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비호감 대선’

마크롱이 이긴 게 아니라 르펜이 진 선거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중도 성향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45)을 찍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마크롱이 좋아서가 아니라 마린 르펜 국민연합 대표가 싫어서”라고 한다. 마크롱도 당선 연설에서 “나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극우를 막기 위해 투표한 것 알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는 대통령의 연임을 축하하기보다 “극우를 막아냈다”는 데 안도하는 분위기다.
▷이번 대선은 ‘싫은 후보’와 ‘두려운 후보’가 경쟁하는 비호감 선거였다. 마크롱은 ‘싫은 후보’다. 2017년 정치 신인으로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돼 파란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젊은 꼰대’ 이미지가 강하다. 노동과 연금 개혁을 추진하고 감세 정책으로 기업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성과가 있었지만 ‘부자들만의 대통령’이라는 반대 여론도 컸다.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노란조끼’ 시위대를 강경 진압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의사 부부 아들로 태어나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데다 ‘노동개혁 반대자는 게으름뱅이’라는 실언들이 반복되면서 오만한 엘리트 이미지가 굳어졌다.
▷극우파 르펜은 ‘두려운 후보’다. 대표 공약이 불법 이주민 강제 추방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 금지, 일자리 주거 복지 정책에서 이주민 차별하기다. 생활 물가 안정과 사회보장 확대 등 친서민 공약으로 농촌과 블루칼라 민심도 잡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푸틴을 존경한다”는 과거 발언이 알려지고 소속 정당이 러시아 군수업체에서 160억 원을 빌린 사실이 드러나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는 결선투표제를 두고 있어 극단적 인물이 당선되기 어렵다. 1차 투표에선 마크롱과 르펜 간 표차가 미미했지만 결선에선 58.5% 대 41.5%로 17%포인트 벌어졌다. 르펜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도 딸보다 더한 인종주의자였는데 20년 전 결선에서 자크 시라크에 패배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극우를 막기 위해 투표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고 한다. 이번 선거에서 마크롱과 르펜의 표 차는 5년 전(32.2%포인트)에 비하면 반 토막이 났다.
▷르펜이 얻은 41.5%는 프랑스 역사상 극우 후보가 기록한 최고 득표율이다. 그만큼 프랑스가 우경화하고 있다. 프랑스는 서유럽 국가 중 무슬림 인구 비율이 8.8%로 가장 높다. 30년 후엔 20%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퓨리서치센터). 극우파가 진화하면서 극단적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서민층을 파고드는 점도 우려된다. 사회 분열을 치유하고 정치 불신을 해소하는 대책 없이는 ‘싫은 후보’와 ‘두려운 후보’ 중 덜 나쁜 쪽을 고르는 선거는 반복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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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진실이라는 궤변
[김대식의 메타버스 사피엔스]
21세기에 다시 핵전쟁의 두려움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러시아. 신기하고도 불안한 현실이다. 1990년대 초 구소련이 몰락하고 러시아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한국인들이 편하게 러시아로 관광과 유학을 가고, 러시아인들 역시 한국에서 사업과 관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러시아가 이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우리는 유럽 한복판에서 다시 최악의 도시전과 제노사이드(집단 살해)를 목격하고 있다. 어디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단순히 푸틴이라는 한 정치인이 이성을 잃은 걸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푸틴의 정책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러시아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Dugin). 최근 독일 언론에서 그의 믿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포스트모던 철학에 따르면 어차피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두긴은 주장한다. 모든 진실은 누군가의 믿음이다. 고로 러시아인들의 믿음은 러시아의 진실이고, 러시아인들의 행동은 러시아의 정의다. 미래 세상은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 미국, 유럽, 그리고 중국이 지배한다. 상대방 영토를 침략하면 핵전쟁이 날 수 있겠지만, 각자의 영향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개별 진실”과 “개별 정의”이기에,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자 정의라고 두긴은 주장한다. 결국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에 러시아가 간섭하지 않았듯이, 미국도 이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터무니없지만, 푸틴과 러시아 권력층, 그리고 많은 러시아 시민이 믿고 있기에 더욱 더 위험한 두긴의 철학. 현대판 라스푸틴이라고 하는 두긴의 궤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인터넷 정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가짜 뉴스가 늘어나기에 역설적으로 진실과 지식이 사라져가는 오늘날. 인류 보편적 가치와 객관적 진실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암흑한 21세기 미래를, 푸틴과 두긴은 우크라이나에서 미리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조선일보(2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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