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혁명]
[막 내린 카스트로 시대]
[아르헨 명문가 출신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사망]
[사살된 체 게바라 가방에서 나온 詩노트]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사망]
쿠바혁명
70년 전 첫 총성… 카스트로 형제가 160명 이끌고 봉기
오늘(7월 26일)은 쿠바 혁명 시작일로부터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쿠바 혁명은 피델 카스트로가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이끌었던 무장봉기예요. 혁명은 1953년 7월 26일 시작돼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가 쿠바를 탈출하면서 끝났습니다.
‘7월 26일’은 혁명의 시발점이자 상징이 됐답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카스트로가 만든 혁명의 주요 조직이 ‘7월26일 운동(M-26-7)’이었어요. 이 단체에는 2021년까지 실권을 잡았던 카스트로의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와 쿠바의 유명한 사상가 체 게바라도 가담했지요. 쿠바는 1959년부터 7월 26일을 국경일로 지정해 매년 국가 차원의 다양한 행사를 열어요. 쿠바는 혁명 후 현재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쿠바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바티스타 독재 정권
쿠바는 미국과 남아메리카 사이 카리브해 서부에 있는 국가예요. 16세기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됐다가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 후 독립했답니다. 1902년 쿠바가 공화국이 될 때까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어요. 미국은 설탕을 쿠바의 주요 수출품으로 삼고 대기업을 통해 쿠바 경제에 점진적으로 침투했어요.
쿠바는 정치적으로 독립한 후에도 해결되지 않는 부정부패와 금융위기로 몸살을 앓았죠. 이에 1924년 쿠바 대통령으로 선출된 헤라르도 마차도 모랄레스가 개혁을 실시하는데요. 그는 헌법을 바꿔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고문·암살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강화했어요. 학생과 노동자들은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총파업을 연일 벌였지요. 결국 1933년 군부에서 떠오르는 별이었던 바티스타와 부사관들이 반란을 일으켜 쿠바 공화국의 첫 번째 독재자를 축출했답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여러 대통령이 나왔지만 바티스타는 허수아비 대통령을 세워놓고 배후에서 세력을 유지했어요. 그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을 때 쿠바는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 편으로 참전했고, 소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1952년 다시 대선에 출마할 준비를 하던 바티스타는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고, 그해 3월 쿠데타를 일으켜 유혈 사태 없이 정권을 장악했어요.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해 장기 독재의 길을 닦았지요.
쿠바 혁명의 시작
피델 카스트로는 학생 시절부터 남아메리카 전역에서 일어나는 시위와 혁명 활동에 참여했어요. 1950년 쿠바 아바나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고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했지요. 그는 바티스타가 집권하기 전 쿠바 인민당 소속으로 의회에 출마하며 정치에 입문합니다. 1952년 6월로 예정됐던 선거에서 그는 아바나 지역 하원 후보였어요. 하지만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모든 선거는 취소되고 말았죠.
카스트로는 곧 독재에 맞서려는 계획을 세우고 1953년 새로운 쿠데타를 위한 반군을 조직했어요. 7월 26일, 그는 약 160명을 이끌고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어요. 그러나 쿠바 정부군의 반격으로 80명 이상 사살됐고 카스트로 본인도 동생 라울과 함께 체포됐죠. 재판에서 카스트로는 “역사가 내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라며 농지개혁, 노동자 문제 등 혁명 이념을 제시했어요. 하지만 그는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1955년에야 정치적 사면으로 풀려날 수 있었어요.
그는 계속해서 바티스타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멕시코로 향했어요. 1955년 멕시코에서 피델은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 쿠바 망명자 80여 명을 모아 혁명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7월 26일 몬카다 병영 공격 사건을 기념해 ‘7월 26일 운동(M-26-7)’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M-26-7은 이후 쿠바 혁명의 원동력이 됐답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농민들을 위한 토지 재분배, 공공 서비스의 국유화, 정직한 선거, 교육 개혁 등이었어요.
1956년 12월 조직원 80여 명이 쿠바 공습을 위해 요트를 타고 쿠바 동남부 해안에 진입했어요. 이 중 겨우 20여 명만이 살아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진을 치죠.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저항 단체를 만들어 총파업과 게릴라전을 벌이며 바티스타 정권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쿠바 국민이 바티스타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지쳐 카스트로에게 동조하기 시작한 것이죠.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있던 게릴라 부대는 수백명으로 불어났고, 정부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쿠바 혁명 전쟁은 약 2년 동안 계속됐고 결국 정부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1959년 1월 바티스타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가버립니다.
피델 카스트로 정권
혁명 내전이 끝난 후 1959년 5월까지 바티스타 정부 관련 인사 약 600명이 숙청됐습니다. 카스트로는 쿠바의 총리가 됐고 엄격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경제 체제를 채택했어요. 카스트로는 국민에게 약속했던 토지·산업의 국유화, 국민 소득의 공정한 분배, 민영 기업 통제 등을 실시했죠. 1960년 7월부터는 미국 등 외국이 쿠바에 소유하고 있던 기업과 은행·토지·산업시설을 국유화했어요. 이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했어요. 특히 석유 산업 국유화는 미국과의 주요 갈등 요소였어요. 게다가 미국 상품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양국 간 경제활동 대부분이 중단됐죠.
1960년 9월 카스트로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소련 공산당 총리 니키타 흐루쇼프를 공개적으로 포옹하고 4시간 30분 동안 미국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어요. 결국 미국은 1961년 초 쿠바와 공식 외교 관계를 단절했어요. 그 후 피그만 침공(1961년 4월)과 쿠바 미사일 위기(1962년 10월) 등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사건도 있었지요. 카스트로 집권 후 장기적인 경제 침체, 쿠바인의 대규모 탈출, 정권 교체를 위한 소요 사태 등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카스트로는 공식 사임한 2008년까지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기획·구성=김윤주 기자, 조선일보(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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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내린 카스트로 시대

청소년 시절 피델 카스트로는 ‘엘 로코(el Loco·미치광이)’로 불렸다. 아버지가 운전을 허락하지 않자 “차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며 협박했고, 몰래 오토바이를 몰고 질주하다가 정면으로 벽에 부딪쳐 다치는 등 불같은 성격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반면 동생 라울의 별명은 ‘엘 프루시아노(el Prusiano·프로이센 사람)’였다. 냉철하고 실용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성격이 정반대였던 다섯 살 터울의 형제였지만 혁명을 하자는 데에는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1953년 ‘7월 26일 운동’ 소속으로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실패해 투옥됐다. 절치부심 끝에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낼 때도 형제는 함께했다. 권력을 잡은 이후 피델은 총리, 국가평의회 의장 등으로 49년 동안 국가를 통치했다. 군을 장악한 라울은 49년 동안 국방장관으로서 형을 도왔다. 해외에서는 피델이 훨씬 유명했지만 쿠바에서는 ‘라울주의’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라울의 역할도 컸다.
▷혁명 이후 카스트로 형제가 마주친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반미주의자였던 피델이 미국 기업가들의 재산을 몰수하자 미국은 1961년 쿠바와 단교했다. 이어 쿠바산 설탕 수입을 중단하고 석유 공급을 끊으면서 쿠바 경제의 숨통을 조였다. 쿠바는 소련의 도움을 받으며 버텼지만 1981년 집권한 미국 레이건 정부는 제재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쿠바는 1990년대 ‘특별한 시기’라고 불리는 경제위기를 맞기도 했다.
▷2008년 권력을 물려받은 라울이 19일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에게 공산당 총서기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이로써 62년간 이어진 쿠바의 ‘카스트로 시대’는 공식적으로는 막을 내렸다. 카스트로 형제가 집권하는 동안 쿠바에서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제한되는 등 시민들은 억압받았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쿠바의 주 수입원인 관광산업까지 직격탄을 맞아 국내총생산(GDP)이 11% 감소하는 등 경제가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쿠바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960년생으로 혁명 이후 세대인 디아스카넬은 젊은 시절 비틀스와 청바지를 좋아했고, 점진적인 개방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쿠바가 조속히 변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일대 카를로스 에이레 교수는 “군과 공산당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며 특히 라울의 아들, 사위 등 ‘카스트로 왕조’ 멤버들이 군의 요직을 맡고 있다”고 지적했다. 카스트로 형제가 반세기 넘도록 유지해온 쿠바의 사회주의 질서가 달라지려면 정치 지도자의 얼굴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장택동 논설위원, 동아일보(2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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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명문가 출신 체 게바라
쿠바서 입신양명, 볼리비아서 총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라디오 해적 방송이 만든 쿠바 혁명의 이인자
사춘기 때 성욕 주체 못 해… 7개월 오토바이 여행 후 공산주의자로
콩고·볼리비아 혁명 기획했다 실패, 농촌 게릴라 시대 이미 막 내려
누구는 이 사람을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그를 혁명 중독자에 무자비한 도살자라고 부른다. 호오가 극단으로 갈리는 이 인물이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입신양명하고 볼리비아에서 죽은 공산주의자 에르네스토 게바라다. 1928년 명문가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관상으로 보면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영국 배우 휴 그랜트가 이 계열인데 영리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으며 독선적이다. 어려서 얻은 천식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잘 씻지 않는 습성은 이때 생긴 것으로 당시 별명이 '돼지'였다. 사춘기 때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했다. 첫 경험은 집안 하녀였고 그 뒤로 나이, 몸매, 얼굴을 따지지 않고 침대로 끌어들였다. 여성 친화 도련님은 책도 많이 읽었다. 간디, 네루, 포크너에서 무솔리니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천성은 이때부터 발동된 게 아닌가 싶다.
23세 때 의대 선배의 꼬임에 빠져 낡은 오토바이로 남미를 횡단한다. 그때의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인데 20대에 보면 가슴이 벅차고 30대에 보면 지루하고 40대에 이르면 주인공들이 하도 철딱서니가 없어 끝까지 보기 힘들다. 7개월에 걸친 여행 끝에 그는 빈곤과 착취로 세상을 나누어 보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완성한다. 그런 에르네스토가 달려간 곳이 내전 직전의 과테말라였다. 그곳에서 좌익 정부의 붕괴를 목격한 에르네스토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했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과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를 몸에 새긴다. 얻은 게 하나 더 있다. 최초의 법률상 아내인 일다였는데 키가 작고 포동포동한 몸매에 눈이 찢어진, 미인과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 취향 같은 건 역시 없었다. 과테말라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멕시코로 달아났다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땅 부잣집 서자 출신인 피델 카스트로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몬타카 병영 공격 후 수감 생활을 하다 모호하게 풀려나 망명자 생활을 할 때였는데(장인이 정권의 내무부 장관) 피델의 박력 있는 말솜씨에 매료된 에르네스토는 기꺼이 쿠바 혁명에 동참을 결심한다(피델의 직업은 변호사).

1956년 정원 20명짜리 요트에 올라탄 82명의 혁명군은 우여곡절 끝에 17명만이 겨우 쿠바 땅을 밟는다. 이때부터 3만3000명 정부군과의 전투가 시작되고 2년 만에 수도인 아바나에 입성하는데 이 기적은 피델의 미디어 활용 능력 덕분이었다. 원정대 괴멸 소식이 퍼질 무렵 피델은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혁명군의 건재를 알리고 자신을 억압받는 쿠바 인민의 희망으로 포장하는 데 성공한다. 에르네스토 역시 비슷했다. 이방인인 그가 이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은 유일한 군의관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에르네스토가 담당했던 라디오 해적 방송 때문이었다. 전투는 지지부진한데 라디오에서는 늘 혁명군이 승리하고 있었다. 방송을 통해 그는 혁명군의 대변인이 되었고 쿠바 시민권을 받아 고위 관직에 오른다. 그가 산업부 장관에 임명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피델은 제정신이 아니군. 게바라 집안에서는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이야."
실제로 그는 경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를 옹호하는 분들은 그가 안락한 자리를 박차고 혁명을 찾아 떠난 것을 칭찬한다. 글쎄다. 유엔 연설에서 에르네스토는 소련이 마르크스를 잊었다며 맹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격분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저 자식을 잘라. 아니면 원조는 일절 없다"는 말로 피델을 압박했다. 자의 반 타의 반 에르네스토는 쿠바를 떠났고 아프리카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기획하지만 이미 농촌 게릴라 시대는 막을 내린 후였다.
풍파 많은 한 사나이의 삶은 여기서 끝? 아니다. 지금도 전 세계 젊은이들은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의 얼굴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체포에서 사살에 이르기까지의 어설픈 관리가 그를 영원한 혁명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홉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에르네스토의 사후 모습은 마치 연출한 것처럼 십자가 처형 후 끌어내려진 예수와 닮았다. 이 순교자의 모습과 베레모를 쓴 형형한 눈빛의 사진이 결합하면서 그는 영원한 정치적 생명을 얻었다. 이미지는 끝없이 복제된다. 전 세계 공산주의가 다 망해도 에르네스토는 살아남을 것이다. '체'라는 친근한 이름과 함께.
-남정욱 작가, 조선일보(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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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살된 체 게바라 가방에서 나온 詩노트

사자 갈기같이 긴 머리칼, 텁수룩한 수염, 비쩍 마른 얼굴, 빛나는 눈매, 큰 별이 그려진 베레모를 눌러 쓴 그를 '혁명의 아이콘', 혹은 '전사 그리스도'로 불렀다. 그는 39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67년 10월 9일, 한 사내가 볼리비아의 차코라는 마을의 작은 학교에서 볼리비아 특수부대 군인의 총에 맞아 죽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1967)'라는 긴 이름을 가진 그가 지난주 50주기를 맞은 체 게바라다.
'체'가 죽고 그의 배낭 속에서 색연필로 덧칠된 지도와 비망록 두 권, 손때 묻은 녹색 노트가 나왔다. 비망록은 일기, 녹색 노트에는 시가 적혀 있었다. 그는 중남미의 대표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페의 시 69편을 필사한 노트를 갖고 있었다. 체는 혁명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쉴 참이면 다른 병사들이 잠에 빠져들 때 큰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이 녹색 노트에 적힌 시를 읽었다.

체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는 의사로만 살지 않고, 남미의 인민 해방을 위해 안데스 산악지대에서 붙잡혀 죽음을 맞을 때까지 혁명 전사, 게릴라 전술가로 살았다. 체와 혁명 동지인 피델 카스트로는 그가 호의적인 태도, 균형 잡힌 인격, 창의성과 기발함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지성과 저항 정신을 갖춘 '완전한' 사람으로 꼽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20세기를 움직인 100인 중 하나로 평가했다.
열두 해 전 쿠바의 아바나를 찾았을 때 소년 여럿이 '원 달러! 원 달러!'하며 체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과 달러를 교환하자고 내 곁에 바짝 달라붙었다. 한때 우리 대학가에서 체의 평전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체의 초상이 박힌 티셔츠를 입는 게 유행이었다. 혁명가이자 독서광이었던 체! 쿠바 혁명을 이끈 일등공신인 체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 패션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체가 죽은 지 50년, 자본주의 국가의 청년에게서 혁명가로 추앙받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관광 상품으로 팔리는 이 아이러니라니!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조선일보(1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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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카스트로의 동지, 저항 문화의 상징으로
지난 25일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사망했어요. 동시에 그의 동지인 체 게바라(Ché Guev ara·1928~1967)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혁명가와 독재자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 카스트로와 달리 체 게바라는 저항적이고 자유로운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지요.
아르헨티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입니다. '체(Ché)'는 '어이! 친구'와 같은 친근한 호칭이랍니다.

1959년 체 게바라(왼쪽)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쿠바 혁명군 사령관과 함께 쿠바의 수도 아바나 시내를 행진하는 모습이에요. /AFP
성실한 학생이었던 체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에 입학한 뒤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여행하며 고통받는 빈민들 삶을 보고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멕시코로 건너간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기로 뜻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받았어요. 게릴라군을 조직해 쿠바로 침투한 두 사람은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답니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체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 총재와 공업 장관 등을 맡으며 명실상부한 '쿠바의 2인자'가 되었어요. 하지만 '화폐·기업·국가는 필요 없다'는 과격한 생각을 가졌던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와 달리 소련과 번번이 충돌했고, 결국 1965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새로운 사회주의혁명에 뛰어들었어요. 아프리카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친 체 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붙잡혀 죽음을 맞았어요.
다른 공산주의 독재자들과 달리 권력과 부에 집착하지 않고 혁명에 뛰어들었던 체 게바라는 사후에도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어요. 하지만 실제 그의 행적보다 외형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에 과도하게 영웅시됐다는 평가도 있어요. 게다가 쿠바는 그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나라가 되었어요.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 후 6년 동안 쿠바인 35만명이 카스트로의 강압 통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지난해까지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만 약 200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배준용 기자, 조선일보(16-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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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사망
한 시대의 끝이자 새 시대의 시작"
혁명 동지 체 게바라와 게릴라전
집권후 美와 대립하며 국교 단절, 구소련 核 배치하려다 전쟁 위기
전제 군주 외엔 최장 통치 기록… 차기 권력 두고 死後 혼란 가능성
개혁∙개방 속도는 더 빨라질 듯
쿠바의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25일(이하 현지 시각)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26일 자정이 지난 직후 국영 TV에 나와 "쿠바 혁명의 최고 사령관이 25일 밤 10시 29분에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인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2006년 장출혈 수술 이후 건강이 악화된 데다 고령으로 쇠약해진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쿠바 정부는 이날부터 9일 동안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 카스트로의 유해는 26일 화장을 거쳐, 수도 아바나에서 고향인 동부 지역의 산티아고 데 쿠바까지 전국을 순례하는 운구 과정을 마친 뒤, 다음 달 4일 고향의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 안장된다.
카스트로는 1959년 1월 혁명으로 풀헨시오 바티스타 친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 정권을 세운 뒤 2008년 건강을 이유로 은퇴할 때까지 49년간 쿠바를 통치했다. 1976년까지는 총리를, 이후에는 국가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20세기 이후 각국 지도자 중 전제 군주를 제외하곤 최장의 통치 기록을 세우며, '위대한 혁명가'라는 찬사와 '야만적 독재자'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사망 후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카스트로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26일 아바나의 식당은 모두 문을 닫았고, 거리의 음악 소리도 끊겼으며 대학생들은 캠퍼스에 모여 쿠바 깃발을 흔들며 "피델 만세, 라울 만세"를 외쳤다고 AP통신 등이 전했다. 반면,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리틀 아바나' 등 쿠바계 주민 밀집 지역에서는 쿠바계 주민 수천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폭죽을 터뜨리는 등 축제 분위기였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했다. 카스트로 집권 후 50만명 이상이 쿠바를 탈출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1926년 스페인 출신 이주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카스트로는 변호사로 활동하던 1953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실패하면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 후 특사로 석방된 그는 곧바로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체 게바라를 만나 게릴라 조직을 결성하고 쿠바 정부 전복에 나서 1959년 1월 마침내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렸다.
집권 후 토지개혁, 민간기업 국유화, 외국자본 몰수 등 공산화 정책을 추진한 그는 미·소 냉전 체제하에서 소련을 추종하며 서방과 맞서다 1961년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다. 1962년 10월에는 구소련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다 미국과 일촉즉발의 대결 상황까지 가는 '미사일 위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카스트로의 그림자가 사라진 쿠바는 개혁·개방의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라울 카스트로의 실용적 개혁 노선이 속도를 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쿠바 역사학자 엔리케 로페스 올리바는 뉴욕타임스에 "카스트로의 죽음은 한 시대의 끝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며 "라울이 더 많은 자유를 갖게 되면서 변화 과정이 빨라질 것"이라고 했다.
올해 85세인 라울이 공언한 대로 오는 2018년 권좌에서 물러나면 차기 권력을 놓고 혁명 세대와 비혁명 세대 간 충돌이 벌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쿠바 권력 서열 2위인 미겔 마리오 디아스-카넬 베르무데스 국가평의회 수석부의장은 올해 56세로, 쿠바 혁명에 참가하지 않은 세대다. 미국 연구기관인 '인터-아메리칸 다이얼로그'의 마이클 시프터 회장은 "권력층 내부에 분쟁과 대립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라울은 얼마나 빨리 대미(對美) 관계를 개선해 경제 제재에서 벗어날 것인지가 가장 큰 숙제이다. 미국과 쿠바는 2014년 적대 관계 청산을 선언했고 지난해 8월에는 국교를 회복했다. 올 3월에는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는 88년 만에 쿠바를 방문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쿠바가 정치·종교의 자유, 정치범 석방 등을 수용해야 한다"고 경고한 적이 있어 대미 관계 개선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우리 외교 당국은 쿠바와 관계 개선의 기회가 열릴 것으로 보고 있다. 쿠바 정부는 그동안 우리나라와 외교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김일성 전 주석과 깊은 유대 의식을 갖고 있었던 피델 카스트로의 존재 때문에 실천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욕=김덕한 특파원/김진명 기자, 조선일보(1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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