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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가 힙합 배틀을 벌인다면]

뚝섬 2022. 4. 22. 06:35

/백악관 홈페이지 2009년 5월 백악관 '시, 음악, 구어(spoken words)의 밤' 행사에서 훗날 공연 역사를 바꿔놓을 뮤지컬 '해밀턴'의 오프닝 넘버 '알렉산더 해밀턴'을 노래하는 작곡·작사가이자 뮤지컬 배우 린-마누엘 미란다.

 

“요즘 실험적인 힙합 음악을 만들고 있습니다. 힙합 정신을 체현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죠. 미국의 초대 재무부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입니다.”

 

2009년 5월 12일 백악관에서 열린 ‘시와 음악의 밤’ 행사. 무대 위의 음악가·뮤지컬 배우 린-마누엘 미란다의 말에 관객은 폭소를 터뜨렸다. 대통령 버락 오바마 부부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해밀턴(1755~1804)은 제일 흔한 미국 돈 10달러 지폐 인물이자 미국 헌법과 금융시스템을 설계한 ‘건국의 아버지’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100원 동전의 이순신, 1000원 지폐의 율곡 이이가 도전과 변화, ‘힙합 정신의 상징’이라고 말한 셈이었다.

 

“여러분, 지금 웃으시는군요!” 미란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해밀턴은 카리브해 한구석에서 무일푼으로 태어났던 이민자였지만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이자 초대 재무장관이 됐죠. 그의 글과 말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미란다가 애절한 힙합 음률로 해밀턴의 생애를 압축한 노래를 시작했다. 관객들은 가사에 ‘알렉산더 해밀턴’이 나올 때마다 큰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노래가 끝났을 땐 환호하며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이제 살아있는 전설이다. 2015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해밀턴’은 세계 뮤지컬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돈이 있어도 표를 구할 수 없는 흥행작이자, 세계 뮤지컬 팬들이 평생 꼭 한번은 보는 게 소원인 작품이 됐다.

 

/위키피디아·디즈니+ 뮤지컬 '해밀턴'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을 연기했던 린-마누엘 미란다(왼쪽)와 실제 10달러 지폐의 해밀턴 초상.

 

최근 한 OTT에서 우리말 자막 서비스를 시작한 이 뮤지컬을 다시 봤다. ‘해밀턴’은 문화 콘텐츠가 사람과 사회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얼마나 바꿔 놓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교과서다. 미국 독립전쟁기의 영웅들은 성공을 향한 야심, 혁명과 건국의 비전에 기꺼이 목숨을 거는 피 끓는 청년들로 무대 위에 ‘환생’했다. 이들이 펄펄 살아 숨쉬며 ‘다시 꿈을 꾸라’고, ‘야망을 가지라’고 21세기의 미국 청년들을 일으켜 세운다.

 

무엇보다 해밀턴은 미국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다시 일깨웠다. 2016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11개 부문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을 때,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는 축하 영상을 보내 말했다. “7년 전엔 ‘힙합 정신을 체현한 해밀턴’이라는 말에 다들 웃었어요. 지금은 누가 웃을 수 있습니까. 이 작품은 미국이라는 기적에 관한 뮤지컬입니다. 포용과 다양성, 기회의 땅, 출신이 아무리 초라해도 노력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연방주의자 해밀턴과 맞섰던 미 건국의 영웅들처럼, 우리 역사에도 풍성한 이야기를 가진 인물이 가득하다. 상상해 본다. 광복을 맞았으나 지지리도 가난하고 이념으로 쪼개진 조국에서, 김구와 이승만이 건국의 이념과 미래를 논쟁하는 힙합 배틀을 벌인다면 어떨까.

 

지금의 ‘정치적 올바름’을 기준으로 미국 건국기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 여겼다면, 흑인과 라티노 배우들이 ‘건국의 아버지’들을 연기한 ‘해밀턴’은 태어날 수 없었다. 식민 지배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민주주의를 성취하며 선진국이 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뿐이다. 이제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억압과 피억압의 거친 이분법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자학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기생충’ ‘오징어게임’에 이어 미국의 한인 2~3세들이 주도한 ‘파친코’까지, 우리 민족의 DNA에 새겨진 듯한 스토리텔링 본능이 꽃을 피우고 있다. 이제 젊은이들을 다시 희망으로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를 보고 싶다. 자부심을 갖고 우리 역사를 다시 보게 하는 ‘한국의 해밀턴’을 만나고 싶다.

 

-이태훈 기자, 조선일보(2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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