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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입성한 소련군, 광란의 복수극... 유럽 전체가 등돌렸다] ....

뚝섬 2022. 3. 29. 06:57

[베를린 입성한 소련군, 광란의 복수극… 유럽 전체가 등돌렸다]

[엇갈린 두 러시아 지휘자의 길]

[‘문재인 대통령님 귀하’ 국제인권단체가 보낸 공개 편지]

 

 

 

베를린 입성한 소련군, 광란의 복수극... 유럽 전체가 등돌렸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악을 악으로 갚은 2차대전 

 

1941년 6월, 히틀러는 2년 전에 스탈린과 체결했던 독·소불가침조약을 위반하고 180만 대군을 투입하여 소련을 기습했다. 그렇지만 두 달 안에 승리를 거둔다는 원래의 계획은 소련군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좌초했다. 1942년 11월 이후 소련군이 대반격을 가했다. 소련 영토를 완전히 회복한 후 동유럽 지역을 넘어 1945년 4월 베를린으로 진격하였고 5월 8일 나치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에서 대조국전쟁(大祖國戰爭)이라 부르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과정에서 소련군은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소련군은 독일군보다 무기와 보급 면에서 절대 열세였지만 인명 손실을 개의치 않고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독일로 진입한 소련군은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병사들은 제때 보급이 이뤄지지 않아 주변 농가에서 소나 돼지를 잡아먹으며 진군했다. 이들은 독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독일인들은 소련군을 만날까 봐 공포에 떨었다. 사진은 1945년 폐허가 된 베를린 의사당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소련군이 적기(赤旗)를 들고 있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독일군에 비해 무기와 보급 면에서 절대 열세인 소련군이 승리를 거둔 것은 인명 손실을 철저히 무시한 결과다. 소련군과 처음 조우한 미군은 소련군의 ‘원시적인’ 상태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 넝마와 같은 군복을 입었으며, 몇몇은 사복 차림에 군복을 반쯤 섞어 입었다. 철모를 쓴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은 짚 더미가 깔린 마차에서 잤으며, 몇몇은 말을 타고 졸고 있었다.” 소련군은 이때까지도 보급과 정찰을 말에 의존했고, 야포도 말이 견인하고 있었다. 보급 행렬은 살아있는 돼지와 닭이 가득 찬 수레로 이루어졌다. 그나마 제때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흔히 주변 농가에서 소나 돼지를 잡아먹으며 진군했다. 한 미군은 소련군이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인 야만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상태로 독일군과 계속 전투를 벌이며 2000㎞ 이상 걸어서 베를린까지 이동해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연대는 몇 차례나 ‘갈아엎었다.’ 즉, 많은 병사가 죽으면 신병으로 재편성하고 다시 와해되면 또 재편성하기를 거듭한 것이다.

 

소련군이 지뢰밭을 통과하는 방식을 주코프 원수가 설명해 주자 아이젠하워 장군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소련군 병사들은 “마치 지뢰가 없는 것처럼 전진”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인지뢰에 의한 희생이나 포격 혹은 기관총 사격에 의한 희생이나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소련군의 인명 손실은 미군에 비해 적어도 다섯 배 이상이었다. 소련군 장성들은 미군이나 영국군 장성들이 그들이 거둔 전과를 자랑할 때 코웃음을 쳤다. 몽고메리 원수 휘하 영국군 부대가 롬멜 장군의 독일군 부대와 엘알라메인 전투를 벌였을 때 양측은 병력 40만 명과 전차 1500대를 동원했고 사상자 4만 5000명이 발생했다. 반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양측 병력 210만 명, 전차 2000대가 동원되어 190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런 피해를 당하며 독일로 진격해 왔을 때 소련군의 복수심은 하늘을 찔렀다. 독일인의 집 안을 들여다보니 환상적으로 잘살았다. 식량 창고에는 훈제 고기, 말린 과일, 딸기잼 같은 게 가득했다. 이렇게 잘사는 민족이 왜 가난한 소련에 쳐들어와서 집과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단 말인가. 부러움은 곧 분노로 변했다. 소련군은 독일 마을에 들어오면 일단 집 안의 가구나 식기 같은 것들을 마당에 던져서 부수는 일부터 했다. 이어서 남은 물건들을 철저히 약탈했다. 1944년 12월 스탈린의 지시는 사실상 약탈 권유나 다름없는 내용이다. 일반 병사들은 매월 5㎏까지, 장교들은 10㎏까지, 장성들은 16㎏까지 가족들에게 짐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소련군 선전 전문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어디에서든 약탈이 자행됐다. 스튜드베이커(studebaker·미국이 소련군에 제공한 트럭)에는 지붕까지 약탈품이 가득 찼다. 여자들은 겁탈당했다. 원시적 폭력이 규율의 모든 제약을 찢어버렸다.

 

소련군은 보급과 정찰 수단으로 말을 주로 사용했다. 사진은 1945년 5월 마차와 트럭을 탄 소련군이 베를린 도심에 진입한 장면. /게티이미지코리아

 

모든 건물이 불타오르고 연기와 재로 어두워졌다. 벽이 무너지며 사람들을 깔아뭉개도 병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종군기자로 소련군 신문에 많은 칼럼을 게재한 문필가 일리야 예렌부르크는 병사들을 충동하는 글을 썼다. “날짜를 세지도 말고, 거리를 헤아리지도 말라. 그저 네가 죽인 독일인의 수만 세라. 어떤 자비도 베풀지 마라.” 많은 병사가 그의 말을 실천에 옮겼다.

 

청교도적 인물로 알려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밀로반 질라스는 스탈린을 만났을 때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 항의했다. 스탈린은 뜬금없이 도스토옙스키를 거론했다. “도스토옙스키 읽어보셨죠?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한 남자가 전우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체를 넘으며 스탈린그라드부터 베오그라드까지 수천㎞를 계속 싸우면서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행동하겠소?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여자와 재미 좀 보는 게 뭐가 그리 끔찍하겠소? 소련군이 이상적인 건 아니오. 가장 중요한 건 독일군과 잘 싸우는 일이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소.”

 

지도자의 정신 자세부터 이 모양이니 병사들이 무도한 행위를 일삼는 게 당연했다. 술에 취한 병사들의 야만적 행태를 장교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후 연구 결과에 의하면 독일 여성 200만명이 성폭행당했고, 수십만명이 자살했다. 동프로이센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1945년에 칼리닌그라드로 개칭)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1945년 4월 소련군이 인근 주류 공장을 습격한 후 완전히 취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병원에 들어와서 의사, 간호사, 환자 할 것 없이 모든 여성을 성폭행했다. 일부 여성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폭행당했고, 차라리 총으로 쏴달라고 애원했다. 베를린에 진군한 이후 시기는 차마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다. 소련군이 ‘프라우, 콤(Frau, komm. 아가씨, 이리 와)’ 하는 끔찍한 명령을 하면 지옥문이 열렸다.

 

독일군의 피해도 서부전선보다는 동부전선에서 훨씬 컸다. 1945년 1~5월 독일 본토에서 벌어진 공방전에서 죽은 독일군 병사 120만명 중 적어도 80만명이 소련군에게 죽었다. 소련 측 분석에 의하면 독일 병사들은 미군 앞에서는 기를 쓰고 투항하려 하고 소련군 앞에서는 기를 쓰고 저항했다. 병사나 민간인이나 소련군을 만날까 봐 공포에 떨었다. 미군이 독일 마을에 들어가면 마을 주민들은 “소련군이 오나요?” 하고 두려움에 떨며 물었고, 여자들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련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미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모두 안간힘을 썼다. 독일에 진군한 연합군 중 최전선에서 정찰 임무를 하던 미군 중위 코체뷰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어떻게든 소련군에게 잡히지 않고 미군에게 항복하려는 독일군들이 계속 달려들어 임무 수행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소대 36명이 독일군 355명을 무장해제했는데, 다른 독일 부상병 100명을 또 넘겨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피란민들은 압도적으로 한 방향으로 향했다.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여 갔다.

 

소련군이 왜 그런 악행을 저질렀는지 짐작 못 하는 바가 아니다. 소련군 800만명 이상이 전사했고, 민간인 희생자도 1600만명에 달한다. 이런 가공할 피해를 입힌 적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이 왜 생겨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적군을 죽인 숫자로 보면 소련군이 서방 측 연합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더 많다. 그렇지만 더 큰 맥락에서 볼 때 전쟁은 살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전후에 독일, 더 나아가서 유럽 전체의 신뢰를 얻는 데에 소련은 실패했다. 2차대전 이후 거의 80년 만에 유럽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리야 예렌부르크

 

일리야 예렌부르크(1891~1967)는 우크라이나 키이우 출신 유대인 문필가다. 파리로 망명하여 몇 권의 시집과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을 쓰던 그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소련군 신문 ‘적군(赤軍)’의 종군기자로서 2000편이 넘는 기사와 에세이를 썼다. 독일에 대한 복수를 외치는 그의 글은 병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쓴 소책자 ‘죽여라’에서는 이렇게 썼다. “독일인들은 인간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말하지 않겠다. 대신 죽이겠다. 하루에 독일 놈 하나도 못 죽이면 그날을 허비한 것이다. 한 놈을 죽였으면 또 죽여라. 독일 놈 시체 더미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 소련군이 독일로 진격해 들어간 이후 그의 글은 더 독해졌다. “독일 도시가 불타고 있다. 나는 행복하다. 독일, 너는 이제 포위되어 불타며 죽음의 고통 속에 신음한다. 복수의 시간이 왔다.” 후일 그는 민간인들에 대한 살상을 부추긴 게 아니라 오직 나치들을 처치하라는 의미였다고 변명했으나, 병사들은 민간인 학살을 허락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글이 나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정당해 보인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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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두 러시아 지휘자의 길 

 

최근 러시아 볼쇼이 극장에서 물러난 러시아 지휘자 투간 소키에프. 워너클래식스

 

러시아 음악사의 ‘산증인’ 같은 두 극장이 있다.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이다. 볼쇼이 극장은 차이콥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가 초연된 곳이다. 마찬가지로 마린스키 극장도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과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초연했다. 두 극장을 이끌어 온 러시아 명지휘자들이 볼쇼이의 투간 소키에프(44)와 마린스키의 발레리 게르기예프(68)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 지휘자의 선택은 달랐다.

 

소키에프는 볼쇼이 극장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최근 사임 성명을 발표하면서 “어떠한 갈등에도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흥미로운 건 그가 음악 감독을 맡았던 프랑스의 툴루즈 카피톨 국립 오케스트라에서도 함께 물러났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서구 사회는 러시아 예술가와 스포츠 스타들에게 푸틴 정권에 대한 찬반(贊反) 의사를 묻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러시아인들이 강한 압박을 느낀다는 사실이 소키에프의 사례에서 드러난다. 그는 “내 동료, 예술가, 배우, 성악가, 무용수들이 위협을 받거나 무례한 취급을 받는 걸 지켜보면서 견디기 힘들었다”는 말로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침략국의 국적(國籍)을 지니고 활동하는 예술가와 스포츠 스타들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소키에프의 사임은 ‘압력의 최대치’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진다. 반대로 ‘인내의 한계치’를 시험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마린스키 극장의 게르기예프다. 그는 러시아 침공 이후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때문에 에든버러 페스티벌 명예 회장, 뮌헨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 등 그가 맡았던 직위들도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게르기예프(오른쪽)가 2016년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한 시상식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축하를 받고 있다. /트위터 캡처

 

그런데도 게르기예프가 묵묵부답하는 이유가 있다. 사실상 푸틴 대통령과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최근 푸틴은 볼쇼이와 마린스키의 운영을 아예 통합해서 게르기예프에게 일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둘의 ‘밀월 관계’는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외관계위원장 등을 맡으며 정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게르기예프 역시 러시아 작품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바탕으로 세계 음악계에서 승승장구했다. 푸틴이 러시아의 새로운 ‘차르(황제)’라면, 게르기예프는 ‘음악 황제’와도 같았다.

 

게르기예프가 노골적으로 푸틴의 입장을 편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2012년 푸틴의 대통령 3선 도전 때는 선거 광고에 출연했고, 2014년 크림 반도 병합 당시에도 러시아를 옹호했다. 급기야 세계 음악계에서는 게르기예프 퇴출이 ‘푸틴 반대’의 동의어가 된 것이다.

 

게르기예프가 즐겨 연주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무려 872일간 지속됐던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다. 당시 러시아 주민들은 혹독한 굶주림 속에서도 도시를 지켜냈다. 이 레닌그라드가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이 교향곡이 위대한 이유는 침략자가 아니라 저항자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르기예프는 나치의 침공에 맞서 싸웠던 러시아가 지금은 침략자로 변모했다는 사실에는 애써 눈감는다. 앞으로 그가 어떤 명분으로 이 교향곡을 다시 지휘할 수 있을까.

 

예전 게르기예프와 전화 인터뷰를 할 때 푸틴과의 ‘밀월 관계’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음악 외적인 내용보다는 음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러시아의 침공 이전에는 그의 말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최소한의 유감 표명도 없다면, ‘러시아 음악 황제’의 퇴출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현 기자, 조선일보(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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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방 제재로 자산 압류” 우는소리 하는 푸틴 측근들. 가족 잃고 피란살이하는 우크라이나인 피눈물은 아는지.

 

-팔면봉, 조선일보(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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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님 귀하’ 국제인권단체가 보낸 공개 편지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 앞으로 공개 편지(open letter)를 보냈다. 김부겸 총리, 정의용 외교부 장관, 이인영 통일부 장관을 참조인으로 한 편지 내용은 이랬다.

 

“문재인 대통령님 귀하

 

6국 28개 비정부기구와 전 북한인권 특별보고관 등 4명의 개인을 대신해(on behalf of them) 귀 정부가 제49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연례 결의안 공동 제안 참여를 재개함으로써(resume the co-sponsorship of the annual resolution) 북한 내 끔찍한 인권 상황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하도록 촉구하려고(urge your government to act in response to the dire human rights situation) 이 서한을 보냅니다.

 

북한의 인권 유린 심각성(gravity)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는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엽기적 인권 침해를 조사해왔으며(investigate the ongoing systematic, widespread, and gross human rights violations), 북한이 정권 차원에서 절멸(絶滅·extermination), 살인(murder), 노예화(enslavement), 고문(torture), 투옥(imprisonment), 강간(rape) 및 성폭력(sexual violence), 강제 낙태(forced abortion), 정치·종교·인종·성별에 따른 박해(persecution), 강제 이주(forced transfer of populations), 고의적인 장기간 굶주림 방치라는 비인도적 행위(inhumane act of knowingly causing prolonged starvation) 등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고(commit crimes against humanity)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 인권이사회와 총회는 그러한 실태를 강력히 규탄하는(strongly condemn) 결의안을 채택해왔으며, 한국 역시 2008~2018년 매년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해 북한 내 인권 보호·향상 노력에 필수적 역할을 했었습니다(play an integral role). 그런데 2019년부터 귀 정부는 결의안 공동 제안을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평화와 번영을 통한 인권 개선 노력을 하겠노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책 아래 성취된 결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인권 대화를 배제한(exclude human rights dialogue) 협력 추구는 지속적인 평화를 얻어 내지(secure a durable peace) 못했고, 끔찍한 인권 유린에 대한 침묵으로만 이어졌습니다(lead to silence on its horrific violations).

 

노선 변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be crucial). 귀 정부가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 중대한 유린 행위를 저지른 자들에게 책임을 묻도록(hold accountable those responsible for grave abuses) 해야만 합니다. 대통령이 되시기 전에는 민주주의 투쟁 인권 변호사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시지(work tirelessly as a human rights lawyer) 않았습니까.

 

대통령님께서 임기 말 마지막 공식 활동 중 하나로 올해 대북 결의안 공동 제안에 참여하시어 북한의 중대한 인권 유린에 확고한 원칙적 자세를 보여주실(take a principled stance) 것을 부탁드립니다.”

 

[영문 참고자료 사이트]

☞ https://www.hrw.org/news/2022/03/24/letter-president-moon-jae-re-un-human-rights-councils-2022-resolution-situation

 

-윤희영 에디터, 조선일보(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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