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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로 몰린 ‘전라도 천년사’]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

뚝섬 2023. 6. 29. 08:43

[親日로 몰린 ‘전라도 천년사’]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천년 넘게 잊혀졌다 일제 침략 뒷받침하려 제기]

 

 

 

親日로 몰린 ‘전라도 천년사’ 

 

[전주=뉴시스] 김얼 기자=동학학회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등 관계자들이 18일 전북 전주시 전북도의회 브리핑룸에서 '전라도 천년사 고부봉기 오류 비판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05.18. 

 

‘전라도 천년사’라는 책이 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광주·전북·전남의 호남권 3개 지자체가 예산 24억원을 들여 34권 1만3000여 쪽으로 만든 방대한 역사서다. 참여 학자만 200명이 넘는다. 그러나 이 책은 공개 직후 지역 시민단체와 광역위원 등으로부터 ‘역사 왜곡 사서’라는 거센 비판과 내용을 고치거나 폐기하라는 요구에 직면했다.

 

비판의 주요 이유는 고대사 서술에서 서기 8세기에 편찬된 일본 역사서일본서기 기술을 차용했다는 것 등이다. 이 기록은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說)’의 근거로 쓰였기 때문에, 결국 일본의 식민사관을 따른 왜곡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론 ‘기문국’이나 ‘반파국’처럼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이 호남에 있었다고 썼으며, ‘임나 4현’이란 용어를 수록한 것 등이 문제가 됐다. “전라도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책에일본서기 지명을 쓰는 것은 전라도가 일본 지배 속에 있었다고 스스로 증명하는 ”이란 말까지 나왔다.

 

과연 그런가? 공람을 위해 인터넷에 공개 중인 ‘전라도 천년사’를 살펴봤지만 어디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사실이라고 여긴 기술은 없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학계에서도 이미 폐기된 설로, 국내 역사학계에서 이걸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본서기 전체를 금서(禁書) 불온문서로 간주해 배척해야 하는가? 국내 학자들은 “일본 중심적인 황국사관의 왜곡을 걷어내면 중요한 팩트를 많이 찾아낼 있는 사서이며, 한국 고대사 서술에서 빠질 없는 자료”라고 말한다. 한반도에서 일본에 문화를 전해 왕인, 아직기, 노리사치계, 담징의 이름은일본서기에서만 있는데, 그럼 이들의 존재도 모두 일본 측의 왜곡이기 때문에 실존 인물로 보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백제 유민들의 자료를 근거로 편찬된일본서기 모든 내용을 가짜 뉴스로 여기고 폐기한다면 책을 인용한 많은 학계의 고대사 논문과 저서도 없애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분명 허구지만 ‘임나(任那)’ 자체는 광개토대왕릉비문과 ‘삼국사기’ 강수열전에도 등장하는 실제 지명이었다. 이 지명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사실로 인정했다고 해서 ‘일본의 임나일본부 왜곡을 추종했다’고 모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전라도 천년사’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 아닌 백제가 마한과 가야 방면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으로 재해석했고, 이는 현재 우리 학계 주류의 의견과 일치한다.

 

한 역사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무엇이든 반일(反日)을 내걸고 선동하면 먹혀드는 지금 분위기가 ‘전라도 천년사’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후쿠시마 오염수 괴담의 문과판(版) 버전이 아닐까.” 이 같은 식의 압력이 시사(市史) 편찬을 앞두고 있는 다른 여러 지자체에도 나타날까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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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임나일본부'의 虛像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고대 일본의 야마토(大和)정권이 서기 720년에 편찬한 '일본서기'에만 있는 용어다. 하지만 여기서 파생된 임나일본부설()은 근대 일본 역사학계가 만들어낸 역사를 가장한 허상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이 4~6세기 무려 200년 동안 백제·신라·가야를 포함하는 한반도 남부 지역을 근대 식민지같이 경영했고, 그 통치의 중심으로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운영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가야 고분군을 비롯한 영남 지역의 유적을 식민지배자에게 허락된 무한의 권리로 파헤쳐 보았지만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단 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광복 이후 한국 고고학계 역시 가야 유적을 발굴하고 관련 유물이 출토될 때마다 "이로써 임나일본부설은 부정됐다"는 발표를 반복했지만 정작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직접 증거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임나일본부 문제는 일본서기 편찬진의 특별한 역사의식과 서술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는 없었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다양한 임나일본부설이 횡행했다. 고대 일본의 가야 출장 기관이라는 설,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 오카야마 지역에 있었던 가야계 분국(
分國) 임나를 둘러싸고 긴키(近畿)의 야마토 정권이 규슈의 백제계 분국(서북부)과 신라계 분국(동북부)과의 쟁탈전에서 승리해 설치한 기관이라는 설, 야마토 정권과 무관한 가야 거류 왜인들의 자치적 행정기관이었다는 설, 주체를 일본에서 백제로 바꾸어 '임나백제부'로 보아 가야에 설치된 백제군사령부였다고 해석하는 설, 통치나 행정기관이 아니라 외교사절이었다는 설 등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사료 비판 없이 일본서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외교사절설을 제외한 모두가 허상이었음은 간단하게 밝혀진다.

 

(좌) 경남 함안 읍내의 가야시대 건물터 발굴지. 일본서기에 529년 3월 아라국(아라가야)이 백제·신라·왜의 사절을 초청해 개최한 것으로 기록된 고당(高堂) 국제회의 장소로 추정된다./(우) 복원된 국제회의장. /함안박물관 제공 

 

왜왕이 가야에 파견한 외교사절…
일본서기 편찬자가 '
'자 붙여
가야사 복원 자료로 활용해야

 

먼저 임나일본부의 기원을 4세기 중후반에 이른바 신공왕후가 신라와 가야 7국을 평정했다는 설화에서 찾고 있지만 정작 임나일본부의 기록은 5세기 후반(1회)과 6세기 전반(22회)에 국한돼 있다. 4세기 후반에 신라와 가야를 평정한 왜나 백제가 100~150년이나 지난 뒤 통치 또는 군정(軍政)기관을 설치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무엇보다 23회나 등장하는 일본부의 기록에 왜나 백제가 가야에서 조세 징수나 역역(力役)과 군사를 동원했거나 정치적 강제를 보여주는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고대 일본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정 기관을 상정할 수 있는 내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일본부라는 용어가 보이는 기록은 모두 왜의 사신들이 경남 함안에 위치했던 아라국왕의 보호 아래 백제와 신라를 상대로 전개했던 외교 활동이다. 결국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왜왕이 가야에 파견했던 외교사절이었고 일본서기 편찬자가 자신의 역사 해석에 따라 통치기관을 뜻하는 '부()'라는 한자를 빌려 기록했을 뿐이다.

이렇게 임나일본부의 허상과 실체가 밝혀지는데도 일본서기의 관련 기록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가야사의 복원 때문이다. 이 기록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없는 가야사 복원을 위한 자료들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을 통해 일본부로 표기된 왜사(
倭使)들의 활동이 친()백제·반()신라에서 친신라·반백제로 전환한 특징이 새롭게 지적됐고, 이런 사실은 신라와 백제의 침략에 대응하던 가야의 외교전략을 추출할 수 있게 했다. 가야에 대한 식민지배란 가설이 가야의 독립 유지 노력이란 역사로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의 가야사 연구 부진이 식민사학의 임나일본부설을 불러들였다. 우리의 뒤를 비춰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거울인 일본서기 관련 기사의 연구를 통한 가야사 복원이 필요하다.

-이영식 인제대 교수/공동 기획: 한국고대사학회, 조선일보(1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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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넘게 잊혀졌다 일제 침략 뒷받침하려 제기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임나일본부설, 왜 나왔나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덴무(天武·재위 673~686) 일왕의 명에 따라 680년 무렵 편찬이 시작돼 720년에 완성됐다. 일본의 신화 시대부터 덴무 일왕의 부인이자 후임자인 지토(持統·재위 686~697)일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일본의 정부 공식 기록, 민간 전승 기록과 함께 외국 역사서도 이용했는데 한국 관계 기록은 '백제기()' '백제본기(本記)' '백제신찬(新撰)'에 크게 의존했다.

일본서기는 국가가 편찬했지만 초기와 대외 관계 기록은 믿기 어렵다는 평을 받는다. 이는 7세기 말엽이 '일본' 국호와 '천황' 호칭이 시작된 시대로 일본이 주변국에서 조공을 받았다는 소중화 의식이 형성됐고, 이를 역사 서술에 투영해 사실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일본 역사가 오래됐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건 연대를 120년 끌어올렸다는 '이주갑인상설(
二周甲引上說)'까지 제기된다.

야마토 정권이 임나(가야)를 지배했다는 일본서기의 서술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1720년 쓰인 대일본사(
大日本史) 임나전이 일본서기의 관련 기사를 재정리해 수록하면서 일본 역사의 한 부분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19세기 말~20세기 초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는 학문적이기보다는 일제의 한국 침략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임나일본부설은 1949년 출간된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에서 집대성됐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 학계는 일본서기의 사료적 한계를 인정하고 임나일본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이후 임나일본부가 임나의 여러 세력과 왜(
)가 함께 참여했던 회의체라는 주장, 527~530년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군사 기관이라는 주장 등이 나왔다. 결국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200년 동안 지배했다는 학설은 무너졌고, 2010년 한일역사공동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이 근거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선민 선임기자, 공동 기획: 한국고대사학회, 조선닷컴(1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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