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전남 72%가 이승만 지지.. ”] [6·25전쟁 개전 3일] ....

뚝섬 2023. 6. 27. 08:55

[“전남 72%가 이승만 지지… 그때는 전라도가 우파 본산이었다”]

[6·25전쟁 개전 3일]

[6·25 종군 여기자의 외침 “한국은 자명종이다”]

[이승만이 ‘분단 원흉’이라고?]

 

 

 

전남 72%가 이승만 지지… 그때는 전라도가 우파 본산이었다”

 

[호남 통신]

정읍 선언올해가 77주년이승만이 극우라는 친구에게

 

광주에서 올해 설을 보내고 고향 친구와 시간이 맞아 서울로 가는 SRT에 같이 탔다. 첫 번째 정차 역은 정읍. 친구에게 창밖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저기 아파트 너머가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선거해서 정부 세우자’고 연설한 정읍동초등학교야. 지금 돌아보면 잘한 거 같지 않냐?”

 

6·25 터지니깐 국민들 보고 안심하라 방송해놓고 다리 끊고 도망쳤는데 잘해?” “전쟁 나면 당연히 ‘우리 군이 잘할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방송하지 ‘큰일 났으니 도망가세요’라고 방송하냐? 갑자기 밀고 내려오니깐 반복해서 틀어주던 라디오 못 끄고 후퇴한 거지. 한강 철교도 이승만이 끊으라고 한 게 아니고 군에서 안 되겠다 싶어 끊은 거야.”

 

이승만은 반민특위 해산시킨 친일파잖아.” “그때는 국민 80%가 글도 못 읽고, 제주 4·3, 여순 사건 터져서 혼란스러운데 정치인들끼리 테러하고, 조폭이 주름잡던 시대였어.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랑 일 좀 같이 했다고 관료들 다 내쳐버리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냐? 이승만은 일본이 반대해도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 주장하면서 대한해협에서 고기 잡던 일본 어선들 막 잡아들였어. 이래도 이승만이 친일파냐? 네 말대로면 이승만보다 친일파 훨씬 많이 기용한 김일성도 친일파겠다.”

 

미국 꼭두각시 노릇 하느라 민족이 분열되고 전쟁까지 했는데?” “남한에서 선거도 하기 전에 김일성은 이미 소련 지원 받아서 군대 만들고 정부 만든 상태였어. 이런 상황에서 김구랑 김규식이 김일성을 만나봐야 협상이 되겠냐? 난 전 세계 절반이 공산화되는 이 거대한 물줄기를 조그만 반도 끄트머리에서 온 몸을 바쳐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게 민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봐.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전혀 순종적이지 않았어. 오히려 빨리 휴전하고 싶은 미국이 이승만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정권 세우려 했을 정도지. 굴하지 않고 직선제 개헌 해서 2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불리하게 진행되는 휴전 협상을 뒤집으려 반공 포로를 석방해버리는 벼랑 끝 전술을 썼어. 그렇게 미국한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내. 대한민국 침범은 곧 최강대국 미국 침범과 같게 되는 시스템을 만든 거라고. 강대국들 사이에서 언제 먹힐지 모르던 나라가 안보 문제를 해결해서 번영의 기반을 마련한 거야. 우크라이나 봐. 미군이 주둔했다면 감히 러시아가 쳐들어오기나 했을까?”

 

어떻게 부정선거 저지른 독재자를 옹호하냐?” “이승만은 경쟁 후보였던 조병옥 사망으로 당선 확정이었어.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사람들이 장난친 거지. 독재자는 말이야, 국민의 재산을 국유화해놓고 제 맘대로 해. 김일성이 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가 바로 그거야. 맘대로 매매·상속도 못 하는데 뭔 분배? 독재 강화 수단이지. 이승만은 유상 몰수, 유상 분배해서 국민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을 늘려줬어. 국민에게 ‘지켜야 할 나의 것’을 만들어줘서 6·25 때 용감히 싸울 원동력이 된 거야. 그리고, 세상 어느 독재자가 시위 좀 한다고 하야하냐? 탱크로 밀어버리지. 이승만은 시위하다 다친 학생이 있는 병원에 가서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어. 게다가 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더 똑똑해지길 바라며 부족한 재정에도 초등 의무교육을 시행한 이승만이 과연 독재자일까?”

 

그래도 초대 대통령은 목숨 바쳐 무장 투쟁한 김구였어야 !” “넌 왜 잘사는 대한민국에서 누릴 거 다 누리면서 건국에 몸 바친 이승만은 싫어하고 김구만 좋아하냐? 국제 정세를 잘 알고 활용한 이승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김씨 왕조 밑에서 노예로 굶주리고 있었을 거야. 이승만이 원자력을 육성했으니깐 이렇게 싼값에 SRT 탈 수 있는 거지. 물론 이승만이 잘못한 점도 있었지만 넌 구구단도 못하는 상태에서 바로 미적분 할 수 있냐? 미국도 1965년에 흑인한테 처음 투표권 줬고, 스위스는 1971년에 여성한테 처음 투표권 줬어. 식민지를 막 벗어나서 모든 게 취약했던 나라의 첫 지도자가 생존 문제를 해결했으면 잘한 거 아니야?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게 ‘정읍 선언’이야. 이승만이 옳았다고!”

 

, 고등학생 때는 그랬잖아. 전라도 놈이 어쩌다 극우로 변해버렸냐.” “이승만 존경하면 다 극우냐? 3대 대통령 선거 때 보면 오히려 대구가 좌익 조봉암을 72% 지지하고 전라남도가 이승만을 72% 지지했어. 전라도가 우파의 본산이었다고.”

 

-박은식 의사·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조선일보(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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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개전 3일

 

[임용한의 전쟁사]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로 진입하고, 서울 함락이 공식화됐다. 당초 북한의 목표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성공했다. 서울 주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여러 가지 안 좋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정설로 믿고 있는 소문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한강 다리 폭파도 전략적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피란민들이 다리에 있는 상태에서 폭파해서 무수한 민간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폭파의 절차, 타이밍, 명령체계가 대혼란이었다.

그럼 이런 대혼란은 왜 벌어졌을까? 3일 만에 전선이 무너지고, 수도가 함락당하는데, 혼란이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독일군이 처음 전격전이란 구상을 내놓았을 때, 90%의 장군들이 반대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고 너무나 위험한 작전이라고 했다. 지지자들의 반론은 그건 탁상에서 냉정하게 전황을 분석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전쟁은 발발하는 순간 혼란이다. 상대가 빠르고 깊게 찌르고 들어오면 대부분의 지휘관, 조직은 대혼란을 일으킨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전격전 지지자들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논쟁이 탄생한다. 독일군을 대상으로 전격전을 시행하면 먹혀들까? 패튼이 프랑스에서 종심으로 파고드는 전술을 구상했을 때, 미군 지휘부는 까무러쳤다. 그러나 결론은 독일군을 상대로도 먹혔다. 공포와 충격을 이겨내는 군대는 없다. 유일한 대안은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군은 그런 부분에 대한 전술적 대비가 전혀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든 비난의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3일 작전은 실패한다. 서울은 점령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행정력은 붕괴되지 않았다. 한강 이북에 고립되었던 국군 병사들은 기를 쓰고 탈출해 군으로 복귀했다. 수많은 무명의 장병들이 5분, 10분을 벌어주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우린 그 참전용사들이 다 돌아가실 동안 정치인만 비난하고 그분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채록하지 못했다. 진정 부끄럽고 반성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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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종군 여기자의 외침 “한국은 자명종이다”

 

[김순덕 칼럼]

1951년 첫 여성 퓰리처 수상자 히긴스
“전쟁 덕에 미군 약체 알려져 철저히 무장”
지금도 한국은 전체주의·북핵에 맞서
자유세계 시민 일깨우는 자명종 역할

 

마거릿 히긴스 6·25전쟁 종군기자. 동아일보DB

 

이달 초 발표된 2023년 퓰리처상은 단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보도에 모아졌다.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한 AP 사진팀이 대상 격인 공공서비스 부문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는 부차에서 자행된 러시아 공수부대의 ‘전쟁 범죄’를 파헤쳐 국제보도상을 받았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퓰리처상의 관심은 한반도였다. 국제보도상 수상자 여섯 명 모두 한국전쟁을 보도한 기자들이다. 그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 특파원 마거릿 히긴스는 6·25 발발 이틀 후 서울로 날아와 한강철교 폭파부터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철수 등 숱한 특종 기사를 쓴 당시 31세의 유일한 종군 여기자이자 첫 여성 퓰리처상 수상자였다.

그가 1951년 초 출판한 한국전쟁 르포 ‘War in Korea’가 2009년에 이어 올해 다시 번역돼 나왔다. 1951년 ‘한국은 세계의 잠을 깨웠다’에서, 2009년 ‘자유를 위한 희생’으로, 최근엔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으로 제목이 바뀌어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히긴스가 1951년부터 1954년까지 7차례나 한국을 오가며 만났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등의 인터뷰가 덧붙여지면서 제목이 달라진 것이다. 6·25전쟁에 대해선 한국인이라면 대체로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히긴스의 책을 보면 불과 70여 년 전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다는 데 새삼 가슴을 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4월 방미 때 미 의회 연설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자식과 남편, 그리고 형제를 태평양 너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보내준 미국의 어머니들과…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나 미국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히긴스는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 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고 썼다. 일본에서 점령군으로 편히 지내다 한국에 파견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대원 다수가 총기 조립조차 할 줄 모르고 애꿎게 죽어갔다. 희망 없는 싸움에 빠져들었다고 정부를 저주하며 무기를 버리는 것도 봤다고 했다.

히긴스는 ‘반역자’ 소리까지 들으면서 이런 현장을 기사로 써 보냈다. 그래야 병력과 무기가 신속히 지원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달라진 것은 군기가 살아나면서부터였다. 7월 29일 미8군 월턴 워커 사령관이 낙동강 전선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라”는 사수 명령을 내리면서 전선은 지켜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히긴스가 알려주는 두 번째 교훈은 공산주의자와의 타협은 무용지물이고 국익은 냉정하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히긴스와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속임수라는 것을 미국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건 지금도 유효하다. 북한과의 핵 폐기 협상 30년이 결국 사기로 끝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좌파 정권들이 모르고 당했는지, 알고도 속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중국이 잘살게 되면 민주화할 것이라고 미국은 믿고 싶었겠지만 틀렸다.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트루먼은 6·25 때 적을 완전 소탕하는 것을 금했고, 그리하여 중국에 패배를 안길 기회와 한국 주도의 통일을 놓치게 했다. 그렇다면 북핵 위협에 노출된 현재, 우리는 일본 같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도 못 하고 마냥 미국만 바라봐도 괜찮은가.

히긴스가 남긴 세 번째 교훈은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세계인을 잠에서 깨우는 국제적인 자명종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우리나라는 핵을 지닌 북한과 머리를 맞대고 자유세계와 전체주의세계를 각각 대표하는 체제로서 자유시민을 일깨우는 자명종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여 년 전에는 소련이 공산주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 공산당이 세계 지배를 노리고 있다. 아직도 이승만 대통령을 ‘내란 수괴’로 믿는 시대착오적 세력이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좋든 싫든 참 독특한 K-모델이다. 군기가 살아나자 6·25 때 미군은 일어났다. 시민정신이든 용기든 애국심이든 북이 도발할 경우 무기를 들고 나설 결기든, 우리 국민의 정신이 살아나야 자명종도 울릴 수 있다.


-김순덕 대기자, 동아일보(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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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분단 원흉’이라고?

 

1947년 광복절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오른쪽으로 김구, 미·소 공동위원회 소련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 안재홍./조선일보 DB

 

강연이나 출판물에서 A라는 나라의 현대사를 설명할 때, 미국의 조종을 받아 집권한 꼭두각시 정치인이 등장하면 종종 이런 해설이 나온다. “그는 한마디로 A국(國)의 이승만이었다.” 고대사 전공의 한국사학자로부터 사석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이승만 같은 미국의 앞잡이는 다시 나와선 된다.”

 

많은 사람의 인식과는 달리 이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아니다. 해방 정국에서 반탁(反託) 견지했던 이승만은 한반도의 임시정부를 논의한 미소(美蘇) 공동위원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미 군정이 지지한 세력은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이 아니라 중도파였고, 이승만은 미 군정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며 골치를 썩였다. 당초 한반도에 별반 관심이 없던 미국을 6·25 전쟁을 계기로 끌여들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주도한 사람도 이승만이었다.

 

1945 8 15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남북의 분단을 확고히 이라고 주장하는 좌파 세력에게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 된다. 1980년대 이후 그들이 쓴 숱한 역사 교과서와 교양서는 이런 인식이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이승만은 이미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워 집권하려 했던 분단 획책자’라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가 1946년 6월 3일의 ‘정읍 선언’이었다. 광복 1년도 채 되지 않아 “남방(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자”고 한 것이 분단을 의도한 ‘빼박’ 증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전후 맥락을 살피지 않은 대표적인 단장취의(斷章取義)격 해석이다. 지난 23일 우남네트워크 주최 학술세미나에서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는 소련 측 자료 등을 인용해 “이승만은 1945 자신과 김구·조만식·김일성이 참여하는 남북 지도자 회담을 열어 통일 정부를 건설하려 했으나 김일성의 반대로 실패했다”고 했다. 김일성의 입장에선 이 회담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미 1945 9 지중해 진출에 실패한 소련의 스탈린은 만주 장악을 위해북한에 정권을 수립하라 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46 2 38 이북에 수립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화폐와 군대를 갖춘 사실상의 정부였다. 정읍 선언 4개월 전의 일이었다.

 

김일성에게 권력이 집중된 북한 정권이 들어선 지 한 달 뒤, 소련은 미국과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었다. 북한에 세운 소련의 위성 공산국가를 남한까지 연장(延長)함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누구보다 국제 정세에 밝았던 이승만은 무주공산의 혼란에 빠져 있던 남한에 임시정부를 세운 국제사회와 연대해 통일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차선책을 택했다. 결국 이것이 대한민국 수립의 기틀이 됐다. 77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번영하고 있다.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다.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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