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끝까지 겸손하고 끝까지 절박하고 끝까지 분투해도 승패는 미지수다
# 4419만7692명. 이번 20대 대선의 총 유권자(재외국민 포함) 수다. 언뜻 보면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결국 이 숫자의 흐름과 결집, 곧 떼놓고 합하고 모으며 흩뜨리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오늘 이 순간, 대한민국의 내일을 결정한다. 더구나 그 숫자가 그저 표(票)로만 보여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는 대상이 아니라 진심으로 돌보고 보호하며 섬기고 연대해야 할 살아있는 국민 한 분 한 분의 현신(現身)임을 뼛속까지 느끼며 끝까지 겸손하고 겸허하게 다가설 수 있어야 비로소 대권의 자리가 주어지는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선거에 임하며 그것도 선거 날에 코를 박듯 임박해서 아무리 여론조사 블랙아웃, 즉 깜깜이 기간이라 할지라도 단지 추측과 추론만으로 “많게는 10%포인트까지 차이가 날 수 있겠다”며 도전자 격인 야당의 당대표가 스스로 낙승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만한 바보짓이다. 히말라야의 8000m급 큰 산들을 오를 때도 내가 그것을 정복했다고 우쭐하고 자만하면 결국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오지만 “산이 나를 허락했을 뿐이다”라며 끝까지 스스로를 낮추는 자만이 정상에도 오를 수 있고 또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나! 자고로 선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 선거는 불쌍해야 이긴다. 박빙의 선거일수록 논리보다 정서다. 적어도 한국적 정서에서는 묘하게도 힘센 것보다는 얻어맞는 게, 번드르르한 것보다는 퍽퍽하고 빈티 나 보이는 것이 결국 이긴다. 잘났다고 고개 쳐들면 대개 진다. 그래서 내 잘난 맛의 ‘고정표’만 많고 내가 아쉬운 ‘동정표’가 적으면 대개 진다.
한 표 한 표 포개진 동정표가 쌓아놓은 고정표보다 나은 법이고 아무리 큰 선거에서도 동정표 없이는 이기기 어려운 것이 한 표의 숨은 마력이자 선거의 묘한 역설이다. 설사 내가 앞서 있다고 판단되어도 여전히 박빙이고 알 수 없으니 한 표라도 더 모아달라고 해야 이길 수 있는 것이 선거다. 대선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당대표의 입에서 이미 10%포인트 차이 난다고 동네방네 떠들면 자기편도 안심시키고 상대편은 되레 결집시키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나중지사 10%포인트 아니라 그 이상의 격차로 이길 때 이기더라도 선거에 초임박해서는 되레 “질 거 같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뭔가 더 절박하게 호소해 한 표라도 더해가는 것이 선거의 정석이란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 사실 오늘이 대선일이라지만 이미 지난 4일과 5일의 사전투표를 통해 총 유권자 중 3분의 1가량, 정확히 36.93%가 투표를 했으니 1632만2200여 명의 유권자가 이미 투표를 마친 것이다. 역대 가장 심한 ‘비호감 선거’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이처럼 사전투표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것을 두고도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
물론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사전투표와 본투표를 구분해야 할 이유 자체가 희박하고, 정작 공식 투표일에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라도 사전투표일에 기꺼이 한 표를 행사하려는 ‘투표의 일상화’가 나타난 것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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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권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632만명이 긴 줄 마다하지 않고 사전투표를 감행한 것은 일종의 ‘분노의 표심’ 같은 것이 작동한 결과가 아닐까 하고 보는 시각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분노의 표심에 대한 해석조차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정권 교체의 도도한 성난 민심이 표출된 것이라는 야권의 시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전투표 하루 전날인 지난 3일 새벽의 윤석열-안철수의 막판 단일화에 따른 위기감 내지 분노(?)가 민주당과 국민의당 지지자들의 표 결집을 이끌었다고 보는 여권의 시각이다.
하지만 정권 교체에 대해 가장 미온적인 호남의 사전투표율이 50%를 넘나드는 것을 보면 정권 교체의 성난 민심이 표출된 탓이란 야권의 시각에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텃밭이라 할 경기도가 사전투표율에서 가장 낮은 수치를 나타낸 것을 보면 윤석열-안철수의 막판 단일화에 따른 위기감이 초래한 표 결집 현상이라는 여권의 시각도 쉽게 수긍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기는 매한가지다.
결국 높은 사전투표율이 어느 쪽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자그마치 2787만4090명의 유권자가 오늘 본선거에서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대기 중이지 않은가. 역시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것이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 이런 와중에 사전투표에 참여했던 코로나 확진자와 격리자들이 민주주의 선거 행위의 기본인 비밀투표와 직접투표가 보장되지 않는 이른바 소쿠리, 우체국 택배 박스, 심지어 쓰레기 봉투에 자신들이 행사한 표를 넣도록 강요받아야 했던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21세기 선진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어졌다. 더 심각한 것은 추위에 떨며 받아든 투표용지가 이미 기표된 것이었다는, 정말이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상황이 전국 곳곳에서 적잖게 발생했음에도 선거 관리 당국은 명백한 해명과 재발 방지책을 내놓지 않은 채 그대로 본선거를 치르고 있지 않은가.
코로나에 확진돼 격리 중인데도 불구하고 불편함과 오랜 기다림조차 무릅쓰고 자신의 한 표를 기꺼이 행사하겠다고 나선 이들의 정당한 투표 권리가 비밀투표와 직접투표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조차 지켜질 수 없는 환경에서 무참히 훼손되었음은 물론, 이미 누군가에 의해 기표된 투표용지가 다시 또 다른 투표자의 손에 쥐여지는 정말이지 앞뒤 없는 선거 관리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국민적 권리다.
따라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대해 선거 관리 당국이 형식적인 해명과 사과에 그친 채 보다 분명한 재발 방지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개표 후에라도 선거 불복 사태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결국 개표 후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 여부가 이번 대선의 최대 고비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정말이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번 대선은 끝까지 알 수 없게 됐다. 정말이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조선일보(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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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는 오늘 밤 끝내라
당선일이 절정, 그 후로는 전쟁 같은 5년
국내외 여건상 전리품 잔치 벌일 여력 없어
이게 무슨 김새는 소리인가 할 수도 있겠다.
격전 끝에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는데 파티를 벌써 끝내라니. 아직 수저도 뜨지 않은 잔칫상과 선물 꾸러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텐데 말이다. 이 때문에 ‘선거가 끝났으니 민생에 집중하라’ 정도의 레토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이 이맘때 하는 말이 있다. 당선되는 날이 하이라이트이자 정점이고, 그날 후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고난이 도사리고 있는 내리막길이라고. 실제로 역대 대통령 당선인과 그 주변 세력들은 선거 후 실존적 고민을 주변에 토로하곤 했다. 이제 내 세상인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주변 사방 천지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2008년 취임 후 글로벌 금융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했다는 데 큰 이견은 없다. 그런 이 전 대통령은 당선 후 참모들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놨다고 한다. “내가 경제 대통령을 내걸고 당선되어서 사람들은 샴페인 터뜨릴 일만 있을 줄 알았을 텐데 막상 되고 보니 금융위기 때문에 나라가 거덜 나게 생겼더라. 그런 상황을 인수받았다.”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유가가 치솟고 서방과 경제 제재를 주고받는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 환경에서 새 당선인의 사정이 별반 다를 건 없을 것이다.
청와대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최대 7000여 자리에 대한 인사권은 가장 큰 전리품, 대선 파티의 메인 메뉴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막 휘두르면 어느 순간 스스로를 베는 양날의 칼이자,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다루면 알이 터져 전체로 독이 번지는 복어 같은 것이다. 승리에 취해 마구 주무르면 정권 전체를 망쳐버리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극적 파국은 최순실 때문이었지만 전조는 인수위 시절 잇따른 인사 헛발질이었다. 보안을 이유로 자기네들끼리 짬짜미한 황당한 인사 내용을 봉투에 밀봉했다가 공개하곤 했던 박 전 대통령은 결국 첫 국무총리 인사부터 어그러졌다. 선거 기간 역할에 걸맞은 자리를 달라며 들끓을 ‘파리 떼’들은 파티장이 아니라 정글에 막 들어섰음을 알려줄 것이다. 이명박 정부 탄생의 일등 공신이지만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뒤 정치의 덧없음을 몸소 보여줬던 고 정두언 전 의원은 2008년 2월 25일 새 정부가 출범하는 날 주변에 이런 이메일을 보냈다. “대선 뒤처리 중 제일 크고 힘든 일이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인사 등) 처우 문제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통 그 자체다. 오죽하면 낙선한 측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까. (중략)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부 인선은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은 권력이 오만하다 느껴지면 바로 등을 돌려 버린다.”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 탄생할 대통령 당선인은 누가 되더라도 며칠간은 몸을 낮추며 정치개혁이나 통합정부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면서 치열한 선거전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라도 승리의 파티를 즐길 준비를 은밀히 할지 모르겠다. 본인이 아니면 주변 측근들이 부추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외 여건을 봤을 때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선 직후부터 절제하지 않고 승리에 도취하면 임기 5년이 힘들어질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이다. 네거티브만 남은 최악의 대선을 거친 만큼 이제라도 진짜 일과 헌신의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성공한 대통령을 바란다면 승리의 의식은 오늘 밤으로 짧고 굵게 끝내야 한다.
-이승헌 부국장, 동아일보(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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