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식 ‘他山之石’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정리한 토론술에 ‘딴소리 전술’이 있다. 질문이 불리하다 싶으면 살짝 옆길로 빠져 그럴듯하지만 의미 없는 말을 쏟아내다가 원하는 말을 하고 끝내는 것이다. 대중을 상대로 해선 잘 통한다. 그제 관훈토론회에서 이재명 후보에게 한 패널이 대장동 사건으로 구속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의 채용 경위를 물었다. 꺼리던 질문이었는데 길게 답해 모두 주목했다.

▶”공직자의 권한은 권한을 위임한 주권자 이익이 부합해야 한다”는 공직 철학에서 시작해 박근혜 정부 때 광화문 단식 농성, 성남시 화장실에 ‘부패 즉사, 청렴 영생’이란 글을 붙여놓고 직원들에게 청념 교육을 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완벽하지 못해서 부패에 오염된 휘하 임직원들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 제 부족함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걸 경험으로 삼아서 앞으로 엄정한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타산지석으로 삼겠다”며 답을 끝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은 ‘남의 잘못을 나의 반면교사로 삼는다’는 뜻이다. 대장동 사건은 이 후보 자신의 문제다. 그래서 ‘나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가 됐다’고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타산지석이라고 한다. 타산지석은 초등학생 한자 교재에 나온다.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자성어다. 이 후보가 몰랐을 리 없다. 즉답을 피하고 말을 돌리더니 결국 대장동 비리를 ‘남의 잘못’이라고 한 것이다. 그는 이날 “내가 뭘 잘못했나”라고도 했다.
▶이 후보는 국정감사에서 민간 개발업자에 대한 불신을 여러 번 얘기했다. “공중분해되고 패가망신하기 바랐다”고 했다. “성남도시개발공사가 대장동 사업을 직접 챙기고 민간에 절대 맡기지 말라고 지시했었다”고도 했다. 공익 환수 대목에선 자신이 다 챙긴 듯 말한다. 그런데 민간 업자들이 천문학적 이익을 가져간 문제만 나오면 달라진다. “내가 관여할 수 없고 그들이 알려줄 리 없고 실제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수천억원을 나눠 먹은 생각을 하면 정말로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자신이 다 했는데,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정감사가 끝나자 여당은 “이재명의 압승”이라고 했다. 실제로 생방송 당시 인터넷 실시간 게시판에는 이 후보를 응원하는 의견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그 후 여론조사를 보면 대장동 사건 책임자는 이 후보라고 지목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 핵심을 피하고, 말을 돌리고, 모순되는 말을 공격적으로 하고, 장광설로 대중을 현혹해도 본질은 어디 가지 않는다.
-선우정 논설위원, 조선일보(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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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재난기본소득, 그 달콤한 추억
냉면도 사먹고, 휘발유도 넣고 달달한 ‘돈맛’에 세금 걱정 잊어
그래도 국민적 각성 있어 다행… 전국민 재난지원금 찬성 22%뿐
10월에 경기도 재난기본소득을 신청하라는 문자가 왔다. 경기도에 살고는 있으나 신경 끄고 있었다. 무차별적 현금 살포에 수혜자로 참여하기 싫었다. 그러나 두어 차례 독촉 문자를 받고 보니 욕심과 호기심이 생겼다. 10월 25일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인터넷으로 재난기본소득 25만원을 신청했다. 처음엔 통장 잔고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서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그러다 동네 편의점에서 마스크, 콜라, 휴대폰 부속품 등을 사고 카드를 냈더니 바로 문자가 왔다. 방금 편의점 구매로 1만3500원이 기본소득에서 차감됐으며 잔액은 23만6500원이라고 찍혀 있었다. 그 뒤 동네에서 냉면을 사먹어도, 자동차에 휘발유를 주유해도, 기본소득에서 차감됐다. 은행 잔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제2차 경기도 재난 기본소득 온라인 신청 홍보물
25만원은 둘이서 칼국수나 만둣국처럼 가볍게 외식을 하면 10번쯤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금액이 재난소득에서 빠져나갈 때마다 문자를 받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비겁한 심정 변화가 생겼다. 모든 경기도민을 마취시키는 무차별적 포퓰리즘에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은 슬며시 사라지고, 대신 ‘공짜 돈’이 주는 달콤한 기분이 생기면서 재밌기까지 했다. 거저 얻는 ‘돈 맛’이 이런 건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결국 내가 냈던 세금이 나한테 되돌아오고 있다는, 제 살 뜯어먹고 있는 중이라는,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은 약해졌다. 경기도에서 서울 광화문 도심까지 광역버스로 출퇴근하면서 운전 기사가 크게 틀어놓는 라디오 방송도 이젠 참을 만했다. 신문 지면, 종편TV 시사 프로, 그리고 유튜브 방송을 통해 3각 파도로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비판하던 나도 물색없이 타락하고 있었다. 건강 재정, 건강 가계를 외쳤던 내 입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현금 지출보다 감정 지출이 더 두렵다. 돈이 들더라도 감정을 다치는 일은 피하려고 한다. 저임금 노동자보다 감정 노동자의 일터가 더 불행한 환경으로 소개되곤 한다. 그러나 둘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몇 푼 공짜 돈에 젖다 보면 그걸 설계한 사람에게 호감이 느껴지고, 퇴근길 행복이 보장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국민적 각성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찬성하는 비율은 22%에 불과하다. ‘추가 지급 자체를 반대한다’는 목소리도 47.7%나 됐다. 취약 계층만 선별 지급하라는 주장은 29.6%다. 국민 열에 여덟은 무차별 공짜 돈 살포에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을 역으로 파고들며 밑바닥부터 흔들어대는 쪽은 여당과 대선 후보들이다. 적자 국채 발행이 두 해 연속 100조가 넘든 말든 그들은 올해 내야 할 세금을 내년 봄까지 유예해주면서 또다시 현금 살포 헬기를 띄우고 있다. 여당 후보는 문 정부 퇴진 이전에 돈을 풀겠다는 것이고, 야당 후보는 집권하면 100일 이내에 풀겠다는 것이다. 여당은 무차별, 야당은 피해자 맞춤형 지원을 내세우고 있으나 재원 마련을 위해 ‘초과 세수’와 ‘국채 발행’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 같다.
지난 4·15 총선 때 우리는 ‘현금 살포’의 위력과 ‘코로나 사태’가 여당에 주는 프리미엄을 절절하게 경험했다. 이후 “선거 공약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느다랗게 들렸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는 온갖 독직 혐의로 권좌에서 물러나곤 했으나 그때마다 현금 살포 공약을 내세워 총리를 무려 3차례나 역임했다. 그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 지금 한국의 집권당과 대선 후보도 그럴 수 있다. 여야 후보들은 정해진 숫자의 유권자라고 하는 ‘제한된 상권’에서 어떻게든 시장점유율을 높이려고 목숨 건 전쟁을 벌일 것이다.
-김광일 논설위원, 조선일보(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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