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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敵, 팬덤 정치와 반지성주의] [우리 모두의 ‘임’을 위한 행진곡.. ] ....

뚝섬 2022. 5. 27. 06:18

[민주주의의 적(敵), 팬덤 정치와 반지성주의] 

[우리 모두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하여] 

[지성의 시대] 

 

 

 

민주주의의 적(敵), 팬덤 정치와 반지성주의

 

[윤평중 칼럼] 

 

더불어민주당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하 박지현)이 팬덤 정치 비판의 최전선에 나섰다. ‘당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신과 다른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 팬덤 정치 때문에 지난 대선에서 심판받았다’는 그의 진단은 정곡을 찔렀다. 하지만 박지현은 비난의 십자포화에 포위돼 일방적으로 난타당하고 있다. 지금의 민주당엔 현실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지성주의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민주당의 몰락은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를 외치는 대중의 맹종(盲從)에서 비롯되었다. 문빠들의 절대적 옹위 속에서 ‘우리 이니’가 하고 싶은 대로 했기에 민생은 파탄 나고 나라는 벼랑 끝에 섰다.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대국민 호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스1

 

본격적 팬덤 정치는 노무현 전(前) 대통령 때 시작되었으며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노사모와 박사모의 출현이다. 대중 정치인에겐 열광적 지지자들보다 든든한 자산도 드물다. 시민사회의 자발적 정치 참여는 민주주의 활성화에도 도움을 준다. 그러나 강성 정치 팬덤은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를 키워 민주주의를 좀먹기 시작한다. 문빠나 박빠처럼 과격한 팬덤은 파멸의 씨앗이 된다.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이 ‘재명 아빠’를 지킨다며 ‘개딸·양아들·개삼촌’을 자처하는 건 팬덤 정치가 정치적 부족주의로 타락하는 위태로운 징후이다.

 

팬덤 정치의 어원(語源)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유가 숨어 있다. 특정 대상에게 열광하는 팬덤(fandom)에서 영지(領地)를 의미하는 접미사 ‘덤’(-dom) 앞의 ‘팬’(fan)은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에서 왔다. 방탄소년단 아미(ARMY) 같은 연예인 팬덤이 무해(無害)한 데 비해 현실 정치인을 선과 정의의 화신으로 추앙하는 정치 팬덤은 광신(狂信)과 직결된다. 선악 이분법의 진영 논리로 무장해 정치를 정의와 불의가 대결하는 전쟁 정치로 몰아가 공동체를 황폐화하기 때문이다. 폭력적 반지성주의를 부추기는 팬덤 정치는 파시즘으로 가는 초대장이다. 그게 바로 문 정권 내내 진영 간 증오와 적대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초상이었다.

 

정치적 우상 숭배(idolatry)는 팬덤 정치의 자양분이다. ‘아이돌’(idol·우상)은 원래 연예인을 지칭하는데, 정치가 연예화하면서 정치인도 덩달아 우상이 된다. 정치가 신앙 고백으로 변질되고, 우상이 된 정치인에 대한 어떠한 비판이나 검증도 불경(不敬)이나 신성모독으로 비난받게 된다. 조국 일가의 온갖 불법과 거짓이 대법원 최종심에서 증명되었어도 추종자들이 조국 전 장관을 박해받은 의인(義人)으로 그리는 게 생생한 증거다.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고통의 나락에 빠트린 문재인 정권을 체험했으면서도 문빠들의 익애(溺愛)는 요지부동이다. 논리도 합리적 이유도 없는 반지성주의 정치가 보여주는 막장의 풍경이다.

 

팬덤 정치 최악의 폐해는 사실과 진실을 초토화한 데 있다. ‘대안적 사실’(실제로는 거짓)의 성채 위에 쌓은 자신들만의 허위의 왕국에서 보편적 지성과 합리성은 증오 대상으로 전락한다.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자신들의 편향된 입장에 맞게 처리하는 ‘편향 동화(biased assimilation)’가 극성을 부리면서 ‘집단 극단화’ 현상이 심화된다. 극단으로 치닫는 팬덤의 맹신 앞에 과학적 사실과 진실은 무의미하게 된다. 21세기에 중세 암흑기가 재현되는 꼴이다.

 

문재인 정부 5년은 팬덤 정치와 반지성주의 진영 논리가 폭민정(mobocracy)으로 질주한 암흑의 시대였다. 더욱 끔찍한 것은 정치권력과 한 몸이 된 지식인들이 궤변과 요설(妖說)로 팬덤 정치에 앞장서며 사실과 진실을 파괴했다는 점이다. 권력이 던져준 떡고물에 취한 어용 지식인들은 지식인의 최후 거소(居所)인 언어의 진실성과 공공성을 해체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지식인의 존재 근거인 비판적 지성주의를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숙제가 되었다.

 

청년 정치인 박지현은 조국·정경심 교수의 대(對)국민 사과를 촉구해 민주당 팬덤의 총공격을 받았다. 공정과 상식이 웃음거리가 된 치욕의 순간이었다. 이제 박지현은 자신을 발탁한 이재명의 반동적 정치 팬덤과 싸워야 한다. 팬덤 정치와 반지성주의는 민주공화국의 적이기 때문이다. 지성의 원천인 사실과 합리성에 대한 존중 없이 민주주의는 실현 불가능하다. 정치 팬덤의 우상은 어두운 시대의 급소다. 그 우상을 망치로 부수는 자(者)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다.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정치철학, 조선일보(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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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하여

 

그게 뭐라고 그동안 그렇게 맞섰을까. 합창이냐 제창이냐를 놓고 그동안 온갖 촌극을 연출했던 5·18 기념식에 보수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민주의 문’으로 입장해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엉킨 실타래를 자르고 매듭지었다. 기념사는 “우리 모두가 광주 시민”이라는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며 광주의 정신을 자유, 민주, 인권의 보편적 가치로 끌어올렸고, 덩달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누구나 힘차게 불러도 좋을 노래로 위상이 달라졌다. 윤 대통령이 한 일은 ‘임’을 재정의(redefine)해준 것이다. 단어의 궤도를 수정해 문제를 해결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동안 광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임’의 종북(從北) 혐의 때문이다. 알려지기로는 북한에서 이 노래를 1991년 황석영-리춘구 공동 집필로 제작한 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에 배경음악으로 사용했고, 북한의 혁명 가요집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이 곡이 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애국가를 대체하는 혁명 선동가로 애창되며 각종 시위대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건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일부에선 이 곡을 국가 기념곡으로 지정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는데, 기념곡이 되면 초·중·고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 차세대 투사를 양성하는 의식화 교육의 주제곡으로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자연히 뒤따랐다. 사정이 그러하니 1997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정부 공식 행사로 지정되면서 8년간 제창되다가 2009년 공식 행사 지위에서 내려오며 제창 아닌 합창으로 대체되었고, 2011년 공식적 지위는 회복했으나 제창은 불허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 후 행사 때마다 보훈처장이 쫓겨나고 총리는 입을 다무는, 불편한 장면이 언론을 장식하곤 했다. 윤 대통령이 한 일은 그런 ‘임’의 좌표를 북한에서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임’의 좌표를 바꿨다기보다는 새롭게 주장했다는 표현이 맞는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무엇을 상상하며 부르는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다만 앞으로는 자유 민주 같은 대한민국의 보편적 가치를 상상하자는 윤 대통령의 희망이 반영된 기념사요, 제창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의 사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으며, 현실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다. 당장 각기 다른 ‘임’을 추종하는 정치권의 분열된 지형이 대한민국을 탁류처럼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는 끝났지만, 은밀하고 속 깊은 문화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 최전선에 단어를 약탈하고 왜곡하고 물타기하는 프레임 전쟁이 있다. 권력은 놓쳤지만 새로운 권력에 결코 동의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저항 언어가 공론장을 맴돈다. 대선 결과에 불만인 사람들이 ‘석렬하다(망칠 것을 예상했으나 정작 망친 뒤 애석함을 담아 평가하는 말)’는 신조어를 네이버 오픈사전에 올리자, 반대편 지지자들도 ‘재명하다(너그러워 보이지만 속은 얍삽하고 오만하다)’는 또 다른 신조어로 맞받았다. 정치 신조어 사전에서 ‘정숙하다’는 ‘관광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비방을 목적으로 만든 이런 단어가 네이버 오픈사전에 정식 등재될 가능성은 없으나,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듯, 사전에 없는 단어라고 쓰이지 말란 법이 없다.

 

사람의 이름(고유명사)을 보통명사화한 이런 말을 엔도님(endonym)이라고 하는데, ‘색소폰’ ‘니코틴’ ‘쇼비니즘’ ‘디젤’ ‘린치’ ‘고어텍스’ 등이 모두 사람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서양의 ‘엔도님’이 사물에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 데 비해, 우리나라의 ‘석렬하다’ ‘재명하다’ 같은 말은 멀쩡한 인간을 비방과 혐오의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특성을 보인다. 갈등 전문가에 따르면 상대의 ‘비인간화’야말로 극도의 적대와 갈등 상황의 표상이다. 상대가 맘에 안 드니 취임한 지 불과 며칠밖에 안 된 대통령의 근무지와 출근 시간을 트집 잡고, 일상의 나들이조차 꼬투리를 잡는다. 새 정부는 출범했지만 이런 혐오와 적대 문화는 매양 그대로다.

 

우리 공론장은 이런 적개심 가득한 언어로 어지럽다. 남의 말을 가져다가 되치는 말로 뒤바꾼 대표적인 말이 ‘적폐’다. 원래 박근혜 대통령이 한 이 말을 반대파가 박근혜를 옭아매는 용어로 활용했고, 성공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의 키워드 중 하나인 ‘반지성’도 그렇다. 퇴임 후 양산에 내려와 시위대의 소란을 접한 문 전 대통령은 “확성기 소음과 욕설이 함께하는 반지성이 작은 시골 마을 일요일의 평온과 자유를 깨고 있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에게 지지자의 소리는 ‘양념’, 비판자의 소리는 ‘반지성’인 것이다.

 

필요하면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그런 단어로는 ‘피해 호소인’이나 ‘성 비위’를 따라올 게 없을 것 같다. 성범죄를 성범죄라 부르기 싫고, 피해자의 피해를 인정하기 싫은, 의지적 표현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범죄 수위를 가늠하기 힘든 ‘성 비위’라는 말로는 상대를 얼마나 비난하고 벌 줘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아마 그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잊힌 대통령이 되고 싶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거하게 연출한 퇴임식을 가졌고, 사저로 내려간 후에도 크고 작은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지속적으로 뿌렸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한 후에는 “깨어있는 강물이 되어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유적 메시지를 던졌다. 잊히지도, 물러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레토릭의 행진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갈라진 땅에서 우리 모두의 ‘임’을 구하고, 마침내 하나 된 대한민국을 지킬 문화적 근육이 준비되어 있는가.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조선일보(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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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시대

 

반지성은 폭력이고, 무지성은 야만이다

지성(知性)이면 감천이다

 

찰스 다윈은 “무지는 지식보다 더 확신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시쳇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거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우리 시대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멍청한 사람들은 확신에 차 있다는 점이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고집을 철학이라 우기는 건 양반 축에 든다. 결국 무식이 소신과 결합하면 재앙이 된다. 여기엔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지식인들도 가세한다.

 

지성주의가 별건가? 균형된 사고를 갖고 상식으로 소통하고, 합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당연한 것이 뉴스가 되는 웃픈 세상이다.

 

-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조선일보(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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