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이혼 판결’서 나온 황당한 오류와 수정 논란 ]
['세기의 재판'을 보고 정의, 형평, 법적 안정성을 우려한다]
[‘1조3800억’ 이혼으로 29년 만에 소환된 ‘노태우 비자금’]
[비자금도 재산 분할 대상인가… 대법서 다시 다툴 수도]
[‘1조3800억 재산분할+20억 위자료’… 한국 역대 최대 이혼]
[‘노태우 재평가’와 ‘문재인 頌德碑’]
‘세기의 이혼 판결’서 나온 황당한 오류와 수정 논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을 진행한 재판부가 판결문 오류를 바로잡는 일이 발생했다. 재판부는 극히 이례적으로 상세한 설명자료까지 배포했다. 재계 2위 그룹의 경영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재판에서 있어선 안 될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고치면서도 ‘재산의 35%인 1조3808억 원을 노 관장에게 지급하라’는 결론은 그대로 유지했다.
문제가 된 건 SK㈜의 전신인 대한텔레콤 주가를 계산한 부분이다. 당초 재판부는 최 회장이 대한텔레콤 주식을 1994년 취득할 때, 부친인 최종현 선대회장이 1998년 타계했을 때, 2009년 이름을 바꿔 SK C&C로 상장할 때의 주가를 비교해 선대회장 기여분은 12.5배, 최 회장 기여는 355배라고 봤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재판부는 1998년 대한텔레콤 주당 가치를 1000원이 아닌 100원으로 착각했다. 이를 바로잡으면 선대회장 기여분은 125배로 늘고, 최 회장 기여는 35.5배로 준다. 이에 따라 최 회장 재산 중 상속 등으로 인한 ‘특유재산’이 늘어 노 관장에게 돌아갈 분할액은 줄어야 한다는 게 최 회장 측 논리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어제 내놓은 설명자료에서 “판결문 일부 수정이 있었더라도 재산 분할 비율 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최종현 회장이 형성한 재산에도 노 관장의 부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기여를 했기 때문에 달라질 게 없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또 판결에서 2009년까지를 기여도 평가 시점으로 봤던 것을 올해 4월로 바꿔 선대회장과 최 회장 기여를 각각 125배, 160배라고 다시 계산해 내놨다. 최 회장 측 기여분이 선대회장보다 여전히 큰 만큼 판결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재판부가 판결문에 없던 내용까지 제시하며 판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나온다. 최 회장 측은 재판부가 최 회장 부부의 실질적 혼인관계가 2019년 파탄 났다고 보면서도 산정 시점을 올해까지 연장한 걸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법리가 제대로 적용됐는지 등만 따지지만 원심 판결에서 오류가 발생한 만큼 사실관계까지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특히 30여 년 전 조성된 정치 비자금이 SK 측에 실제 유입됐는지, 불법 비자금을 그대로 인정해 그의 자녀가 막대한 재산 분할을 받는 게 타당한지, 공익적으로 환수할 방법은 없는지 따져볼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동아일보(2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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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재판'을 보고 정의, 형평, 법적 안정성을 우려한다
최태원·노소영 재산 분할 판결
숙제를 던진 세 가지 이유
사진=연합뉴스, 그래픽=송윤혜
재벌 회장 대 전직 대통령 딸 간 ‘세기의 재판’ 2라운드가 끝났다. 결과는 ‘딸’의 압승이다. 재산 분할만 1조4000억원에 육박하고, 위자료도 역대 최고인 20억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이번 재판 ‘결과’에는 관심이 없다. 이미 헌법재판소는 2015년 간통죄 위헌 판결에서 “혼인과 가정의 유지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형벌을 통하여 타율적으로 강제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혼은 ‘사생활’이다. 이들의 혼인 관계 유지나, 재산 분할과 위자료 액수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번 2심 판결 ‘과정’을 보니 적이 걱정된다. 적어도 세 측면에서 이번 판결의 기초가 되는 원칙이 무엇인지 불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첫째 걱정은 이번 판결이 근본적으로 ‘정의로운’ 판결이냐는 것이다. 2심 판결에 따르면 노소영씨의 부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1년 300억원을 사위인 최태원 회장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 돈으로 현재의 SK그룹을 일구었으니, 이제 이혼하게 된 마당에 돌려주라는 것이다.
1991년의 300억은 현재 가치로 최소 수천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 돈이 어디서 났을까? 그 답을 우리는 알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배임 수뢰 혐의로 1995년 구속 기소되었으며, 1997년 대법원 확정판결로 징역 17년 및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그간 노태우 대통령 측은 이 추징금을 모두 납부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만약 그 딸이 법정에 제출한 증거가 사실이라면 아직 추징되지 않은 비자금이 있었던 것이다.
이 돈은 국민에게 갔어야 할 돈을 권력으로 가로챈 부정(不淨)한 돈이다. 이 돈이 만약 이혼 시 재산 분할 형식으로 배임 수뢰 범죄인의 딸에게 전달된다면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범죄 수익 은닉’ 사례로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재산 분할인가?
둘째 걱정은 이번 2심 판결이 과연 ‘형평’에 맞느냐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혼하면 재산을 절반씩 기계적으로 나누는 것이 ‘국제 표준’이라고들 오해하는데, 우리 민법의 기초를 제공한 일본은 물론 영국, 호주, 미국 대부분 주 등 여러 법 체계에서 이혼 시 재산 분할 원칙은 ‘공동 재산 기여분’, 이혼 후 생계 유지 필요성 등 여러 요소를 종합 고려한 ‘형평의 원칙’이다.
그런데 2심 판결은 노소영씨의 작고한 부친이 SK그룹에 여러 혜택을 주었다면서 이를 기여분 산정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SK가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 퇴임 후일뿐더러,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구속되거나 병석에 있는 등 무슨 특혜를 줄 만한 힘도 없었다.
지난 5월 31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사옥의 모습. 서울 고등법원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 3800억원과 위자료 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 장련성 기자
반면 2심 판결은 최태원 회장 일가의 기여분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 회장이 형제자매나 사촌들에게 이미 증여한 부분 역시 모두 최태원·노소영 공동 재산으로 간주하여 재산 분할 대상으로 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가족 기업 성격을 갖는 경우가 많다. 재산 형성이 수대에 걸쳐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형제자매는 물론 사촌 등 방계 혈족도 기업 활동에 기여하곤 한다. 실제로 SK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일부 가족이 상속 지분을 양보하거나 실제로 기업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주식 가치 형성에 기여했다. 그런데 이들의 기여는 모두 부인하면서 반대로 노소영씨는 그 부친의,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여 주장까지 모두 인정하여 일률적으로 재산을 나누었다. 이것이 과연 형평에 맞는 셈법인가?
끝으로 이번 판결은 법적 안정성 측면에서 우려된다. 우리 법원은 위자료 산정 때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불륜에 혼외자까지 있어도 위자료는 기껏 수천만 원이 상한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20억? 급격한 위자료 증가의 배후에 있는 법 원칙은 무엇인가? 가해자가 돈이 많아서? 그렇다면 앞으로 피해액 산정 시 가해자 재산 규모를 고려할 것인가? 아니면 피해자가 돈이 많아서? 그러면 이제 부유층의 정신적 피해는 일반인에 비해 수백 배 가치를 갖게 되나?
위자료 결정에 법원의 재량이 허용된다 해도 그 역시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선 안 된다. 더욱이 2015년 간통죄 위헌 판결 당시 헌재는 “간통 행위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상당히 낮아졌고, 세계적으로 간통죄는 폐지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불륜의 가벌성이 낮아지면 불륜에 대한 위자료도 폐지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마저 있었다. 실제로 영미권을 비롯해 세계 많은 나라에서 불륜에 대한 정신적 피해 배상으로서 위자료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영어의 ‘alimony’는 우리 법의 위자료가 아니라 ‘이혼 후 생계 지원금’을 의미한다. 우리 법의 ‘위자료’는 일본 민법의 잔재로서 영어로는 ‘consolation money’로 번역한다. 일본에서 위자료는 많아야 수백만 엔 선에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 판결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영미권은 물론 일본과도 다르게 불륜에 따른 정신적 피해 배상 상한을 일거에 수백 배 올리겠다는 것인가? 성공 보수가 늘어날 변호사들만 좋아할 일이다. 불륜 피해자에게 거액 위자료를 주는 것이 대중의 법 감정에는 부합할지 모르나, 우리 사법 체계의 안정성 측면에서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판결이 걱정된다. 다툼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숙제를 던진 것 같다. 가사 문제만 고려하다 더 큰 문제들을 놓친 것은 아닐까? ‘더 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제 대법원이 현명한 해법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조선일보(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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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3800억’ 이혼으로 29년 만에 소환된 ‘노태우 비자금’
“1991년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부친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부친 고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측에 상당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2심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1조3800억 원 재산 분할’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 판결로 29년 전 한국 사회와 재계를 뒤흔들었던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재판부가 ‘상당한 규모의 자금 유입’ 근거로 본 건 노 관장의 어머니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온 선경건설(현 SK에코플랜트) 명의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실물 4장과 사진 2장이다. 김 여사는 1998, 1999년에 지인들에게 맡겨둔 비자금 내역도 따로 메모해 뒀다고 한다. 메모에는 ‘선경 300억 원’뿐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의 동생 노재우 씨 등의 이름과 액수, ‘맡긴 돈 667억+90억’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노 관장 측은 300억 원어치 어음이 돈을 맡기고 받은 일종의 ‘차용증’이라고 설명한다. 또 ‘친정’에서 유입된 300억 원이 SK그룹의 성장에 기여한 만큼 재산 분할에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최 회장 측은 “비자금을 받은 바 없고, 어음은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활동비를 지원하기 위해 건넨 것”이라는 입장이다. 재판부는 과거 비자금 사건 재판 때 밝혀진 내용과 김 여사 메모에 들어 있는 300억 원 외의 기록들이 여럿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노 관장 측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노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1988∼1993년) 중 대기업 회장들로부터 돈을 걷어 비밀자금을 조성한 사건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10월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된 128억2700만 원 계좌의 예금 조회표를 공개하며 ‘4000억 원 비자금설’을 폭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구속됐고, 12·12쿠데타 가담에 대한 수사까지 이어져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99년 특별사면을 받아 풀려났고, 일가는 이후 추징금을 완납했다.
▷이번 소송을 통해 300억 원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숨겨진 비자금이 더 있었는지 의혹이 제기된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해 불법 자금이란 점을 입증하기 어렵고, 수뢰죄 공소시효도 끝나 처벌, 환수는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고 해도 불법 비자금에서 파생된 재산을 이혼소송으로 분할하는 게 타당한지 논란이 일 수밖에 없다. 오래전 사돈 간에 오간 ‘부정한 돈’까지 들춰낸 대기업 총수 부부의 이혼 소송은 지켜보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동아일보(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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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도 재산 분할 대상인가… 대법서 다시 다툴 수도
-조선일보(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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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3800억 재산분할+20억 위자료’… 한국 역대 최대 이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2심에서 최 회장이 재산 1조3800억 원을 노 관장에게 나눠주고, 위자료 20억 원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의 합계 재산을 총 4조 원으로 보고 재산 형성 기여도 등을 반영해 각각 65%, 35%로 나누라는 게 판결의 핵심이다. 그대로 확정될 경우 한국의 이혼소송 사상 역대 최대의 재산 분할이 된다.
▷서울고등법원 가사2부가 어제 판결한 재산 분할액, 위자료는 1심보다 20배나 많다. 1심 판결은 재산 분할 665억 원, 위자료 1억 원이었다. 재산 분할액이 급증한 이유는 나눌 재산의 범위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1심은 최 회장이 보유한 그룹 지주회사 SK㈜ 지분은 분할 대상이 아니라고 봤는데 2심에서 뒤집혔다. 다만 지급은 지분이 아닌 현금으로 하도록 했다.
▷최 회장 보유 SK㈜ 주식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이번 소송의 최대 쟁점이다. 1심은 이 지분이 부친인 고 최종현 선대회장으로부터 최 회장이 증여·상속받은 ‘특유재산’이어서 나눌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2심은 노 관장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노 관장 부친인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보호막, 방패막이 역할을 하며 SK그룹의 성공적 경영 활동에 무형적 도움을 줬다”고 판단했다.
▷2015년 혼외자의 존재를 공개하면서 이혼 의사를 밝힌 최 회장은 2018년 2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당초 이혼에 반대하던 노 관장은 2019년 말 이혼을 받아들이는 대신 최 회장 보유 SK㈜ 지분의 절반과 위자료 3억 원을 요구했다. 노 관장 측은 1심에서 패소한 뒤 주식 대신 현금 2조 원과 위자료 30억 원으로 조건을 바꿨다.
▷2심 재판부는 위자료를 20억 원으로 높이면서 “혼인 파탄의 정신적 고통을 보상하기에 1억 원은 너무 적다”고 했다. 근거로 최 회장이 노 관장과 별거 후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과 관계 유지 등에 219억 원 이상을 지출한 점을 들었다. 재판부는 “최 회장이 소송 과정에서 부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상 초유의 이혼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건지가 관심사다. 최 회장은 SK㈜ 지분 17.7%와 비상장 계열사인 SK실트론 29.4% 등 2조 원어치가 넘는 주식을 갖고 있다. 현금 1조3800억 원을 마련하려고 일부 지분을 처분할 경우 그룹 지배구조에 구멍이 생길 우려가 있다. 어제 SK㈜ 주식은 경영권 분쟁 가능성 때문에 급등했다. 최 회장 측은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할 뜻을 밝혔다. 대기업 총수의 이혼소송이 한국 재계 2위 그룹의 미래를 흔들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동아일보(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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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재평가’와 ‘문재인 頌德碑’
[강천석 칼럼]
오늘 벌어 오늘 먹는 하루살이 날품팔이 대통령으론 나라 장래 없어
국민이 아무렇게 대통령 뽑으면 ‘국가 回復力’ 바닥나는 사태 닥쳐
우리는 미래의 시간을 ‘단기’ ‘중기(中期)’ ‘장기’라는 세 구획으로 구분한다. 대중은 단기적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떠내려간다. 예언자 흉내를 내는 허황된 정치인들은 민족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50년 100년 밖의 미래를 판다. 그러나 정치에서 의미 있는 시간은 ‘중기’다. 정책의 씨앗을 뿌리고 싹이 트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다. 대중은 더 지겨워한다. 이런 대중의 성화를 달래가면서 뿌리에 거름을 주고 미래를 바라보는 정치가 ‘중기의 정치’다. 언제부턴가 한국 대통령은 오늘 벌어 오늘 먹는 날품팔이가 되고 말았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위 곽상언 변호사가 2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위로하고 있다. 2021.10.29 /사진공동취재단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과오는 분명하다. 쿠데타 주모자(主謀者) 중 하나였고 광주를 탱크로 짓밟고 시민을 살상(殺傷)한 당시 군부 지휘부에 있었으며 대통령 재임 중에 막대한 비자금을 모았고 여러 비리(非理)에 연루됐다. 작고하기 전 가족을 통해 ‘저의 부족했던 점과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국민에게 전하는 말을 남긴 것도 이런 자신의 발자취를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만큼 후대의 국가 방향과 국민 생활을 바꿔놓은 대통령은 드물다. 국민들은 지금 매월 국민연금을 붓거나 타면서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연금 재원이 바닥날 걸 걱정한다. 국민연금은 노태우 시대에 만들어졌다. 건강보험이 처음 생겼을 무렵 병원에 가면 행색이 누추한 사람일수록 이마에 주름이 깊었다. 건보 미가입자(未加入者)는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보가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된 게 노태우 시대다. 오전에 부산·광주의 집을 나와 서울에서 일을 보고 오후에 귀가(歸家)하는 ‘전국 1일 생활권’ 시대를 당연하게 여긴다. 30년 전엔 이게 꿈 같은 이야기로 들렸다는 사실을 국민의 3분의 2는 모른다. 한국의 공기업 가운데 가장 자주 세계 1위로 꼽히는 게 인천공항이다. 고속전철과 인천공항은 노태우 시대에 첫 삽을 떴다. 정부가 올바른 정책을 세우기만 한다면 ‘미친 집값’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노태우 시대의 분당·일산 신도시 건설이다. 노 전 대통령은 10년·20년·30년 후 국민 생활을 바꾼 ‘중기형(中期型) 대통령’이었다.
한국 외교와 대북(對北) 정책의 역사는 노태우 이전(以前)과 이후(以後)로 뚜렷이 구분된다. 1990년대만 해도 김일성의 6·25 남침 계획을 승인하고 지원했던 소련·직접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던 중국과의 국교(國交) 수립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노태우 정부는 베를린 장벽 붕괴, 동구권 몰락, 소련의 개혁·개방, 실용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의 권력 장악이라는 세계사적 전환을 비집고 중국·소련과 외교 관계를 터 한국의 외교 영토를 단번에 세계로 확장했다. 남북한 동시 UN 가입도 그 연장선상에서 가능했다. 모든 남북 합의를 휴지장처럼 구겨 던지는 북한조차 필요할 때면 노태우 시대에 만든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들고 나온다.
군부독재 시대를 거친 나라는 군부가 물러나도 오랜 세월 쿠데타설(說)에 시달린다. 한국은 군부독재가 끝나고 나서 쿠데타설에 휩싸이지 않은 세계 유일의 나라다. 군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이 군부 독재의 뇌관을 제거하고 김영삼 시대에 폭탄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2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국회사진기자단
5년 단임 대통령직선제는 문재인 시대에 이르러 말기암(末期癌) 증세를 드러내고 있다. 나라 전체에 전이(轉移)돼 간단한 수술로는 도려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공수처·검찰·경찰이란 국가 공권력 시스템은 거짓말을 비명(悲鳴)처럼 내지르며 붕괴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집권당 대통령 후보 시절 ‘6·29 선언’과 후속된 개헌으로 탄생한 이른바 ‘87년 체제’가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시기와 맞물려 허물어지는 것은 묘(妙)한 인연이다.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4년 반을 돌아보는 마지막 국회 연설을 했다. ‘사과’도 ‘용서’도 없고 ‘자랑’만 가득했다. 시골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고을 수령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송덕비(頌德碑)’ 가운데 성한 비석이 드물다. 훗날 백성들이 비문(碑文)을 깎아내거나 허리를 동강내버렸기 때문이다. 떠난 후 남이 세워주는 비석만 오래가는 법이다.
나라는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가 아니다. 국가의 회복력(回復力)에는 한계가 있다. 날품팔이 하루살이 대통령도 국민이 뽑고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대통령도 국민이 뽑는다. 국민 노릇하기도 힘들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강천석 논설고문, 조선일보(2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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