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
[5년 피땀, 2주 박수]
'2인자'
소련 유리 가가린이 1961년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하자 미국의 한 의원이 “미국이 2등이 됐다”며 “찰스 린드버그의 이름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대서양을 두 번째로 횡단한 사람 이름을 누가 안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인류 두 번째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비행사는 미국 앨런 셰퍼드다. 그 후 달까지 다녀왔는데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다.
▶누구나 2인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그게 지나쳐 파멸을 부르기도 한다. 1994년 릴리함메르 동계 올림픽 출전권을 두고 낸시 케리건과 경쟁하던 미국 피겨 선수 토냐 하딩은 케리건을 습격해 다치게 만들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서 당시 세계 최고였던 에티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와 맞선 일본 선수는 30㎞까지 아베베보다 앞섰지만 결국 역전당했다. 아베베를 이길 수 없다는 좌절감에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많은 2인자가 1인자의 존재에 괴로워한다. 이를 지칭하는 ‘살리에리 신드롬’이란 용어까지 생겼다. 1980년대 영화 ‘아마데우스’는 작곡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해 독살했다는 시나리오로 그러져 있다. 한국 축구 골키퍼 중엔 좋은 실력을 지니고도 1인자에게 밀려 끝내 월드컵 무대에 서지 못한 이가 있었다. 그의 아내가 TV에 나와 남편의 마음고생을 대신 토로했다. 스포츠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몇 해 전 중국에선 전교 2등이던 중학생이 1등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2000년대 중반, 김연아와 함께 세계 여자 피겨 스케이팅을 지배했던 일본의 피겨 스타 아사다 마오가 최근 인터뷰에서 ‘2인자 시절의 괴로움’을 털어놓았다. 2010년 벤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여자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3회 성공시키고도 김연아에게 금메달을 내준 일을 거론하며 “항상 1위가 되고 싶었다. 나는 즐기지 못했다. 은퇴 후에야 스케이트가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자기가 하던 일을 심한 경쟁 탓에 은퇴 후에야 즐긴다면 불행한 일이다. 1968년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2연패한 아베베는 이듬해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직 두 팔이 있다”며 털고 일어나 장애인 대회에 나갔다. 주변에서 좌절하지 않고 일어선 비결을 묻자 그는 “나는 남과 경쟁하지 않는다. 오직 나 자신과 싸울 뿐”이라고 했다. 어려운 일이지만 거기에 진실이 담겨있다. 곧 파리 올림픽이다. 성취를 위해 땀 흘려왔고 이 순간을 기다린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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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피땀, 2주 박수
극한 고통 이기고 기쁨 준 영웅들
지속적 관심으로 투혼 북돋워야
몇 년 전 일본 출장 때 일이다. 현지 언론은 온통 일본 육상 남자 100m에서 처음으로 마의 10초 벽이 깨진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기류 요시히데의 9초98 기록도 놀라웠지만 레이스가 펼쳐진 후쿠이 육상경기장에 1만 명 가까운 관중이 들어찬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8일 폐막한 도쿄 올림픽은 코로나 사태로 96% 경기가 무관중으로 치러졌다. 텅 빈 객석에 익숙한 한국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게는 별 낯설 게 없는 환경이었다.
한국 근대5종 첫 올림픽 메달을 딴 전웅태는 지난해 한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애달픈 처지를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근대5종을 잘 모른다”는 고민을 말하자 진행자 서장훈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게 답”이라는 처방을 내놓았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깜짝 주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번엔 다를까.
여홍철은 기자가 처음 취재했던 올림픽인 1996 애틀랜타 대회 체조 남자 뜀틀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체조 최초의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된 그는 시상대에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2차 시기 착지 실수로 세 발짝 물러나면서 0.031점 차로 금메달을 놓친 아쉬움이 컸다. “부모님과 감독님께 죄송할 뿐이다”라는 말을 반복하던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은메달에 그쳤다’, ‘통한의 눈물’이란 표현이 기사에 등장했다.
도쿄 올림픽 체조 여자 뜀틀에서 여홍철의 딸 서정이 19세 나이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여자 체조 선수 최초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된 그는 시상대에 올라 활짝 웃었다. 어떤 회한도 없어 보였다.
1년 연기됐다가 열린 도쿄 올림픽은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다. 막상 개막 후 17일 동안 열기는 폭염만큼이나 뜨거웠다. 올림픽의 주인공은 어렵게 무대에 오른 선수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한국은 금메달 7개, 톱10 진입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그러나 성적에 대한 시선은 25년 세월을 두고 메달을 딴 부녀의 상반된 반응처럼 달랐다.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쏟아낸 열정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체조, 수영, 육상, 근대5종 등은 불모지에서 값진 성과를 거뒀다. 높이뛰기 우상혁은 24년 만에 한국 신기록을 1cm 넘겼다. 여자 배구의 기적 같은 ‘해보자’ 4강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이번 대회는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 체육의 통합, 시도체육회 회장 직선제 시행 후 처음 맞은 올림픽이다. 새로운 시스템이 정치 논리에 휘말려 오히려 발전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있다. 양궁(현대차), 펜싱(SK)에서 보듯 장기 투자가 국제 경쟁력의 발판이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몇몇 뜻있는 기업인, 지도자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훈련하다 보면 근육이 터질 것 같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온다. ‘이 정도면 됐어’, ‘다음에 하자’는 말이 나온다. 99도까지 온도를 올려놓아도 1도를 넘기지 못하면 물은 끓지 않는다.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1분을 참아내야 다음 문이 열리고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갈 수 있다.”
김연아의 에세이에 나오는 내용이다.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에 맞서 마지막 1도를 채우려고 오랜 세월 피, 땀, 눈물을 흘렸을 게다. 무한능력의 투혼을 보인 그들 모두가 슈퍼 히어로였다.
P.S. 올림픽에 무심했던 가족, 지인들이 대회가 끝나 허전하다고 한다. 걱정 마시라. 베이징 겨울올림픽이 6개월 남았고, 파리 올림픽도 3년 후면 열린다.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을….
-김종석 스포츠부장, 동아일보(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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