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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의 협상서 배운 교훈] [평양 화성지구의 한겨울 삽질 악몽]

뚝섬 2022. 3. 3. 06:38

북한과의 협상서 배운 교훈

 

[에릭 존의 窓]

1997년 제네바서 北과 협상 교착… 분위기 바꾸려 치즈 공장 초대
강한 발효 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北 대표단, 속 뒤집혀 역효과
정보뿐 아니라 문화적 요인도 협상에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해
 

 

미 국무부에서 마지막으로 맡았던 보직은 안보 협상 대사였다. 당시 호주, 필리핀과의 주요 방위 협정과 한국의 2014년 방위비 분담금에 관한 5년 특별협정 체결을 이끌었다.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회담도 총괄했다. 모든 협상에는 각기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비단 내용뿐 아니라 문화적 요인이 외교적 대화의 흐름에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협상을 통해 여러 교훈을 얻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문화에 대한 이해가 협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되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국무부 한국과에서 북한 담당 수석으로 재직했었다. 이때 북한과 수백 시간에 걸쳐 공식∙비공식 대화를 나누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당시에는 팀원 4명과 협상한 끝에 사상 최초로 북한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냈고, 빌 리처드슨 의원과 평양을 방문해 북한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에번 헌지커(Evan Hunziker)를 석방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미국 대표단 일원으로서 남∙북∙미 3자 대화와 중국을 포함한 후속 4자 대화에 참여했으며, 워싱턴 DC, 제네바, 뉴욕, 베를린, 평양, 버지니아 등 세계 각지에서 북한과 공식적∙비공식적인 만남을 가졌다. 외교 공관, 영빈관, 공항 라운지, 호텔(5성급부터 낡은 모텔까지), 커피숍, 레스토랑, 바, 박물관, 고성, 심지어 도심의 산책길에서도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과의 협상 경험을 통해 발견한 한 가지 ‘일반적인 오해’가 있다. 지난 몇 년간 북한 대표단이 협상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접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일상적인 대화에는 전술적으로 능할지 몰라도 성공을 담보하는 전략적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쩌면 미국과 북한 사이에 문화적 간극이 크고 그로 인한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97년, 한국전쟁의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제네바에서 일주일간 긴장감 넘치는 4자 대화가 열렸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교착 상태로 어두워진 분위기를 전환해보고자, 회의를 주최한 스위스 측은 토요일에 스위스 근교의 그뤼에르로 대표단 모두를 초대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뤼에르 성을 먼저 둘러본 뒤 그뤼에르 치즈 공장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우리는 치즈로 가득 찬 거대한 스테인리스 통을 내려다보며 발코니에서 치즈 생산 공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장인(匠人)이 서서히 치즈를 틀에 붓자 특유의 강한 발효 냄새가 외교관 30여 명의 코끝을 자극했다. 곧 북한 사람들이 한 명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치즈 제조 시연이 끝나고 점심 장소로 이동하는 버스에 오를 때에도 북한 대표단은 누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약속 시간이 몇 분 지나서야 스위스 측 인사가 다급하게 버스에 올라 북한 대표단이 탑승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치즈 냄새에 익숙지 않았던 북한 측 대표단은 속이 완전히 뒤집히고 만 것이었다. 대표단 간의 친목을 도모하겠다는 스위스의 의도와는 달리 북한 대표단으로서는 국제적인 무대에서 모욕감을 느낄 만한 불쾌한 상황을 맞은 것이었다. 이어진 점심 자리는 친목은커녕 매우 어색하고 비생산적이기 그지없었다. 북한 대표단은 침묵을 지키며 본인 앞에 놓인 음식만 먹었고, 나머지 대표단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무겁고 진중한 대화를 나누었다. 결국, 당일치기 그뤼에르 출장을 통해 가까워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일화로 알게 된 문화적 차이에 대한 교훈은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협상에 임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문화적 이해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면 선의라도 와전될 위험이 있다. 해외 언론은 치즈 공장 내부로는 출입이 불허됐지만, 그뤼에르 성을 나설 때 4국 대표단의 사진을 찍는 것은 허용되었다. 우리는 기분이 좋았던 찰나(물론 치즈 공장 파국 이전의 일이다) 성벽 외곽에 자리한 거대한 청동 방패 앞에서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협상 장소에 이르자 이 사진이 게재된 조간신문이 놓여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청동 방패에 전쟁의 신 마르스(Mars)가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뤼에르 출장을 통해 언제나 상대방의 문화를 충분히 숙지하라는 심오한 교훈을 배웠다.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前 주태국 미국 대사, 조선일보(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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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화성지구의 한겨울 삽질 악몽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지난달 13일 평양 화성지구에서 열린 주택 1만 채 착공식에 참석한 주민 수만 명이 각종 구호판을 들고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지난달 김정은은 평양 화성지구 1만 가구 주택 건설 착공식에 참석했다. 작년에 완공하겠다던 송신·송화지구 1만 가구 건설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또 새로운 공사판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화성지구는 평양에서 살았던 내게도 생소한 지명이다. 행사장 사진과 건설 조감도 등을 토대로 구글어스로 찾아보다가 소스라치게 과거의 악몽과 맞닥뜨리게 됐다. 김정은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저 장소, 순안공항으로 연결된 도로가 합장강과 만나는 저 지점은 26년 전 내가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을 뼈저리게 느낀 곳이다.

내가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5년 12월. 대학에 금수산기념궁전 건설 일환으로 합장강 정리 과제가 떨어졌다. 학년별로 3개월씩 나가 강바닥을 파내라는 것인데, 우리 학년 100여 명은 하필 제일 추운 겨울에 차출됐다. 대학 기숙사에서 공사 현장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어야 했다. 우리가 가진 작업 도구는 정, 해머, 삽, 곡괭이 따위가 전부였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장 먼저 휴식 공간으로 쓸 움막부터 만들었다. 언 땅에 정을 박고 교대로 해머를 휘둘러 봐야 흙이 겨우 밤톨만큼만 떨어져 나왔다. 작업 솜씨가 서툴러 정대를 잡았던 학생들이 해머에 손을 다치는 일도 잦았다. 갖은 고생 끝에 열흘 만에 겨우 기둥 몇 개를 세우고 수십 명이 빼곡히 들어갈 수 있는 움막을 만들었다.

다음 과제는 강바닥을 파내는 것인데, 이건 얼음을 깨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마대 하나에 흙을 채우는데, 네댓 명이 달라붙어 한나절씩 걸렸다. 100여 명이 동원됐지만 학생 간부라고 빠지고, 뇌물 주고 빠지고, 여자라고 봐주고 하다 보니 실제 일하는 사람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기라 식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강을 따라 부는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삐쩍 말라 허기진 젊은이들이 해머를 휘두르는 모습을 봤다면 누구나 시베리아 수용소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3개월 동안 겨우 강에 가로세로 5m 정도에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웅덩이를 하나 파놓았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도중에 최태복 노동당 교육비서가 벤츠를 타고 와서 직접 격려까지 했다. 동원 기간이 끝나가는데 과제 수행 목표치에 턱없이 미달하자 책임지고 나왔던 교수가 사색이 돼 뛰어다니더니, 몇 km 떨어진 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북한군 공병국에서 굴착기(포클레인) 1대를 한나절 빌려오기로 했다. 군인들은 대가로 디젤유 100L, 굴착기 바가지에 외제 담배와 밀주가 아닌 공장에서 제조한 술을 가득 채워줄 것을 요구했다. 교수는 학급 인원에 비례해 술, 담배를 분담시켰다.

 

철수하기 사흘 전쯤 군관 1명과 병사 1명이 굴착기를 몰고 나타났다. 그날 우리는 제방에 앉아 굴착기의 작업 모습을 지켜봤다.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우리가 석 달 동안 파놓은 웅덩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웅덩이가 생겨났다. 술, 담배를 가득 실은 바가지를 마대로 덮고 돌아가는 굴착기를 보며 우리 모두는 극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대학생 100명이 강추위에 벌벌 떨며 3개월 동안 한 일이 굴착기 반나절 작업량보다 가치가 없다는 것을 목도한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무지한 사회는 망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다음 날 갑자기 조선중앙TV 기자들이 왔다. 책임자의 요구대로 우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옷을 입은 채 가슴까지 차오르는 얼음물에 들어가 흙을 파내는 연기를 했다. 갈아입을 옷도 없어 모닥불로 얼어붙은 옷을 말렸다. 그날 저녁 중앙방송에 “김일성대 학생들이 충성의 마음을 안고 얼음물에 뛰어들어 강을 파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땐 평양도 늘 정전이라 대다수가 그걸 보진 못했다. 전기가 오는 중앙당 아파트에 사는 몇 명이 다음 날 어제 TV에 그럴듯하게 나왔다고 전해줬다. 그 후부터 TV에서 물에 뛰어들었다는 영웅적 뉴스가 나오면 하나도 믿지 않게 됐다.

우리가 얼음물에 뛰어들었던 그 합장강변에 지난달 수만 명의 청년이 다시 모였다. 내가 3개월 동안 언 땅에 삽질을 하던 그때쯤 태어난 청년들이다.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통치자가 바뀌었지만 고픈 배를 부여잡고 삽질하는 민초들의 삶은 한 세대가 지나도 변한 것이 없다. 화성지구 주택 건설 착공식 사진을 보며 26년 전 저 장소에서 “이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고, 또 망해야 돼”라고 분노했던 젊은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북한은 아직도 망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 언제까지 북한 청년들이 이런 삽질에 동원돼야 할까. 나의 분노도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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