이다.
▷‘메르켈 다이아몬드’라 불리는 특유의 손동작이 있다. 엄지와 검지로 마름모 모양을 만들어 배 위에 두는 것인데 그는 “균형을 잡기 좋다”고 설명한다. 메르켈 총리는 16년간 집권하며 미국 대통령 4명, 영국 총리 5명, 이탈리아 총리 8명을 상대했다. 정체성 정치의 덫에 빠지지 않는 균형 감각이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에서 끝나지 않고 독일 최장수 총리, 독일 역사상 제 발로 퇴장하는 첫 총리로 남게 된 비결일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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