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反지성주의에 맞설 건가
[朝鮮칼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反)지성주의와 투쟁을 선포했다. 지성의 힘으로 거짓을 물리치자는 취지에는 누구나 동의할 듯하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날마다 일어나는 ‘가짜 뉴스’의 폭풍과 ‘허위정보’의 해일에 맞서 싸울 수 있는가? 팬데믹보다 더 무서운 인포데믹(infodemic·전염병처럼 번지는 잘못된 정보의 확산)과의 투쟁이다. 지난 10여 년 한국 정치사를 돌아보면 IT 강국 대한민국의 인포데믹은 참담한 상황이다.
2008년 공영방송의 엉터리 탐사 보도가 광우병 파동의 불을 질렀다. 2010년 합조단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군사 테러였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했지만, 그해 9월까지 그 조사를 신뢰하는 국민은 32.5%에 그쳤다. 2016년 탄핵 정국에서 국회는 부정확한 언론 보도를 모아 소추안을 썼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특검의 청와대 압수 수색을 거부했다는 이유까지 들어 “헌법을 수호할 의지”가 없다며 대통령을 파면했는데, 상식적으로 직무 정지 상태의 대통령은 압수 수색을 거부할 권한이 없다. 헌재가 어떻게 그토록 기초적인 논리적 착오를 범할 수 있는가? 이 모두가 인포데믹이 한 사회의 ‘집단 지성’을 마비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례들이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는 ‘탈진실(脫眞實·post-truth)’의 시대를 살고 있다. ‘탈진실’이란 과학적 진리나 역사적 사실보다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가 대중의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21세기적 상황을 이른다. 인터넷 알고리즘에 따라 개개인은 미리 걸러진 정보만을 편식한다. 모두가 ‘메아리 방(echo chamber)’에 들어앉아 ‘거름 방울(filter bubble)’ 속에 갇힌 채 살고 있다. 그 결과 ‘보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는 반지성주의’의 유혹에 빠져든다.
계몽주의 시대 이래 인류는 이성의 힘으로 모순과 부조리, 미신과 맹신을 타파하고 합리의 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자유주의 사상가 밀(J.S. Mill·1806~1873)은 인류의 지성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제창했다. 미치광이의 궤변, 음모론자의 낭설, 불온한 자의 도발일지라도 그 모든 생각들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어야만, 인류는 정교한 반박 논리를 만들어 진리에 근접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자유민주주의는 그렇게 초창기부터 과학적 방법과 전문 지식이 지배하는 ‘진실의 정권(regime of truth)’을 지향했다. 공화국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론의 포럼이 진실을 밝히고 전파하는 ‘상식(sensus communis)’의 보루였다. 21세기 인포데믹 속에서 바로 그 진실의 정권이 붕괴 조짐을 보인다. 표현의 자유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보장한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이 무너지고 있다. 오늘날 누가 인간을 합리적 존재라 단언할 수 있는가?
2018년 1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가짜 뉴스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며 강력한 제재 법안을 예고했다. 4년 후인 2022년 1월, 재선을 3개월 앞두고 마크롱 대통령은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에 대한 법적 조치를 강화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정부가 인포데믹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순진하게 느껴진다. 열린 사회에서 정부에 의한 가짜 뉴스의 통제는 큰 효력이 없다. 일당독재의 국가 중국처럼 인터넷 관리원 100만명을 고용하고 1000만명의 자원자를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짜 뉴스의 생산 주체는 단순한 일탈자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는 신념 집단이라는 점도 이 싸움을 어렵게 한다.
윤 대통령은 반지성주의와의 투쟁을 강조했지만, 여론 시장을 법적 제재로 교정할 순 없다. 결국 시민사회가 나서서 거짓과 허위에 맞서는 견고한 논리의 방화벽을 세워야만 한다. 대통령 역시 한 명 시민으로서 법이 아니라 논리의 힘으로 반지성주의와의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 대변인 뒤에 숨거나 ‘A4 원고’만 읽지 말고, 국민 앞에 서서 육성으로 국정 현안을 설명하고 정부 정책을 홍보해야 한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2년 임기 내내 총 881회, 월 평균 6회의 기자회견을 했다. 험난한 반지성주의와의 투쟁을 대통령이 매월 최소 1회 이상의 기자회견으로 이끌어 달라. 대통령의 머리는 시민사회의 지성이며, 대통령의 입은 초대형 스피커다. 머리가 둔해지고 스피커가 고장 나면,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가 판친다. 지난 10여 년 한국의 인포데믹이 일깨우는 섬뜩한 교훈이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역사학, 조선일보(22-05-18)-
______________________
이재명의 反지성, 윤석열의 半지성
[송평인 칼럼]
이재명의 주도권과 검수완박, 민주당의 반지성주의 보여줘
윤석열도 반지성 비판했지만 본인은 과연 지성적인지 의문

미국 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1963년 ‘미국의 반(反)지성주의’란 책에서 미국이 유럽에 비해 반지성적이라고 보면서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요인 중 하나로 다수 의사의 단순한 관철을 민주주의로 보는 선동정치를 들었다.
호프스태터는 미국 정치사에서 반지성주의를 조장한 인물 중 하나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꼽는다. 브라이언은 1896년, 1900년, 1908년 세 차례 민주당 대선 후보로 뽑혔으나 공화당 후보에게 모두 패했다. 금(金)본위제를 비판하는 그의 ‘금십자가 연설(금십자가에 농민을 못 박았다는 연설)’은 경제적 약자인 농민들의 이익을 우선한 것이지만 그의 주장대로 금본위제 대신 은화(銀貨)의 자유주조권이 허용됐다면 20세기 경제대국 미국은 없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연이은 패배를 겪은 후 1912년 대선에서야 대학 총장 출신의 우드로 윌슨을 후보로 내세워 당선시키면서 급진파들의 장악에서 벗어났다.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 후보로 첫 집권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만 해도 자신과 당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를 우선했다. 그러나 이후 브라이언의 등장으로 민주당은 약 20년간 혼란을 겪었다. 윌슨, 루스벨트, 케네디, 클린턴, 오바마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 민주당의 전통은 브라이언의 선동정치를 극복하고 난 뒤에 확립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수의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말했다. 호프스태터라면 “다수의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민주주의가 반지성주의를 조장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국회에서 다수인 더불어민주당이 숙의는커녕 숙의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고 자당 의원을 무소속으로 빼내면서까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통과시킨 과정은 반지성적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올 3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온 이재명 전 경기지사는 ‘기본소득론’ 같은 선동적 주장을 펴다 패한 정치가라는 점에서 한국판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라고 할 만하다. 민주당이 이 전 지사를 대선 후보로 뽑은 것과 최근 검수완박 법안의 강행은 그 성격이 다르지 않다. 민주당은 반지성주의의 긴 혼란기를 지나고 있다. 한국 정당 정치의 발전은 민주당이 언제쯤 급진파들에서 벗어나 윌슨 같은 합리적 인물을 당을 이끌 후보로 뽑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
호프스태터는 지성(intellect)과 지적 능력(intelligence)을 구별한다.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사법시험에 일찍 합격하는 것은 지적 능력을 보장할지언정 지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지성은 어떤 사안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일반화해서 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 큰 틀 속에서 한발 앞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다.
지성보다 직관(intuition)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호프스태터는 민주주의를 이용한 선동정치 외에도 기독교 복음주의와 기업의 실용주의 정신을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열성적인 기독교인과 실용적인 기업가 중에는 직관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다. 기독교와 기업가 정신은 그 자체로는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줬듯 그것이 반지성주의와 연결되면 큰 해악이 될 수 있다.
대선 운동 당시 손에 왕(王)자를 그리고 TV 토론에 나온 윤 대통령은 얼마나 지성적인가. 윤 대통령 부부에게서 사업이나 관직의 성공과 무속적 신앙의 기이한 병존이 목격됐다.
대통령집무실의 광화문 이전 약속을 하루아침에 용산으로 바꾼 것은 약속 내용의 중대한 변경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전을 결정한 쪽은 성공을 장담하지만 세심한 검토를 거친 것이 아니어서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이런 결정은 직관적일 수는 있어도 지성적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직관은 신비적인 구석까지 있다. 부인이 무속인과 전화통화를 할 때 ‘조국이 대통령 될 것 같으냐’고 물어보라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누구 것이었던가. 출퇴근하면서까지 청와대에서는 하루도 안 살겠다는 비상식적 고집은 과연 무속과 무관한가. 상대편의 반지성주의를 비판하기 전에 본인의 지성부터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동아일보(22-05-18)-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時事-萬物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깜깜이 교육감, 무투표 구의원’ 엉터리 선거 이번으로 끝내야] (0) | 2022.05.19 |
|---|---|
| [‘노’라고 말할 참모가 없다면… ] [尹, 협치 강조한 다음날 한동훈 임명… ] .... (0) | 2022.05.18 |
| [대통령과 與 전원 5·18 참석, 소모적 갈등 끊고 국민 통합 계기로] (0) | 2022.05.18 |
| [투쟁 앞세운 野 의장 후보들, 국회 이끌 자격 없다] (0) | 2022.05.18 |
| [현실화한 북한의 전술핵 위협… ‘한국판 맨해튼 계획’이 필요하다] (0) | 2022.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