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두 휩쓴 17세기.. 동서양 왕들은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이었다]
[DNA와 치아가 알려준 고대 전쟁의 비밀]
천연두 휩쓴 17세기.. 동서양 왕들은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이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숙종과 루이14세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국왕의 몸은 그 자체로 늘 국정의 핵심 문제였다. 조정은 국왕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매우 많은 기록을 남겼다. 지난 시대 국왕들이 겪은 크고 작은 질병과 치료 상황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는 이유다. 거의 같은 시기에 재위했던 조선의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과 프랑스의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를 건강 문제라는 관점에서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28회 ‘루이 14세의 건강’에서 다룬 내용 일부를 간략히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베르사유 궁정에서는 다캥(Antoine d’Aquin)과 파공(Guy-Crescent Fagon)이라는 두 명의 궁정 수석의가 수십 년 동안 국왕을 매일 진찰하고 결과를 기록하여 ‘건강일지(Le Journal de santé)’를 남겼다. 두 사람은 국왕이 아침 8시에 기상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와서 몸 상태를 살피고, 병세가 발견된 때에는 적절한 치료를 했으며, 이런 사실들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을 보면 루이 14세는 평생 수많은 병을 달고 산 ‘인간 종합병동’이라 할 만하다. 그런 몸으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에 속하는 77년을 산 것이 신기할 정도다.
루이 14세, 좌측 상부 치아들 전부 뽑아
루이는 1647년 아홉 살에 천연두(두창)에 걸렸다. 이로 인해 얼굴에 생긴 얽은 흔적은 평생 콤플렉스로 남았다. 치아도 부실하여 1685년 치근을 잘라내는 처치를 했는데, 깨끗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농양이 생기고 골염이 심해졌다. 할 수 없이 좌측 상부 치아들을 전부 발치해야 했다. 마취제가 없던 시절이니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이때 발치를 담당한 사람이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입천장 절반이 뜯겨 나가고 종양이 생겼다. 천공(穿孔) 부분을 처리하는 방법은 벌겋게 가열한 쇠막대로 지지는 수밖에 없어서, 14차례나 입안을 지졌으나 구멍이 완전히 막히지 않았다. 그 결과 비강(鼻腔)을 통해 입과 코가 연결되었다. ‘국왕이 음료수를 마시거나 목을 헹굴 때 물이 입에서 코로 올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다’거나 ‘코에서 빨간 포도주가 흘러나왔다’고 전한다. 치아가 부실하니 소화불량이 생겼고, 이는 다시 고질적인 장염으로 발전했으며, 그 때문에 관장도 자주 해야 했다.
항문에 치루가 생겨 제거 수술도 해야 했다. 당시 의료 수준이 신통치 않으니,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끔찍한 칼질을 피할 수 없다. 의사는 메스로 두 번, 가위로 8번 생살을 잘라냈다. 다음 날 그런 상태로 어전회의를 주관했을 때 국왕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나이 들면서는 통풍과 당뇨병 증세도 심각했다. 모두 고통과 피로를 가져오는 병이다. 여기에다가 막중한 통치 부담을 안고 있으니 정신적 스트레스도 매우 컸을 터이다. “국왕께서는 나쁜 꿈에 시달리는지, 자는 도중 말하고 소리 지르고, 때로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는 기록을 보면 정신 건강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동의보감에 실린 인체해부도.
같은 시대 조선의 궁중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의 신체 상태, 약물 처방이나 투약 이후의 중상 변화 등에 대한 세밀한 기록들이 넘쳐난다. 이런 자료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숙종 또한 루이 14세와 유사하게 많은 병에 시달렸고, 그것이 왕실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이상곤, ‘왕의 한의학’).
숙종은 평생 간 질환으로 고생했다. 15세(숙종 2년)에 처음 간염 증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감기 증상으로 오인하여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을 썼는데, 며칠 후 얼굴과 눈에 갑자기 누런색이 나타나자 의관들이 황달 증세로 진단하여 처방을 바꾸었다. 황달을 치료하는 시령탕(柴苓湯)을 쓰자 며칠 안에 누런빛이 모두 사라지고 수라와 침수(寢睡)가 원래 상태로 돌아와 완치되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끝난 게 아니다. 숙종은 이후에도 긴 질환 증상들을 평생 달고 살았다. 작은 일에도 흥분 잘하고 ‘애간장’을 태우며 걸핏하면 노여움이 폭발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증상 또한 간 질환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본다고 한다.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고, 밤이면 잠들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여 수습할 수가 없다”는 국왕 자신의 고백이 그런 점을 말해 준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왕은 분노조절장애 상태라 할 만하다. 신하들은 벌벌 떨며 숨을 죽일 정도로 공포에 떨었고, 임금도 스스로 인정하기를 “성질이 너그럽고 느슨하지 못하여 일이 있으면 내던져 두지를 못하고 출납하는 문서를 꼭 두세 번씩 훑어보고… 그러자니 오후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되고 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숙종 29년).
숙종, 소변·대변 장애로도 고생
숙종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또 다른 병으로는 두창을 들 수 있다. 숙종 9년, 임금이 이 병에 걸리자 내의원에서 치료를 맡았는데, 별 효험이 없자 두창 전문의인 유상(柳瑺, ‘증보산림경제’를 쓴 유중림의 아버지)을 궁궐에 불렀다. 처음 탕약을 써서 병세가 완화되는 듯했으나 얼굴에 생긴 곪은 종기 때문에 증상이 다시 심해지자 처방을 바꾸어 사성회천탕(四聖回天湯)이라는 약을 썼다. 곧 열이 내리고 얼굴에서 딱지가 떨어졌다. 유상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지중추부사로 두 계급 승진의 영예를 안았다.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 김씨도 두창으로 세상을 떠났고, 왕세자와 연령군(延齡君, 숙종의 여섯째 아들)도 이 병으로 고생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또한 아들의 두창을 치료하려다가 병을 얻어 죽는 비운을 맞았다. 두창은 조선 후기에 많은 사람을 끔찍이 괴롭혔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 용어인 천연두(天然痘)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과거에는 마마, 손님, 포창(疱瘡), 두창(痘瘡)이라 부른 외에 백세창(百世瘡)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치르는 병이라는 의미다.

숙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기해기사계첩’-조선 숙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행사 장면을 상세히 그려낸 화첩 ‘기해기사계첩’.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숙종은 눈병으로도 고생했다. 한의학에서는 이 또한 간 질환과 관련이 있다고 풀이한다. 간의 질환에서 비롯한 화증이 ‘불의 통로’인 눈의 신경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숙종 43년에는 글을 보기 어려워 장지(壯紙)에 큰 글씨로 간략하게 쓰도록 시켜서 읽었다. 심지어 숙종 44년에는 혼례식을 올린 후 인사 온 왕세자 부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크게 탄식했다.
나이 50대 중반에 이르자 온갖 병세가 더욱 악화했다. 특히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 병세가 나타났다. 자손들과 어의들이 병 치료를 위해 수많은 약재를 구하여 바쳤다. 그렇지만 숙종 45년 10월에 아들 연령군이 사망한 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급기야 이듬해에 복수가 차오르는 간경화 말기 증세가 나타났다. “성상의 환부는 복부가 갈수록 더욱 팽창하여 배꼽이 불룩하게 튀어나오고, 하루에 드는 미음이나 죽의 등속이 몇 홉도 안 되었으며,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정신이 때때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한 달 만에 숙종은 세상을 떠났다.
늙고 병에 걸려 고생하다 죽는 데에는 왕이나 일반 서민이나 큰 차이가 없다. 어쩌면 구중궁궐에 갇혀 지내느라 운동 부족 상태가 되는 데다가 워낙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니 국왕의 여건이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국왕 한 사람에게 국사(國事)의 많은 일들이 집중될 수밖에 없으니, 무엇보다 국왕이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차대한 일일 수밖에 없다.
[루이 14세 가문의 비극]
세자·손자·증손자 잇따라 병으로 요절… 증손자 1명 살아남아
루이 14세가 말년에 이르렀을 때 후손들의 계속된 죽음 때문에 베르사유 궁 전체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이곤 했다. 1711년, 루이 14세의 세자가 두창에 걸린 지 4일 만에 죽었다. 다음 해인 1712년에는 증손자인 부르고뉴 공과 부인이 일주일 간격으로 죽었다. 독살설도 제기되었으나, 증세로 보건대 당시 프랑스에 널리 퍼졌던 홍역에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2년 뒤인 1714년, 왕의 손자인 베리 공작이 사냥 도중 사고를 당한 후 열흘 만에 사망했다. 당시 의사들은 환자의 피를 뽑아 체액의 균형을 맞추는 사혈법에 주로 의존했는데, 병에 걸려 허약해진 어린아이들에게 소독 상태가 의심스러운 바늘로 찌르는 것이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 루이 14세 자신이 1715년에 죽었을 때 살아남은 자손은 증손자인 앙주 공작뿐이었다. 그가 다섯 살의 나이에 루이 15세로 즉위했다.
조선의 궁중에서도 두창이 큰 피해를 낳았다. 숙종 자신이 두창에 걸렸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이 병으로 사망했다. 숙종 6년에 첫 부인 인경왕후가 두창에 걸리자 숙종과 왕대비 명성왕후가 창경궁으로 옮기고 인경왕후는 경덕궁에 남았으나 이레 만에 사망했다. 명성왕후의 죽음 또한 이 사태와 관련이 있다. 숙종이 병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 점을 쳤는데 명성왕후에게 든 삼재(三災) 때문이라는 점괘를 받았다. 삿갓을 쓰고 소복 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으라는 무당의 말을 믿고 엄동설한에 실제 그렇게 했다가 병을 얻어 12월 5일에 사망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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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와 치아가 알려준 고대 전쟁의 비밀
[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2500년전 고대 그리스와 카르타고 전쟁서 활약한 용병의 존재
‘위대한 그리스’ 그린 역사가들이 지웠지만, 과학적 분석으로 밝혀
돈과 계약으로 산 평화는 영원할 수 없다는 중요한 교훈 일깨워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심금을 울리는 돌 조각이었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1880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위스 호수 도시 루체른에서 본 ‘빈사(瀕死)의 사자상’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조각은 1792년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16세를 마지막까지 지키다 전사한 스위스 용병(傭兵) 786명을 기리기 위해 1824년 만들었다. 심장을 찔린 채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사자의 압도적인 모습에는 스위스의 슬픈 과거가 비춰진다. 당시 전사한 스위스 용병의 유서에는 “신의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후손이 용병으로 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난한 스위스인들이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용병이었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이런 용병들이 전쟁 판도를 바꾸며 활약했다는 증거를 과학자들이 찾아냈다. 역사의 진실을 말해준 것은 유전자(DNA)와 치아 에나멜이었다. 미국·독일·오스트리아 국제 공동 연구진은 지난주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논문에서 “기원전 두 차례에 걸쳐 고대 그리스 히메라에서 벌어진 그리스와 카르타고의 전투에서 용병이 광범위하게 활약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해상 통상으로 번영한 카르타고는 바다로 진출하려는 그리스인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현재의 시칠리아에 있던 히메라는 카르타고의 영역 바로 옆에 있는 이 지역 유일의 그리스 도시였다.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가 히메라를 침략했다. 이 전투에서 병력 5만의 그리스는 카르타고군 30만에 대승을 거뒀고 카르타고 지휘관 하밀카르도 숨졌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위대한 그리스인의 승리’로 기록했다. 하지만 연구진이 최근 히메라 서쪽 집단 무덤에서 발굴된 이 시기 시신들을 DNA 분석한 결과는 전혀 달랐다. 군인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몸에 박힌 창과 같은 폭력적 외상의 성인 남성 시신만을 조사하자 그중 3분의 2는 당시 현지인과 관련이 없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인이 아닌 오늘날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불가리아인의 조상이었다. 이번 연구진은 작년에도 당시 전사한 히메라인 시신의 치아 분석을 통해 용병의 존재를 주장한 바 있다. 치아의 에나멜층은 사람이 10대 중반까지 살아온 기후 환경과 식생활에 따라 각기 조성이 다르다. 거꾸로 특정인의 치아 에나멜에서 스트론튬과 산소 동위원소를 분석하면 그 사람이 자란 환경과 식습관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먼 곳에서 나고 자란 용병의 치아 에나멜층은 완전히 다르다. 당시 연구에서는 이번 연구와 마찬가지로 히메라군 시신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그리스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용병의 존재와 활약은 왜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을까. 방패와 창으로 무장하고 밀집 대열을 이뤄 전진하는 중무장 보병 이른바 ‘호플리테스(hoplites)’는 페르시아와의 마라톤 전투,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까지 이어진 고대 그리스식 역사 서술의 핵심이다. 특히 호플리테스를 구성한 그리스 시민들은 직접 무장을 준비해 스스로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고귀한 존재로 그려졌다. 돈을 받고 대신 싸워주는 용병의 존재는 이런 영웅담의 순수성을 망치는 요소로 인식되면서 지워졌다는 것이다. 기원전 409년 카르타고가 히메라를 재침공했다. 하밀카르의 손자 한니발 마고는 그리스인을 학살하고 인근 도시를 모두 파괴했다. 히메라를 지키던 용맹한 용병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연구진은 또 다른 집단 무덤에서 2차 전쟁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사의 시신만을 골라냈다. DNA와 치아 분석 결과 2차 전쟁에서 그리스인이 아닌 용병은 4분의 1로 줄었다. 실제로 역사학자들은 카르타고군이 과거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2차 히메라 전쟁에서 대규모 용병을 동원했다고 본다. 누가 더 용병을 많이 썼느냐에 따라 전쟁 판도가 갈렸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왕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단은 혁명이 끝난 뒤 곧바로 프랑스 공화정과 계약을 맺는다. 이후 황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도 참전한다. 유럽 각국이 충실한 스위스 용병을 앞다퉈 고용하자 스위스 용병끼리 싸우는 동족상잔까지도 일어났다. 2500년 전의 그리스 땅에서 발굴된 시신들이, 스위스 용병들의 역사가 일깨워준다. 돈으로 맺어진 계약, 또 그렇게 만들어진 평화 어느 쪽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박건형 기자, 조선일보(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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