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반정부 시위에 해외로 도피한 방글라데시 총리]
[방글라데시 총리 탈출의 교훈]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같은 이슬람교 믿지만, 언어·문화 달라 파키스탄서 독립해
최근 방글라데시 정치 상황이 뒤숭숭합니다. 반정부 시위로 셰이크 하시나(77) 방글라데시 총리가 사퇴한 후 새로운 과도정부가 들어섰어요. 이번 반정부 시위는 정부가 공무원 채용 때 독립 전쟁 유공자 후손을 우대하려 하자 만성적 취업난에 시달리던 시민들이 반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정부의 강경 진압에 300여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기소됐지만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총리가 인도로 도피하는 일이 벌어졌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1971년 독립 전쟁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에요. 그래서 목숨 걸고 싸운 독립 전쟁 유공자들을 특별히 예우해 왔다고 해요. 공직 채용 시 인원의 30%를 독립 전쟁 유공자 자녀 등에게 미리 할당하는 제도도 이러한 맥락에서 만든 거죠. 오늘은 방글라데시의 독립과 독립 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동·서 파키스탄의 갈등
방글라데시는 원래 1947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할 때 파키스탄의 일부인 ‘동파키스탄’이었어요. 지금의 파키스탄은 당시 서파키스탄이라 했어요. 두 지역은 한 나라였지만, 인도를 사이에 두고 2000km가량 떨어져 있었어요. 또 두 지역은 많은 이가 이슬람교를 믿는 건 같았지만 인종·언어·문화 등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이 정부와 군대 요직 등을 독점해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어요.
그러다 1950년대 초반 벵골어 운동으로 동파키스탄의 민족주의가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동·서 파키스탄의 언어 갈등은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부터 계속 있었는데요. 1940년대 후반 의회에서 의원들이 서파키스탄 언어인 우르두어 등으로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어요. 그러자 동파키스탄 측 의원들은 동파키스탄인이 많이 사용하는 벵골어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부 지도자들은 동파키스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이에 동파키스탄의 학생과 지식인, 정치인들이 분노합니다. 1952년 동파키스탄의 대학생들과 정치 운동가 등이 벵골어 사용 운동 시위를 벌였고, 많은 학생이 경찰의 진압에 다치거나 숨졌어요. 그러자 시위는 더욱 격해졌고, 결국 정부는 1956년 벵골어도 공식 언어로 인정합니다. 벵골어 사용 운동은 동파키스탄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했고, 이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등에 영향을 주게 돼요.
이렇게 동파키스탄은 민족의 언어 정체성은 지켜냈지만 계속해서 정부의 차별을 받습니다. 1960년까지 공무원 중 벵골계, 즉 동파키스탄인은 약 3분의 1밖에 안 됐다고 해요. 군사 시설과 경제 지원도 서파키스탄에 집중돼 있었죠.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을 마치 식민지처럼 이용했어요.
1971년 독립 전쟁
그러던 중 1970년 12월 동파키스탄 독립을 주장해 온 아와미 연맹이 선거에서 의석을 절반 이상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은 정부는 국회 개회를 무기한 연기했어요. 이에 아와미 연맹의 당수였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은 1971년 3월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군을 결성했습니다.
서파키스탄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어요. 이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300만명 이상 학살당하고, 피란민이 30만명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요.
하지만 전쟁 양상은 인도가 동파키스탄을 지원하면서 점차 변해갔고, 결국 12월 16일 서파키스탄이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할 수 있게 됐답니다. 아와미 연맹의 당수였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은 1972년 1월 방글라데시 초대 총리가 됐는데요. 그의 딸이 얼마 전 반정부 시위로 사퇴한 셰이크 하시나입니다.
방글라데시는 독립 전쟁 유공자들을 ‘자유의 투사’라고 부르며 예우했어요. 자유의 투사들은 매달 받는 사례금 외에도 새해 수당, 승전 기념일 수당 등을 받고 일부 세금 면제 혜택도 받습니다.
최근 시위의 발단이 된 공직 할당제는 1972년부터 있던 제도예요. 처음에는 독립 전쟁 유공자가 대상이었지만 이후 유공자의 자녀와 후손으로 대상이 확대됐다고 해요. 하지만 공무원 일자리의 절반 이상이 유공자 자녀 등에게 할당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2018년 해당 제도가 폐지됐는데요. 폐지된 이 제도를 재도입할 조짐이 보이자 대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죠.
방글라데시에서 공무원은 인기 직업 중 하나예요. 안정적이고 보수가 높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매년 3000여 공직을 두고 40만명이 경쟁할 정도라고 해요.
현재 수립된 과도정부는 빈민들을 위한 소액 대출 제도를 개발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겸 사회운동가 무함마드 유누스(84)가 이끌게 됐는데요. 야권과 시민 단체뿐 아니라 반정부 시위를 이끈 대학생 단체들이 국정 혼란을 수습할 지도자로 유누스를 강력히 지지해 왔다고 해요. 그런 만큼 이제 방글라데시의 혼란이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조선일보(2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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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부 시위에 해외로 도피한 방글라데시 총리
시위는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이자 도구입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부는 폭력을 동원해 이를 막으려 합니다. 방글라데시 정부 역시 무장한 경찰을 동원해 ‘공직 할당제’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탄압했습니다. 군중의 분노는 총리 퇴진 요구로 번졌고 결국 5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총리 관저를 습격했습니다. 이에 셰이크 하시나 총리(77·사진)는 헬리콥터를 타고 인도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방글라데시를 20여 년간 통치한 하시나 총리는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1971년)을 이끈 초대 대통령이자, ‘방글라데시의 국부’로 불리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의 딸입니다. 1975년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을 잃고 인도로 망명했다가 1981년 고국으로 돌아온 뒤 부친의 소속 정당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군부 통치 시절 거리로 나와 민주화 시위를 벌이면서 국민적 우상으로 떠올랐고, 8선 의원의 경력을 쌓으며 1996년 총리에 당선됐습니다.
하시나 총리 집권 초기 방글라데시의 경제 발전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때 세계 최빈국이었던 방글라데시는 의류 산업 중심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됐습니다. 10년 동안 방글라데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배가 됐고, 20년간 빈곤층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25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부정부패 의혹과 함께 지나치게 인도에 종속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2001년 총선에선 방글라데시국민당에 정권을 내줬습니다. 2009년 하시나 총리가 다시 정권을 잡았지만 이번에는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기를 거치며 물가는 치솟고 일자리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습니다. 하시나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경제 성공의 결과가 골고루 분배되지 않고 총리와 그 측근들의 배만 불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여기에 하시나 정부의 인권 탄압 문제도 국제사회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번 시위의 원인이 된 할당제 문제도 방글라데시의 오랜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곪아 터진 것입니다. 현재 방글라데시의 청년 실업률은 40%에 달할 정도로 심각한데, 그나마 안정적인 공직의 30%를 현재 기득권인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준다고 하니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죠. 민주화 시위를 통해 국민적 우상으로 올라선 지도자가 마지막에 시민들의 시위로 도망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민심을 잃은 지도자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이의진 도선고 교사, 동아일보(2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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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총리 탈출의 교훈
우리에겐 이주 노동자 주요 송출국 정도로 알려진 방글라데시의 근현대사는 한국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열강 통치를 벗어나자마자 혹독한 시련을 겪은 것부터가 그렇다. 1947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했을 때는 2000㎞ 떨어진 파키스탄의 일부였다. 지리·언어·인종 등이 완전히 달랐는데도 강대국 이해관계에 휘둘려 온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차별과 탄압 속에 커져간 독립 열망은 고유 언어인 벵골어 사용 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분출됐다. 훗날 초대 대통령이 되는 무지부르 라만이 1971년 3월 독립을 선포하고 파키스탄이 무력 진압에 나서면서 독립 전쟁으로 이어진다. 파키스탄이 항복했으나 이 과정에서 최대 300만명이 목숨을 잃는 등(추산) 피해도 막심했다. 건국 뒤에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라만 대통령이 피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좌절의 순간만 있던 건 아니다. 군부 독재에 맞섰던 라만의 딸 하시나가 총선에서 승리해 1996년 총리에 오르던 순간은 민주화의 첫발로 각인됐다. 한반도의 절반 정도 되는 면적에 1억7000만명이 모여 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 밀도는 빈곤의 족쇄에서 성장의 동력으로 변모했다. 한국 등 해외로 나간 노동자들의 외화벌이도 경제발전의 주춧돌이 됐다. 해마다 7% 안팎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면서 저소득 국가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도 높아졌다.
그런 가운데 시민 의식이 성숙해 ‘공정’이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다. 그 상징적 움직임이 2018년 터져 나왔다. 1971년 독립 전쟁 유공자 가족에게 공무원 채용 인원의 30%를 할당해 주던 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애국자 예우 명목으로 집권 세력끼리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는 현실에 분노한 젊은이와 서민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놀란 정권은 제도를 폐지했지만, 올해 초 총선 승리 뒤 제도를 부활하려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촉발했다.
분노의 강도는 6년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나라 곳곳에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일었고, ‘민주화의 상징에서 변절한 독재자’로 지탄받던 하시나는 헬기에 급히 몸을 싣고 인도로 도망쳤으며, 성난 군중은 그의 아버지 동상까지 뽑아내려 했다. 모두가 일군 결실을 자신들의 것인 양 이권 대물림의 기회로 활용한 특정 정치 세력의 욕심이 빚어낸 최후다.
이 나라의 궤적 곳곳에서 한국의 어제와 오늘이 겹쳐 보인다. 한국도 열강의 패권 다툼 속에 어렵게 공화국을 세웠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딛고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다. 그런데 모두가 이룩한 성과를 편을 갈라 폄하하고, 특정 정파가 자신들을 유공자로 치켜세우고 대대로 혜택을 보겠다며 입법을 시도하는 일이 지금껏 벌어져 왔다. 민심을 거스르려는 이들에게 방글라데시의 상황이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지섭 기자, 조선일보(2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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