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화해에 뒷짐 진 與野]
[5·18 단체와 계엄군 43년 만에 용서와 화해]
[5·18을 이용하는 게 누구인가]
[현대사 아픔과 갈등, 굴곡, 논란 안고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
[현대사의 상흔… 사죄 없이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
[육사 11기]
5·18 화해에 뒷짐 진 與野
약 20년 전 입대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내무반에서 각 잡고 앉아있는데 대구 출신 한 선임이 물었다. “야, 너 노무현 노씨지?”라며 온갖 욕설을 했다. 놀라서 “부모님 모두 경북 문경 사람”이라고 답했다. 며칠 뒤 광주 출신 선임이 TV를 보다가 “야, 너 노태우 노씨냐?”라며 거친 표현으로 몰아붙였다. 정신을 차리고 대답해 욕을 덜 먹을 수 있었다. “저는 광주 광산 노씨입니다.”

5·18 단체 관계자들이 지난달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해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다 숨진 계엄군 묘역에 참배하고 있다./김지호 기자
두 선임은 두 노(盧) 대통령에 대해 자기가 아는 것 말고 다른 의견은 아예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 둘은 툭하면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다. 그 사이의 후임들만 애먼 고생이었다. 쭉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 군이라는 ‘작은 한국 사회’에 들어가 처음으로 몸소 겪은 지역주의·정치 이념 갈등 사건이었다. 골이 그렇게 깊은 줄 미처 몰랐다. 취재를 하다 보면 이때의 기억이 종종 떠오른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지난달 17일 광주 5·18 관련 세 단체가 5·18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숨진 계엄군의 묘역을 공식 참배했다. 역사적인 일이었다. 5·18 희생자 측이 군경의 묘를 찾은 것은 1980년 5·18 발생 이후 43년 만이었다. 그냥 벌어진 게 아니다. 5·18 시민군 상황실장의 용서 메시지, 그리고 시민군을 진압한 특전사 대원들의 5·18 단체 사죄 방문 등 양측의 진심 어린 노력이 이어졌기에 가능했다. 5·18 부상자회 황일봉 회장은 통화에서 “명령을 따르다 숨진 이들도 피해자 아니겠느냐. 그간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얼마나 힘들었겠느냐”면서 “호국 영령과 5·18 민주 영령의 슬픔을 함께 풀어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의 참배가 용서와 화해, 그리고 국민 대통합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참배 당일은 물론 전후로 여야 정치권은 조용했다. 광주에 각별한 더불어민주당에서도, 그간 ‘서진(西進) 정책’을 강조하며 주목을 받은 국민의힘에서도 별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이번 오월 단체의 군경 참배에 대한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지난 대선 때 동서 화합을 강조했던 한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런 일이 있느냐”며 관심 자체가 없어 보였다. 5·18 민주화를 강조해온 한 매체는 ‘군경이 제대로 된 사죄도 안 한 상태에서 일부 5·18 간부들이 일방적으로 군경 묘역에 참배하는 것”이라며 되레 비판조로 기사를 썼다. 계엄군 특전사 측이 5·18 어머니회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사죄한 것에 대한 언급은 쏙 뺐다.
특전사 동지회는 이달 말 5·18 단체들의 안내를 받으며 5·18 민주 묘지를 공식 참배할 계획이다. 오월의 아픔은 여전하고, 양측의 참배 결정 과정도 부족했을 수 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의 용기 있는 발걸음을 격려해 주는 것이 5·18의 정신 아닐까.
-노석조 기자, 조선일보(2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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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단체와 계엄군 43년 만에 용서와 화해

5·18 단체가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중원을 찾아 5·18 당시 숨진 특전사와 경찰관 묘역을 참배했다. 이 자리에서 황일봉 5·18 부상자회 회장(오른쪽)이 헌화를 마친 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왼쪽은 정성국 5·18 공로자회 회장. /연합뉴스
5·18 부상자회·유족회·공로자회가 국립현충원을 찾아 5·18 때 순직한 계엄군과 경찰관 묘역을 참배했다. 이들은 5·18 민주화운동의 법적 대표성을 지닌 ‘3대 공법 단체’로 계엄군 묘소를 찾은 것은 5·18 후 43년 만에 처음이다. 특전사동지회 측은 5·18 유혈 진압에 대해 사죄했고 5·18 단체 임원들은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목숨을 잃은 사람도 피해자”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어 “오늘의 참배가 용서와 화해, 국민 대통합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번 행사는 5·18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 용서의 메시지를 내고 특전사 단체가 5·18 단체를 사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특전사 단체는 사죄하고 5·18 사적지를 청소했다. 또 5·18 어머니회를 찾아가 거듭 사죄하자 어머니들도 용서의 뜻을 밝혔다고 한다. 다음 달에는 특전사 동지회 임원과 당시 대원들이 5·18 민주묘지를 공식 참배하고 대국민 선언식을 가질 예정이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불행했던 역사를 보듬고 통합의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연 것이다. 최근 최원일 천안함장은 자신과 천안함 대원들을 폄훼했던 야당 인사가 무릎 꿇고 사과하자 그를 용서하고 설 선물까지 보냈다고 한다.
그동안 일부 여권 인사들은 5·18을 폄훼하는 발언으로 분노를 일으켰고 야권은 5·18이 자신들의 전유물인 양 이용했다. 천안함 폭침도 마찬가지였다. 대립과 갈등의 악순환은 이런 정치권 탓이 크다.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은 흑백 분리 정책의 피해자로 27년이나 감옥 생활을 했지만 가해자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용서했다. 이번 5·18 화해가 다른 역사적 갈등도 치유하는 시금석이 되길 기대한다.
-조선일보(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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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이용하는 게 누구인가
지난해 말 고시된 2022 개정 교육과정에 ‘5·18 민주화 운동’ 용어가 빠진 사실이 알려지자 4일 더불어민주당·정의당·무소속 국회의원 58명이 “심각한 민주주의 훼손”이라고 반발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정부가 노골적으로 5·18 지우기에 나섰다”고 했고, “실수라고 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박지원 전 국정원장), “구태의연한 보수 본색”(박용진 민주당 의원) 등 강도 높은 비판이 이어졌다.

5·18 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공로자회)가 4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8민주화운동이 제외된 개정 교육과정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2023.1.4 /연합뉴스
한마디로 “윤석열 정부가 일부러 그런 것 아니냐”는 식이다. 그런데 실상은 다르다. 문재인 정부 때인 작년 3월 역사과 교육과정 정책연구진이 교육부에 제출한 첫 중간보고서에서부터 5·18은 빠져 있었다. 2021년 12월 꾸려진 연구진은 전교조 연대 단체인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활동하는 교사들이 대다수다.
이들이 5·18을 뺀 이유는 교육과정 대강화(大綱化) 방침 때문이다. 교육부는 “이번 교육과정은 교사들에게 자율성을 주기 위해 역사적 사건을 일일이 적시하는 대신 대략적인 방향만 제시하는 기조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같은 이유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7·4 남북 공동 성명’ ‘북한의 사회주의 독재’ 등 대부분 사건과 키워드가 빠졌다.
더구나 5·18을 다시 넣을 기회는 그동안 여러 차례 있었다. 이번 개정 교육과정은 처음부터 ‘국민 참여형’으로 추진해 전에는 없던 대국민 의견 수렴 절차가 추가됐다. 교육부는 작년 8월 30일 ‘국민참여소통채널’이라는 홈페이지를 열고 교육과정 시안 전문을 전 국민에게 공개한 뒤 보름간 누구든 댓글을 달 수 있게 했다. ‘남침’과 ‘자유민주주의’ 등이 빠져 논란이 됐던 역사과 교육과정은 댓글이 많이 달렸지만, 5·18을 넣어야 한다는 의견은 없었다. 이어 9월 30일 역사과 교육과정 공청회, 10월 4일 교육부 국정감사, 11월 세 차례에 걸친 국가교육위원회 심의와 교육부 행정예고 과정에서도 5·18은 거론되지 않았다. 제주 4·3사건도 5·18처럼 빠졌지만 행정예고 기간 중 ‘넣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며 교육부가 반영하겠다고 조정 의견을 냈다. 이번 5·18 역시 교육부가 편찬준거에 포함해 교과서에 넣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무슨 정치적 의도로 뺀 게 아니라는 방증이다.
애초 5·18 누락을 지적한 강득구 민주당 의원은 “(5·18이) 빠진 걸 최근 알았다”고 했다. 전 정부에서 이미 빠졌다는 사실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정 “현 정부가 의도를 갖고 뺐다”고 호통 친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18 기념식에서 “자유와 정의, 진실을 사랑하는 우리 국민 모두는 광주 시민”이라고 했다. ‘오월(5·18) 정신’은 우리 모두의 유산이다. 특정 정치 세력 전유물이 아니다. 더 문제는 그들이 번번이 5·18을 정치적 공방 소재로 이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김은경 기자, 조선일보(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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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픔과 갈등, 굴곡, 논란 안고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

[서울=뉴시스] 백동현 기자=23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고 전두환 전 대통령 빈소가 마련돼 있다. (공동취재사진) 2021.11.23.
전두환 전 대통령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 명 예외없이 영욕이 교차한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 가운데에서도 전 전 대통령만큼 끊임없이 비판받고 마지막 순간까지 논란을 일으킨 경우는 없었다. 지난달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전 전 대통령까지 눈을 감으면서 격동의 현대사가 또 하나의 장을 넘기게 됐다.
전 전 대통령이 철권통치했던 8년(1980~1988년)은 정치적 억압과 권위주의 통치, 인권 탄압이 이어진 시기였다. 그는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 기반을 잡은 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며 집권했다. ‘80년의 봄’으로 상징됐던 민주화 바람은 그의 등장으로 싹이 꺾였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많은 시국 사범들이 잡혀가 옥고를 치렀다. 언론에 대해선 보도 통제와 사전 검열이 일상화됐다. 박종철·이한열 등 대학생들이 고문이나 시위 중에 숨졌다. 다만 경제적으로는 2차 오일쇼크의 경제 위기를 벗어나 1980년대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았다. 정치적으로 암울했지만, 단군 이래 처음이라는 ‘물가 안정’ 등 경제적으로는 발전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전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4년제 첫 기수(11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면서 군부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그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79년 10월 박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 보안사령관으로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전격 체포하면서다.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10·26 사건을 수사했고, 신군부를 규합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정 이양 요구를 외면한 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뒤 1980년 9월 장충체육관에서 관제 선거인단 투표로 11대 대통령에 올랐다. 곧이어 개헌을 통해 이듬해 3월 임기 7년의 간선제 대통령에 다시 취임했다. 이런 비민주적 집권은 재임 내내 정통성 시비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5·18은 전 전 대통령이 생을 마치는 날까지 그를 짓누르는 업보가 됐다. 그는 미얀마 방문 때 북한의 아웅산 테러로 정부 각료급 14명이 순국하는 참사도 겪었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연장 대신 육사 동기이자 쿠데타 동지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후계 자리를 넘겼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결단으로 국가적 파국을 피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 직선제 수용은 사실 자신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전 전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유혈 사태를 통해 권력을 잡고 폭압 체제로 국민을 억눌렀던 전 전 대통령은 권력을 순순히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예상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런 예상을 깨고 평화적 과정으로 권력을 이양해 우려됐던 국가적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단죄를 받았다. 5공 청산 청문회에 불려 나갔고 백담사에 유폐됐다. 김영삼 정부 때는 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 2200억원대 뇌물 비자금 조성 혐의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사면됐다. 전 전 대통령은 5·18 당시 계엄군에게 발포 지시를 내린 적이 없고 헬기 기총 사격도 없었다고 부인했다가 고령의 나이에도 법정에 나와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는 끝까지 5·18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남은 현금이 29만원뿐이라며 1600억원대 미납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텨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박근혜 정부 때 검찰 수사로 가족·친척 명의로 돼 있던 800억원대 재산이 압류됐지만 추징금 956억원은 내지 않은 채 남았다.
그의 집권기 경제적 성과는 좋았다. 1979년 박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중동 오일쇼크 여파로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발탁해 전권을 맡기는 등 경제 회생 정책으로 호황기를 만들었다. 유가·금리·환율 등 ‘3저(低)’ 호재가 겹치면서 수출이 날개를 달고 대기업들도 급성장했다.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에 가까웠고 물가도 안정됐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도 유치했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야간 통행 금지를 풀고 교복 자율화를 시행했다. 과외 금지 조치도 실시했다. 당시 경제 발전과 개방 정책으로 늘어난 중산층은 1980년대 말 민주화 요구를 분출시켰다.
지금 우리 사회는 좌우 진영과 지역, 계층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이 대립과 갈등이 격화된 출발점이 바로 전 전 대통령 집권 과정이었다. 이 갈등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 격동의 현대사 중심에 서있던 전 전 대통령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 점에서 전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떠난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5·18 희생자 중 한 사람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했다. 이제는 어두웠던 역사의 기억도 그와 함께 떠나보냈으면 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우리 사회도 대립과 갈등, 상처를 넘어서는 길로 가기를 바랄 뿐이다.
-조선일보(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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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상흔… 사죄 없이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제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채 한 달도 안 돼서다. 박정희 정권 몰락의 정국 혼란을 이용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던 신군부의 1, 2인자가 연달아 눈을 감은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유족을 통해 자신의 과오에 대해 “용서를 바란다”는 뜻을 남겼지만, 전 전 대통령은 끝까지 사죄하거나 참회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은 쿠데타와 광주학살, 강압통치로 우리 현대사에 깊은 상흔을 남긴 철권통치자였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짓밟고 만들어낸 신군부의 군정 연장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또다시 가로막았다. 대법원이 늦게나마 이들을 군사반란 및 내란죄로 단죄함으로써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다”는 준엄한 교훈을 역사에 새겼지만, 신군부의 권력 찬탈로 인해 한국 민주주의는 10년 이상 정체 내지 퇴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시절은 공포정치, 강권통치가 횡행했던 한국 정치의 암흑기였다.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의 하나로 설치한 삼청교육대는 인권 탄압의 대명사였다. 신문사 방송사 통신사를 강제로 통폐합하는 반민주적 조치도 그때 이뤄졌다. 1963년 개국해 방송 문화를 선도했던 동아방송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회 출신 정치군인들과 추종자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민의의 전당인 국회도 장악했다.
그의 통치 시기는 광주학살이라는 태생적 원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광주학살 진상 규명 및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고, 숱한 대학생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던 실로 어두운 시기였다. 정권 말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을 계기로 민주화 열망이 증폭되고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었다.
경제 분야에선 비교적 나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집권 초 어려웠던 경제 여건 속에서 먼저 물가를 안정시키고 뒤이어 경제성장도 함께 이뤄냈다.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으로 중화학공업에 과도하게 집중된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꿨다. 집권 후반기엔 때마침 세계적인 3저 호황(저달러, 저유가, 저금리)이 겹쳤다. 당시 고도성장엔 이런 외부 환경의 영향도 컸다.
그 과정에서 자라난 정경유착과 권력형 비리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대통령 재임 시절 재벌 총수들에게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지만 현재까지도 956억 원을 미납한 상태다. 그래놓고 왕년의 부하들과 골프를 즐기고 고급 호텔에 숙박하는 등 각종 구설에 오르면서도 예금통장에 29만 원밖에 없다고 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똑같은 뇌물 혐의로 2629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은 노 전 대통령은 늦게나마 완납했다.
권력의 공포를 국민에게 각인시키고 이를 통해 최고 권력을 만끽한 통치자였지만 퇴임 후 5공 청문회, 백담사 유배, 내란 수괴 구속, 무기징역 확정 판결 등 법적 정치적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사면으로 그의 실제 수감 기간은 약 2년에 그쳤지만 ‘학살자’ 낙인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남긴 정치적 공적으로 거론되는 7년 단임 약속 이행은 한국 정치사에서 평가가 갈리는 부분이다. 퇴임 이후 막후 실력자로 남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려 했고, 자신의 육사 동기이자 쿠데타 동료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이었다. 다만 당시까지는 전례가 없는 한국 정치사의 첫 평화적 정권 이양은 마성과도 같은 권력욕을 자제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는 마지막 유언 한마디 없이 떠났다. 유족 측은 “회고록 3권에 남긴 내용이 사실상 고인의 유언”이라고 했다. 그의 회고록은 반성 없는 자기변호로 가득 차 있다. 12·12를 ‘골리앗과 싸운 다윗의 전쟁’에 비유하며 반란의 진압이었을 뿐이라고 했고, 5·18에 대해서도 ‘신화처럼 굳어진 편견과 오해’라며 억울해했다. 2003년 한 방송에서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다.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했던 전 전 대통령은 한 차례도 5·18 유혈 진압의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를 역사의 전면에 끌어낸 것은 시대적 상황이었다”고 썼다. ‘시대의 악역’을 맡았을 뿐이란 항변이다. 그는 떠났지만 역사는 계속 물을 것이다. 그의 시기가 진정 불가피했느냐고, 자신이 벌인 일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한국 현대사에 독재의 깊은 상처를 남긴 채, 사과를 통해 국민과 역사에 참회할 마지막 기회마저 버리고 그는 떠났다.
-동아일보(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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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1기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오른쪽), 노태우 전 대통령. /조선일보 DB
1946년 개교한 육사 1~9기는 40여 일에서 6개월 교육만 받고 임관했다.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1949년 2년제로 입학한 10기(생도 1기)는 6·25가 터지자마자 전장에 투입됐다. 1950년 생도 2기는 입교 한 달 만에 참전해 동기생의 43%가 전사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1기 200명이 경남 진해에서 입학했다. 미 웨스트포인트를 본뜬 4년제 첫 정규 육사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제야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선배들과 달리 참전하지 않고 1955년 소위가 됐다.
▶육사 11기부터 미국으로 군사 유학을 갔다. 초급 장교 시절엔 군 부패 척결에도 앞장섰다. 집단적 엘리트 의식과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데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육사 생도의 지지 시위를 놓고 첫 분열이 생겼다. 전두환 대위 그룹은 시위 찬성, 육사 교수부의 동기들은 반대가 많았다.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11기인 전두환·김복동·손영길·최성택 소령, 노태우·권익현 대위 등을 군 요직에 기용했다. 11기가 주도한 군 내 사조직 ‘하나회’가 세력을 불려 나갔다.

▶1973년 4월 군 실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박정희 후계’ 등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박 대통령과 함께 11기를 총애하던 윤필용의 몰락으로 11기는 위기를 맞았다. 선두였던 손영길 준장과 권익현 대령 등이 ‘윤필용 사건’에 휘말려 군복을 벗어야 했다. 당시 보안사가 하나회를 이끌던 전두환 준장 등도 조사하려 했지만 권력 내부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파동에서 살아남은 11기가 신군부를 이끌며 1979년 12·12 쿠데타 주역이 된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 후 노태우 등이 군복을 벗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11기가 정치와 군으로 나눠졌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11기는 12년 넘게 군대는 물론 정치 권력의 핵심이었다. 11기인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은 국방장관을 거쳐 6공 때는 재선 의원을 했다. 중장으로 예편한 김복동도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 하나회 라이벌 ‘청죽회’ 출신인 이상훈도 국방장관을 했다.
▶노태우에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제 별세했다. 11기는 두 대통령을 포함해 대장을 5명 배출했다. 중장·소장만 20명에 달한다. 장관급과 국회의원도 수두룩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육사 11기만큼 권력의 영욕(榮辱)을 오래 겪은 집단도 없을 것이다. 70년 전 전쟁 중인 나라의 사관생도로 입교할 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역사의 페이지도 넘어가고 있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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