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의 비극
중미 카리브해에 작은 섬 이스파니올라가 있다. 그곳 흑인 노예들이 1804년 프랑스를 축출하고 아이티를 건국했다. 아이티인들은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식민지 시절에도 설탕·커피 생산지로 번영하며 유럽 국가의 아메리카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하다는 명성을 누렸다. 프랑스로부터 배운 영농 기법만 잘 활용해도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해방 노예가 세운 최초의 독립국이란 국민적 자부심도 컸다. 1822년엔 여세를 몰아 그때까지 스페인 치하에 있던 섬 동쪽 도미니카 지역마저 손에 넣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티는 파탄국가(failed state)로 전락했다. 1957년 집권한 프랑수아 뒤발리에 대통령과 그의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30년 세습 정권이 나라를 완전히 거덜 냈다. 그후로도 쿠데타와 정파 대립, 무장 세력의 발호 등 혼란이 반복됐다. 오늘날 아이티는 인구 1140만명 중 60% 이상이 빈곤에 빠져 있고 120만명은 극심한 기아로 고통받는다.
▶아이티는 환태평양조산대에 있는 재난 빈발 국가다. 2010년 1월 규모 7의 강진이 이 나라를 덮쳤다. 사망자 수가 22만명을 넘었다. 2월에는 같은 지진대에 놓인 칠레에 규모 8.8의 대지진이 닥쳤다. 아이티 지진보다 500배나 강력했다. 그런데 사망자는 450명뿐이었다. 칠레 정부가 앞장서 건물마다 내진 설계를 한 것이 수많은 국민 생명을 구했다. 1955년 허리케인 피해로 사망자 600명을 낸 멕시코는 2007년 같은 규모의 허리케인이 닥쳤을 때는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티와 국경을 맞댄 도미니카 공화국도 1844년 독립 후 경제 발전과 정치 안정을 이루며 중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정치가 실종된 아이티에는 깡패가 들끓는다. 전국적으로 무장 갱단이 90개 넘는다고 한다. 아이티에서 가장 세력 큰 갱단이 지난주 총리 주재 건국 영웅 추념식장에 난입해 총기 난사극을 벌였다. 지난 7월 대통령이 암살당하더니 이젠 깡패가 국가 행사장에 나타나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던 총리를 행사장 밖으로 내쫓고 총리 행세까지 했다.
▶아이티는 1949년 개발도상국 최초로 엑스포도 개최했던 나라다. 1950년대 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 선에 머물 때, 아이티는 200달러를 넘나들었다. 이젠 수많은 아이티인이 목숨 걸고 미국에 밀입국한다. 미 국경수비대가 그들을 찾아내 채찍질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이런 국제사회의 멸시엔 변변한 항의조차 없다. 아이티의 비극이 정치 리더십의 중요성을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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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갈등, 남의 일 아니다
[특파원 리포트]

영국의 한 돼지 도축장. 영국의 도축장에서는 주로 루마니아 등 동유럽에서 건너온 외국인들이 일한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EU 출신 외국인 근로자 입국 문턱을 높였다. 이에 따라 도축 인력이 크게 모자란 상황이다./로이터 연합뉴스
지난해 독일·영국·프랑스의 육류 가공 공장이 코로나 바이러스 소굴로 지목됐다. 소·돼지를 손질하는 동유럽 출신 도축 근로자들은 합숙한다. 한 명이 수백 명에게 옮기는 건 순식간이다. 고향으로 잠시 돌아간 도축 인력들을 독일·프랑스는 다시 불러들였다. 하지만 영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스스로 울타리를 쳤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이 EU 탈퇴를 선택한 이유는 ‘외국인들이 몰려오는 게 싫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올해 1월 EU와 완전 결별한 이후 외국인에게 취업 비자 문턱을 높였다. 이런 조치는 현실 외면이다. 영국 축산업계 종사자 9만7000명 중 62%가 동유럽 쪽 EU 국적자다. 도축장 일손이 부족한 문제는 파장이 작지 않다. 농가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고깃값이 급등할 조짐도 나타났다. 이뿐 아니다. 대형 트럭을 운전할 외국인이 부족해졌다. 주유소에 기름이 동났고, 컨테이너 운반을 못해 물류가 마비됐다. 간병인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프랑스도 영국과는 방향은 다르지만 역시 이민자 문제로 시끄럽다. 내년 봄 대선을 앞두고 이민자를 쫓아내자는 극우 후보 2명이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2위와 3위를 번갈아 차지하고 있다. 전례 없는 일이다. 유력 대선 후보로 트럼프 같은 사람이 둘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연원을 캐려면 45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1976년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이민 노동자가 고국의 가족을 데려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때만 해도 국력이 꽤 강했다. ‘관용’이니 ‘연대’라는 말을 선심 쓰듯 꺼냈다. 당시 문을 확 열어젖힌 탓에 지금 프랑스에는 무슬림이 600만 명 이상 살고 있다. 무슬림의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인종·종교 간 대립이 첨예하다. 국력은 예전만 못하니 백인들은 유색 인종들에게 ‘파이’를 나눠 주지 못한다. 이것도 많은 갈등을 야기한다.
영국·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이민자를 둘러싼 논란은 압도적으로 비중이 큰 사회 문제다. 한국도 곧 그렇게 된다. 멀지 않은 미래에 노동력 부족이 예고돼 있기 때문이다. 한 해 출생아가 30년 전에는 70만 명이었다. 하지만 10년 전에는 47만 명이더니 작년엔 27만 명이었다.
모든 건 정도의 문제다. 최근 영국처럼 감정이 앞서 문을 닫아버리면 경제가 마비된다. 1970년대 프랑스처럼 갑자기 문을 열면 후일 뒷감당을 못할 가능성이 크다. 언제부터 얼마만큼 빗장을 풀어야 할지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온다. 하지만 당장 발등의 불이 아니라 그런지 대선 국면에서 다뤄지지 않고 있다. 골치 아프다며 이민자와 외국인 인력을 둘러싼 논의를 미루면 문을 확 열었다가 다시 확 닫으며 우왕좌왕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게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 나라 전체가 홍역을 심하게 앓게 될 것이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조선일보(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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