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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딴따라'] [영원한 국민 MC 송해] [이제 천국노래자랑 사회 볼 송해]

뚝섬 2022. 6. 16. 06:14

영원한 '딴따라'

 

[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몇 년 전에 디제이(DJ) 이오공(250)이 '트로트'(그의 말로는 '뽕')를 찾아 나를 만나러 왔었다. 사뭇 진지했던 그와 트로트를 주제로 당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로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뽕을 찾아서'라는 기록물을 만들고, '이창'과 '뱅버스' 등의 음원을 발표하면서 뮤직비디오를 선보였다. 음악이 흐르는 4분여 동안 속옷과 구두 차림의 배우 백현진이 줄기차게 달리기만 하는 '뱅버스'의 뮤직비디오는 미국 '보스턴 국제영화제'의 공식 경쟁작에 초청되기도 했다.

트로트 가수 이박사의 '테크노 트로트' 또는 '이디엠(Electronic Dance Music·EDM) 트로트'를 연상시키는 이오공의 음악은 실험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추었다. 복고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사운드를 구현한 그의 음악에는 묘한 끌림이 있다. 과연 그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뽕'을 찾았을까? 그가 생각하는 '뽕'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예상외로 낭만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는 뽕을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순간 느껴지는 애잔함 또는 그리움 같은 것"이라 정의했다.

음반에 수록된 11곡 중 유독 내 마음에 와닿은 노래는 몽환적인 기계음을 뚫고서 시작하는 '모든 것이 꿈이었네'다. 이박사 트로트의 건반 연주자이자 프로듀서로 유명한 김수일이 오래전에 만든 곡을 자신이 직접 노래했다. 그 옛날 할아버지들이 흥얼거리듯이 이어지는 노래에 빠져든 것은 그의 목소리에서 연륜과 깊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노래 말미에 "내가 가수가 아니니까"라고 말하는 그의 겸손 앞에서는 괜스레 숙연해졌다.

트로트는 단순한 대중음악 장르가 아닌 일종의 문화다.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으나 우리 삶 곳곳에서 트로트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 평생 트로트와 함께한, 자신을 '딴따라'라 칭했던 분이 있다. 1988년부터 34년 동안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한 국민 MC 송해다. 95세의 나이에도 현역이었던 그는 마지막 방송 때 입으려 맞춰 놓은 양복을 둔 채 지난 6월 8일에 영면하였다.

트로트 문화가 엄숙주의를 거부하는 '통속의 미학'을 특징으로 한다면, 송해는 현장에서 트로트의 미학을 잘 구현한 분이었다. 방방곡곡을 누비며 서민들과 어우러져 공감하고 소통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그가 진행한 방송에서 송가인·임영웅·이찬원·김희재·정동원 등의 무명 시절을 볼 수 있고, 수많은 출연자는 저마다 송해와의 추억을 만들었다. 한동안 많은 사람이 허전하겠으나, '장자의 나비'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는 모호하고 모든 것은 꿈이 아니겠는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천국' 노래자랑에서 "딩동댕"을 외치고 있을 그를 그려본다.

-장유정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대중음악사학자, 조선일보(22-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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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국민 MC 송해

 

“전구우우욱∼ 노래자랑!” 경쾌한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MC 송해의 오프닝 멘트는 매주 일요일 아침을 깨우는 일성이었다. 진행 횟수 1700여 회. 무대 출연자 3만 명. 관객 1000만 명. ‘국민 MC’ 송해가 향년 95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세운 기록들이다. 스스로를 ‘딴따라’로 불렀던 그는 “어원인 프랑스어 ‘팡파르(fanfare)’는 스타의 등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송해가 이끄는 전국노래자랑 무대가 열리면 온 마을이 들썩였다.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꼬마부터 랩송을 부르는 어르신까지 모두가 참여하는 잔치였다. 송해는 ‘땡’ 소리에 탈락한 출연자들을 정겨운 입담으로 격려하고, 흥겨운 공연에는 어깨춤 장단을 맞췄다. 맛깔스러운 만담을 통해 출연자들의 인생 스토리에 색을 입혔다. 때로 구수한 사투리, 때로 망가지는 몸 개그를 섞은 능청스러운 진행에 객석에서는 수시로 폭소가 터졌다. 한껏 무르익은 무대 위에서 숨겨져 있던 스타들의 끼는 아낌없이 폭발하며 ‘딩동댕동’을 이끌어냈다.

▷송해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34년간 한결같았다고 주변인들은 전한다. 녹화를 갈 때면 꼭 하루 전에 그 마을에 도착해 1박을 했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살폈다. 녹화 당일에도 3시간 전에는 행사장에 도착해 출연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멀리 지나가는 소달구지를 보고 동네 아낙을 보고 하늘도 올려다본다”고 했다. 현지 분위기에 푹 빠져들 때까지 공감과 소통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전국 팔도를 웃기고 울린 진행 솜씨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70년 가까이 현역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최장수, 최고령 MC로 남은 송해의 기록은 한동안 깨지기 어려울 것 같다. 그는 “권태는 절대로 느끼지 말라. 여러분이 하는 일에서 도태되지 말라”는 조언을 자주 했다. 고령임에도 “나는 BMW(Bus, Metro, Walking)만 탄다”며 검소하게 몸을 움직였다. 코로나19로 인한 활동 중단과 건강 악화만 아니었으면 100세 MC 기록도 가능했을 것이라며 연예계 후배들은 안타까워한다.

▷6·25전쟁 당시 혈혈단신 월남한 뒤 생계에 몸부림쳤던 삶의 역정 때문이었을까. 어려운 이들에게 장학금을 쥐여주고, 늘그막의 동료들을 살뜰히 챙긴 그의 향기는 무대 뒤에서 더 짙다. 지인들은 그의 단골집이었던 종로 낙원상가 앞의 2000원짜리 국밥집을 찾고 인근 ‘송해길’을 거닐며 그를 회고한다.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꼭 진행하고 싶다던 그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그라면 하늘에서라도 고향 사람들과 흥겨운 한마당을 풀어내고 있을 것만 같다.

-이정은 논설위원, 동아일보(2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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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천국노래자랑 사회 볼 송해

 

황해도 재령 출신 청년 송복희는 해주의 음악학교에 다니던 중 6·25를 맞았다. 폭설이 쏟아지던 그해 겨울, 목숨 걸고 피란길에 올랐다. 폭격으로 무너진 철로를 건널 땐 총탄이 날아왔다. 그걸 피하다가 추락했는데 비죽 튀어나온 철근을 붙잡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해주에서 연평도로 나와 유엔군 상륙함을 얻어 타고 남하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 바다 위에서 이름을 송해로 바꿨다.

 

▶송해는 서울 입정동에서 황해도 출신이 운영하는 냉면집을 즐겨 찾았다. 몇 해 전 그곳에 갔는데, 주인이 “합석해도 되느냐?” 묻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송해였다. 반색하며 “음식 값은 제가 내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짜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베풀기를 좋아했다. 새해가 되면 후배들 불러 밥을 샀다. 송해는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주머니 사정을 걱정한다며 후배들이 하는 말이 “100명만 모을까요?”였다. 300명 밥을 산 적도 있다. 장지갑에 5만원권 두둑이 채워두고 세배하러 오는 이들도 맞았다. 너무 몰려와 돈이 떨어지면 “외상이야, 내년에 와!”라며 돈 대신 웃음을 줬다.

 

▶송해는 라디오 교통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던 80년대 말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사고 후 “자, 오늘도 안전 운전 합시다!”라는 오프닝 멘트가 입 밖에 나오지 않아 방송을 중단했다. 슬픔에 빠져 살던 그에게 배우 안성기의 형인 안인기 PD가 찾아왔다.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기며 “나랑 전국을 떠돌며 바람이나 쐬자”고 했다.

 

▶이 프로그램이 송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한번은 세 살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출연했는데, 아빠가 브라질에 있다기에 아빠에게 인사하라고 시켰다. “아빠, 빨리 못 와? 아프지 마!”라는 아이를 보며 목이 탁 막혔다. 송해는 “이 프로그램이 내가 평생 배워야 할 교과서구나. 이걸 하길 잘했다” 생각했다고 한다.

 

▶방송인 송해가 95년 인생 항해를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그가 건넌 한국 현대사의 바다는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격랑이었다. 전란 속에 고향을 등졌고 부모와 생이별했다. 젊은 시절 가난에 절망해 남산에 올라 투신했다가 소나무에 걸려 목숨을 건진 적도 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남 앞에 드러내 위로를 구하지 않았다. 마이크를 든 송해는 ‘일요일의 남자’로, ‘오빠’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별세를 전하는 기사에 “하늘에선 천국노래자랑 사회를 보시라”는 댓글이 붙었다. 국민 가슴속에 오래 살아 있을 그를 이제 보낸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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