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힘은 지갑을 못 뚫는다]
[쑨원과 장제스를 사위로 둔 '宋家王朝']
[시안사변(西安事變)]
국가의 힘은 지갑을 못 뚫는다
[차현진의 돈과 세상]
중국의 우스갯소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술 담배를 하지 않은 임표는 63세에 죽고, 술은 멀리했지만 담배를 좋아한 모택동은 83세에 죽고, 술과 담배를 모두 즐긴 등소평은 93세에 죽고, 술과 담배에 여자까지 밝힌 장학량은 103세에 죽었다.” 중국 현대사의 풍운아 장학량(張學良), 즉 장쉐량은 영원한 로맨티스트로 기억된다.
청나라가 망한 뒤 만주를 지배하던 봉천 군벌 장쭤린(張作霖)이 1928년 열차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일본 관동군의 소행이었다. 그의 아들 장쉐량은 일본에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휘하 부대를 이끌고 아버지의 라이벌 장제스(蔣介石)의 부하가 되었다. 그런데 장제스는 대일 투쟁보다 공산당 토벌을 우선했다. 참다못한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한 뒤 공산당과 힘을 합해 항일 투쟁부터 할 것을 촉구했다. 1936년 시안(西安)사건이다.
장제스가 마지못해 그 요구에 응했다. 국공합작(國共合作)이었다. 덕분에 지리멸렬하던 공산당이 기사회생했다. 역사의 물꼬가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가 마오쩌뚱에게 패한 것이 장쉐량의 반란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패착이 많았고 그중에는 화폐제도의 혼선도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 정부는 은본위제도(1911년), 금본위제도(1928년), 은본위제도(1932년), 관리통화제도(1935년)를 오락가락했다. 일본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금본위제도에 뿌리를 둔 조선의 화폐를 통해 베이징 이북의 화폐제도를 장악했다.
민심을 잃으면 법화도 밀려난다. 20세기 초 중국이 그랬고, 지금 북한의 접경 지역이 그러하다. 그곳의 장마당에서는 미 달러화가 주된 지급 수단이다. 독재자의 절대 권력이 인민의 얄팍한 지갑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반란 직후 장쉐량은 가택 연금되었다. 사형을 면한 것은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장쉐량은 비서였던 어린 부인과 평생 붙어 있었다. 여복이 넘쳤던 장쉐량이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건을 일으켰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조선일보(2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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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과 장제스를 사위로 둔 '宋家王朝'
쑹아이링(宋靄齡), 쑹칭링(宋慶齡), 쑹메이링(宋美齡) 등 이른바 송씨 세 자매를 배출한 쑹자수(宋嘉樹·1861~1918) 가문은 중국 근대사에서 최고 명문가로 꼽힌다. 그의 본명은 한차오쑨(韓喬孫)인데, 미국에 살고 있던 외종숙인 쑹씨(宋氏)의 양자로 들어가 쑹자수로 개명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제1세대 중국 유학생인 쑹자수는 6명(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쑹아이링은 중국은행 총재를 지낸 거부 쿵샹시(孔祥熙)와, 쑹칭링은 신해혁명의 주역인 쑨원(孫文)과, 쑹메이링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각각 결혼했다. 세 자매는 각각 돈, 나라(중국), 권력을 상징한다. 또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장남(쑹자원)은 31세 때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부장과 외교부장을 지냈다.

1915년 10월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쑨원과 쑹칭링 부부.(왼쪽 사진) 미국 유학 시절의 세 자매, 왼쪽부터 쑹칭링, 쑹아이링, 쑹메이링.
쑹자수가 명문가를 이룬 데는 미국에서의 대학 교육, 기독교 수용, 차별 없는 혁명을 꿈꾼 쑨원과의 만남, 이 세 가지가 전기(轉機)로 작용했다. 그는 결혼도 대학 졸업 후 상해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다가 했다. 부부 모두 독실한 감리교도였는데 아무리 바빠도 밥상머리 자식 교육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중국인에게 꼭 필요한 선진적인 자질, 즉 시간 엄수와 솔직한 대화 태도, 효율적인 일 처리, 인맥이나 사회적 지위보다 능력과 개성을 중시하는 자세를 키워주려 했다.
또 바깥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큰딸 아이링을 1904년 중국 여성으로 처음 미국 유학을 보내 웨슬리언여대에 입학시켰다. 1908년에는 열다섯 살의 칭링이 열두 살짜리 동생 메이링을 데리고 도미 유학하도록 했다. 지성과 미모, 부를 겸비한 세 자매는 유학 후 귀국해 중국을 쥐락펴락하는 존재가 돼 '송가왕조(宋家王朝)'라는 말이 회자됐다.
이들보다 앞선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충신이자 당대의 경세가인 쩡궈판(曾國藩·1811~1872) 가문은 후난성 상향(湘鄕)에 명나라 때부터 살았다. 그러나 농업에만 종사했고 학문이나 과거로 이름을 남긴 이는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건달이었고 아버지인 쩡린수(曾麟書) 때에 과거 시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쩡린수는 아들 쩡궈판이 과거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직접 가숙(家塾)을 열어 가르쳤고 아들과 함께 시험공부를 했다. 그는 17번의 시도 끝에 43세 때 동생시에 합격해 아버지의 체면을 세웠고 쩡궈판은 이듬해 합격했다.
과거 시험을 보려고 상경해야 했던 쩡궈판은 여비(旅費)가 없어 친구들이 갹출해 준 돈으로 겨우 시험장에 갈 수 있었다. "이런 궁핍에서 벗어나려면 무조건 급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다짐한 그는 27세에 과거의 마지막 관문인 전시에 합격해 한림원 서길사(庶吉士·학문 탐구를 전문으로 하는 관직)에 임명됐다. 증자(曾子)의 70세손인 쩡궈판 가문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이 목표를 이루려면 '전략적 결정'을 잘 내려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게 관건이다. 쑹자수는 자녀들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인재로 키우기 위해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쩡궈판 가문은 아버지와 아들이 의기투합해 가난 탈출을 위해 과거시험 합격을 목표로 정하고 이를 관철했다. 중국의 이 두 가문은 새해 벽두에 좋은 가풍(家風)을 꿈꾸는 이들에게 부모와 자녀 또는 최소한 부부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이 '합심'해 내린 '전략적 결정'이 명문가의 요체임을 보여준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 소장, 조선일보(1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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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사변(西安事變)
공산독재자는 언제 화해를 외치고 언제 피를 부르는가
-장쉐량의 오판
부친이 日軍에 폭사 "공산당과 손 잡고 침략자 日부터 무찌르자"
-궤멸 직전의 마오… 再起
紅軍 5000명으로 급감, 산시성으로 쫓겨 목숨부지
장쉐량 끌어들여 장제스 잡게 한 후 勢 불려
-6년간 200만명 숙청
항일전쟁으로 지치고 부패한 국민당군과 내전…
결국 中대륙 삼킨 마오, 반대세력 무자비한 처형
지금부터 83년 전 중국 공산당 상황은 참혹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에 쫓기고 쫓겨 남동부 장시(江西)에 있던 근거지를 북서부 산시(陝西)로 옮기는 장정(長征·1934년 10월~1935년 10월) 중이었다.
8만5000여 명이던 홍군(紅軍·공산당 무장 세력)은 장정 직후 5000~7000명 선으로 급감했다. 궤멸은 시간문제였다. 마오쩌둥은 어떻게 이런 열세를 뒤집고 대륙을 집어삼키는 역전을 했나?
장제스가 국공(國共)합작 세력에 감금당한 시안사변(西安事變·1936년 12월 12일)이 그 분수령으로 꼽힌다. 마오는 사변 직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화해, 중국인의 단결 등을 외치며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톈안먼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1949년 10월 1일) 후 그는 표변했다. 6년에 걸쳐 자국민을 상대로 피의 숙청을 벌인 것이다.
시안사변은 경고한다. 압도적인 군사력도 경제적 우위도 최후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제 봉쇄와 군사 공격으로 궤멸 위기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먼저 내부를 안정시키고 이후 일본을 물리친다)의 기치를 내걸고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1931년 장시성에 수립된 중화 소비에트 정부를 비행기 150대와 최대 70만명의 국민당군으로 포위하고 대공격을 가했다. 1933년엔 홍군 소탕을 위해 소비에트 일대에 경제 봉쇄도 실시했다. 홍군 사령관 주더(朱德)의 목에는 포상금 10만위안이 걸렸다.
궤멸 위기에서 홍군은 1934년 10월, 장시성 탈출을 결행했다. 홍군 병사들은 국민당군의 공격 외에 발진티푸스와 설사에 시달렸다. 식량이 모자라 쥐를 잡아먹으며 산시성까지 1만5000㎞를 이동했다. 국민당군이 무서워서 후난(湖南) 방향 행군을 포기하고 구이저우(貴州)로 멀리 우회했다.
◇시안사변, 마오에게 '회생' 숨통 터주다
장쉐량(張學良)은 서북 지역 공산당소탕사령부의 부총사령이었으나 만주 군벌이던 아버지 장쭤린(張作霖)이 일본 관동군에게 폭사당한 뒤 공산당보다 일본에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장제스가 '최후의 5분'이라고 부른 멸공 작전을 고수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모두 중국인인데 왜 골육상쟁을 벌이는가. 공산당과의 협상은 불가능하지 않다."

①1930년대 초 난징의 쑨원 묘소를 참배한 장쉐량(앞줄 왼쪽)과 장제스(오른쪽). 만주 지역 군벌이었던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투항한 뒤 시안사변 직전까지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②일본 패망 다음 달인 1945년 9월 충칭에서 만난 마오쩌둥(왼쪽)과 장제스가 승리를 기념하는 축배를 들고 있다. 이후 국공합작은 깨지고 내전이 시작됐다. ③국공내전 초기에는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우세했다. 1947년 공산당 본거지인 옌안이 국민당군에 함락되자 마오쩌둥이 말을 타고 피신하고 있다. ④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톈안먼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그런 장쉐량에게 접근했다. 마오쩌둥은 "통일전선을 구축해 장쉐량의 부친을 죽인 일본 침략자들을 무찌르고 만주를 되찾자"고 꼬드겼다. 1936년 4월 장쉐량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비밀리에 만나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 노선을 걷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8개월 뒤 마침내 장쉐량은 총부리를 거꾸로 겨눴다.
12월12일 새벽 장쉐량의 부하들은 마침 시안을 방문해 화칭츠(華淸池·당태종과 양귀비의 겨울 휴양지)에 머물고 있던 장제스를 급습했다. '시안사변'이다. 빗발치듯 총성이 울렸고 호위병들이 거꾸러졌다. 놀란 장제스는 틀니도 챙기지 못하고 숙소 뒤편 3m 높이 담을 넘어 뒷산으로 도망쳤다. 담에서 뛰어내릴 때 다친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체포 당시 장쉐량 측 장교의 등에 업혀 하산한 장제스는 치욕과 분노에 떨며 소리쳤다. "나를 사살하라!"
장쉐량은 그를 감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언론에는 '모든 내전을 중지할 것' 등 8개 요구 조건을 발표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살해될 경우 역풍을 우려한 소련 코민테른이 중국 공산당에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닷새 뒤인 17일 저우언라이가 시안을 방문해 장쉐량에게 "8개 요구 조건 중 어느 정도만 약속받으면 장제스를 풀어주라"고 권고했다. 이어 장제스를 만나 "공산당은 당신의 영도하에 항일전을 수행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장제스는 12월 25일 석방돼 난징(南京)으로 돌아갔다.
시안사변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서 민족주의 불길이 타올랐다. 시안에선 시민과 학생, 군인들까지 '내전 중지' '항일 투쟁'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장제스는 억류 당시 어떠한 합의문에도 서명하지 않았으나 민심에 떠밀려 공산당 섬멸을 미뤄야 했다. 마오는 시간을 벌었다.
◇'중화민족끼리'로 200여만명 처형
기사회생한 마오쩌둥은 유화 공세를 한동안 지속했다. 온건 이미지를 심기 위해 지주들에 대한 학살을 중단했다. 산시성 주변 지방군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외국인 목사와 전도사를 초청해 종교 행사도 열었다. 그에게 중일전쟁은 또 한 번의 기회였다.
마오는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고 국민당군과 일본군이 싸우는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챙기는 데 힘썼다. "장제스와 연합해 항일전쟁에 나서라"는 스탈린의 요구도 묵살했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코민테른 총서기는 "중국을 점령한 외세와의 싸움을 소홀히 하고 거국적인 통일전선 정책을 명백하게 벗어났다"고 마오를 비난했다. 착실하게 세(勢)를 불린 홍군은 일본 패망에 즈음해 90만명의 대병력 무장 집단으로 발돋움했다. 이후 항일전쟁으로 지치고 부패한 국민당군과 내전을 벌여 승리했다.

중국 대륙을 석권한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 집권에 반대하고 정부의 대외정책을 공격하며 반혁명 청산운동을 공격하는 자들'을 적(敵)으로 규정하고 국민을 학살했다. 각 성(省)에 총살해야 할 반혁명분자 할당량이 정해졌다.
광둥에서는 1951년 4월 한 달에만 1만명 넘게 처형당했고, 5월에는 허난, 허베이, 후난, 광둥, 광시 등 중남부 지역에서 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오쩌둥은 1957년 "70만명이 죽고 250만명이 체포됐다"고 언급했다. 영국 역사학자 오드 아르네 베스타는 이보다 훨씬 많은 200만~250만명이 1949~1955년 사이에 처형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장제스의 아내 "그를 죽이진 말라"… 장쉐량, 아흔 넘어 軟禁 풀려나
1993년 리덩후이 총통이 해제, 하와이로 이주해 2001년 사망
장쉐량은 장제스를 풀어준 뒤 그를 따라 난징에 갔다가 곧장 연금당했다. 이 선택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장쉐량과 함께 시안사변을 일으킨 17로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은 국외로 도주했다가 "함께 일본을 물리치자"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고 돌아온 뒤, 국민당 비밀경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장제스의 아내 쑹메이링(宋美齡) 덕분에 장쉐량이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도 있다. 쑹은 결혼 전 잘생긴 유부남이던 장쉐량과 친밀했는데, 시안사변 후 남편에게 "장쉐량을 손대지 마라"고 당부했다는 것. 쑹메이링은 이후 장쉐량을 보살피며 옷을 선물하고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1937년 1월 장제스의 고향인 저장성 펑화(奉化)에서 시작된 장쉐량의 연금은 56년간 이어졌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쉐량은 "일본군과 싸우게 풀어 달라"는 편지를 장제스에게 보냈으나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니 독서에나 열중하라"는 차가운 답장을 받았다. 이후 대만으로 끌려간 장쉐량은 1954년 타이베이 교외에서 장제스와 17년 만에 재회했다. 장쉐량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시안사변을 참회하는 20만자의 '자아비판서'를 제출했지만 장제스는 끝내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1993년 리덩후이 대만 총통의 연금 해제 조치로 자유를 되찾은 장쉐량은 하와이로 이주해 2001년 100세(또는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고한 책: 장제스 평전(조너선 펜비), 마오(장융·존 핼리데이), 西安事變과 張學良(조일문), 잠 못 이루는 제국(오드 아르네 베스타), 중국인 이야기(김명호),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이유진)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조선일보(1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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