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잘 내는 법
어릴 적 좋아하던 장난감이 있었습니다. 태엽으로 움직이는 거북이. 등껍데기는 초록이었고 몸통은 노랑이었습니다. 거북이는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둥근 챙 달린 흰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거북이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꼭 닮은 작은 거북이와 늘 함께였습니다. 큰 거북이의 꼬리에 달린 실이 작은 거북이와 이어져 있던 것입니다. 작은 거북이를 손에 쥐고 천천히 뒤로 당겼다가 떼면 큰 거북이는 제법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어 실이 팽팽해지며 작은 거북이도 앞서가는 큰 거북이를 따라나섰습니다.
어느 날 장난감 태엽이 망가졌습니다. 화나고 심술궂은 상황에서 분풀이하듯 너무 세게 잡아당긴 게 문제였습니다. 답답함에 몇 번 더 당기자 큰 거북이와 작은 거북이를 연결하던 실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그때부터 두 거북이는 영영 같은 길을 걸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자주 화가 납니다. 상대의 잘못과 실언과 무례 앞에서 마음속 화는 신작로처럼 넓은 길을 하나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매번 눈앞에 난 길을 무작정 걷다 보면 이내 이상한 느낌이 엄습했습니다. 어쩌면 길을 잘못 든 것 같다는 불안함, 다른 길로 들어서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 고민하는 와중에도 걸음은 계속되기 마련입니다. 길을 가르쳐줄 사람도 없고 옷깃 붙잡고 물을 사람도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있으니까. 점점 길은 좁아지고 결국 막다른 길을 만나게 됩니다. 화가 만들어낸 길의 가장 큰 문제는 뒤돌아 걷는다 해도 처음 자리로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상대의 잘못에 더해 화를 내는 과정에서 생긴 내 잘못이 뒤섞여 미로가 돼버린 탓입니다.
지금도 자주 화가 나지만 그 화를 다 내고 살지는 않습니다. 참는 게 능사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화가 날 때마다 어떻게 하면 화를 잘 낼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터득한 방법 중 한 가지는 화를 말로 내지 않는 것입니다. 글로 씁니다. 글재주가 있든 없든 상관없습니다. 먼저 종이와 펜을 준비합니다. 들끓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을 분별 없이 적습니다. 처음에는 종이 한 장으로 부족할 거라 생각되지만, 막상 적다 보면 더 이상 쓸 말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상대방에게 전할 문장을 골라야 합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넋두리처럼 보일 것은 과감하게 쳐냅니다. 그렇게 요점을 추려 새 종이에 옮겨 적습니다. 이제 작은 메모지 하나면 충분할 양입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나 메신저를 이용해도 됩니다.
이쯤 되면 마음속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길이 하나 펼쳐집니다. 상대의 잘못이 만든 길이 아닌 나의 이해가 만든 길입니다. 애써 정서한 종이를 구깁니다. 휴대전화 전송 버튼을 누르는 대신 메시지를 지웁니다. 여유와 아량이 길섶마다 피어납니다. “편지를 쓰게 해 다오 이날의 할 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 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 다오 (중략)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 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 다오.”(김남조 시 ‘밤 편지’)
-박준 시인, 조선일보(2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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