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한국의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 있는가?] [삼권분립은.. ]

뚝섬 2025. 9. 30. 08:21

[한국의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 있는가?]

[삼권분립은 쟁론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생태계 그 자체]

 

 

 

한국의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 있는가?

 

[김대중 칼럼]

사법부를 향한 공격과 선출 권력이 위라는 해석은

'잠재적 독재'를 닮아간다
좌파의 장기집권을 대한민국이 용납할까
국민의 선택으로 해결해야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여당 의원들의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이날 임명식에서 조 대법원장은 “헌법 정신을 되새겨 의연한 자세로 오직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재판하라”고 했다. /대법원

 

검찰청 폐지, 방송통신위 폐지, 대통령실 예산 장악, 대법원장 청문회 출석 요구, 국회 법사위 독주, 내란 특검, 자주국방론…. 이재명 정권 출범 4개월 동안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대형 변화들을 보면서 미국 하버드 대학 두 정치학 교수가 트럼프 1기 출범 후(2018년) 펴낸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새삼 들여다봤다. 민주주의는 쿠데타가 아닌 또 다른 형태, 즉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의 손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는 것을 주제로 한 책이다. 이 책은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내던진 정당’ ‘경쟁자를 적(敵)으로 간주하는 정치인’ ‘언론을 공격하는 선출된 지도자’ 등을 민주주의 붕괴 조짐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또 이렇게 지적했다. “선출된 독재자는 심판을 포획하고 정적(政敵)을 매수하거나 무력화하고 게임의 법칙을 바꿈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한다(여기서 심판은 사법부를 의미한다). 한 가지 중요한 아이러니는 민주주의 수호가 때로는 민주주의 전복의 명분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잠재적 독재자는 자신의 반민주적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 위기, 자연재해, 특히 전쟁과 폭동, 테러와 같은 안보 위협을 구실로 삼는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유독 크게 우려하는 것은 사법부(대법원)에 대한 현 정권의 집요한 공격이다. 이 대통령은 사법부는 (국민의) 선출 권력인 입법부 밑에 있다는 상하(上下)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대법원장은 선출 권력(즉 대통령이나 여당)에 종속적이라는 전대미문의 해석을 들고나온 것이다. 그 이유를 이 책은 이렇게 분석한다. “잠재적 독재자는 심판을 매수한다. (중략)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사로 사법부를 채우고 법 집행기관의 힘을 무력화함으로써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권력을 휘두른다.”

 

이 책에 의하면 “대부분의 경우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은 점진적으로 이뤄진다. 선거는 주기적으로 실시된다. 야당 정치인은 여전히 의회에서 활동한다. 신문도 그대로 발행된다. 독재자의 시도는 종종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부패와의 전쟁, 민주주의 의식 개선, 국가 안보 강화와 같은 시도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노력으로 비춰진다.”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 두 교수는 트럼프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허물고 있다고 비판하며 쓴 것이지만 지금 트럼프 2기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이 책의 내용은 놀랍게도 트럼프와 이데올로기 면에서 좌우로 대칭적인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과 좌파 정권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어찌 보면 이재명 정권의 스타일은 트럼프 정권과 닮은 점이 많다. 지향하는 점은 다르겠지만 그것을 추구해 들어가는 방식, 정치적 상대방을 가차 없이 무릎 꿇리는 방식, 대법원을 다루는 솜씨, 임기 후 자신에 대한 그 어떤 법적 소추 가능성도 차단하는 철저함, 외교 면에서 적과 동지를 뒤섞는 애매함, 그런 것들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李)쪽에서 백악관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런 면에서 앞에 언급한 민주주의 붕괴에 관한 지적들이 더욱 우리의 눈길을 끄는지도 모른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의 외교적 자만심과 공명심을 잘 이용해 대북 유화정책에 끌어들이는 방식을 취하는 것 같다. 미국 내 애틀랜타 현대 공장의 기술자들이 ‘불법 체류’로 쇠사슬에 묶이고 3500억달러 요구로 한국인의 감정이 크게 상한 타이밍을 이용해 자주국방을 내세워 미국에의 종속으로부터 탈피할 것을 거론한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 증권거래소 방문 연설에서 “북한과의 협상의 역량과 의지를 가진 사람은 당신이 유일하다”고 트럼프를 추켜세웠다. 이런 것을 보면 이 대통령은 이른바 동맹파와 친북파의 중간쯤에 양다리를 걸치고 사태 여하에 따라 양쪽에 무게를 안배하는 듯한 게임을 당분간 계속할 것 같다.

 

이 대통령이 이 책에서 말하는 ‘잠재적 독재자’인지는 좌우 진영에서 보는 시각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정부가 취하고 있고 또 가고 있는 ‘방향’은 언제든지 국민의 선택에 따라 임기가 끝나면 물러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 붕괴론에서 거론되는 나라들은 대부분 한 사람에 의한 장기 집권 체제다. 대한민국이 이제 한 사람에 의한 장기 집권 체제로 가는 길을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정권에서 벌어지는 이 ‘잠재적 독재’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좌파의 장기 집권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는 결국 국민의 선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김대중 칼럼니스트, 조선일보(2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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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분립은 쟁론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생태계 그 자체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만든 '천부인권'과 '사회계약론'이 기본
'다수결의 원리'는 '다수의 독재'로 흐를 수 있어 삼권분립 필요
야구장 없으면 야구팀들은 무용지물… 오류 다시 범하지 말자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를 만든 이들은 18세기 계몽사상가였다. 그중 핵심이 되는 것은 ‘천부 인권’과 ‘사회계약론’이라는 것을 필자는 루이 알튀세르에게 배웠다(‘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프랑스 대학 출판부, 1959)

 

“사람은 사람답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진술로 잘 알려진 천부인권은 만인에게 주권을 부여하는 원리로 기본권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인식되어 왔다. 한데 이것은 사람의 본래적 위엄에 기댄 명제이다. “바퀴벌레는 바퀴벌레답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진술이 자아낼 헛웃음을 생각하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태생적 존엄을 기정사실로 하였으니, 이에 뒷받침되어 ‘다수결’ 원칙이 나왔다. 사람은 본래 정의로우니, 그 수가 정의의 권능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민주’를 표방하는 모든 정부, 정당은 이 원리를 절대 지표로 삼는다. 그런데 계몽사상가들이 천부인권을 강조한 건 왕권과 벌이는 싸움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천부인권은 구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동원된 것, 즉 과거에 대한 현재의 승리를 보증하는 것이다.

 

반면 이는 현재의 인간들에게 미래를 보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인 주권은 자유의 충돌을 필연적으로 야기하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주체들 상호 간의 합리적 소통 논리가 수립될 때만 공존과 공진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부인권이 과거-현재의 타임라인에 위치한 것과 달리, 사회계약론은 현재-미래의 타임라인에 위치한다.

 

이 시간대의 차이는 아주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군주제 폐지와 민주사회의 등장으로 ‘천부인권’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원리상 투쟁 대상인 왕권은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부인권의 파생물인 ‘다수결’ 원리만이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다수의 독재로 흘러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정 대표는 이날 "우리 국민은 불의한 대통령을 다 쫓아냈는데 대법원장이 뭐라고 이렇게 호들갑이냐"라며 "진짜 삼권분립을 망가뜨린 사람은 삼권분립의 최후 보루여야 할 조 대법원장의 대선개입 의혹" 이라고 했다. /뉴스1

 

거기서 두 가지 대안이 나왔는데, 둘 다 불완전하였다. 하나는 직접민주주의를 대의민주주의로 간접화하는 것이었다. 국민의 대표자로서 의회가 별도 장치로 세워졌다. 그러나 다수를 소수의 대표자가 대신한다는 것은 권력의 순도에 대한 기대를 동반하는 것인데, 그 대표자 집단의 순결성이 전제될 수 없었고, 거꾸로 더 나쁜 불순물 덩어리가 국민 전체를 오염시킬 위험이 있었다(실제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몸살이 이것이다).

 

또 한 대안은 다수에 의한 폭력을 법으로 통제하는 것이었다. 사법 권력의 장치가 만들어졌다. 다만, 권리 보호보다 금기와 처벌 권능이 도드라져서, 공동체를 와해시킬 위험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기에 로베스피에르가 강력한 법적 제제에 근거하여 혁명의 누수를 차단하려 한 공포정치가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삼권분립론은 이 세 가지 권력, 즉 집행 권력, 의회, 사법부 각각의 기능을 보전하면서 그 불완전성을 제어하고자 고안한 탁월한 아이디어였다. 몽테스키외의 유명한 명제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권력을 막아야 한다(‘법의 정신’, 11장 4절)는 금언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철저히 공평할 때만이 상호 제어가 가능하다. 그게 삼권분립의 핵심이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독일 철학자 칸트

 

이 점에서 근대정신을 체계화한 칸트의 권력분립론은 특별히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칸트는 민주주의보다 ‘공화제’를 옹호한 사람이었다. 민주주의와 공화제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는 다수결의 문제점에 칸트가 착목했음을 가리킨다. “권력분립 없이 조직된 민주주의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제정한 법을 집행하며, 이로 인해 자신들을 국가의 주인으로 여기고 종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다수의 의지는 자동으로 일반 의지를 대표한다고 간주되며, 따라서 ‘모두’가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마저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런 부동의에 아랑곳 않고 반대로 결정한다; 즉, 모두’(를 표방한 어떤 집합체)가, 진짜 ‘모두’가 아니면서도, 결정권을 행사한다. 이것은 일반 의지와 자유에 대한 모순이다.”(제프리 에이브럼슨, ‘미네르바의 부엉이: 서양 정치사상의 전통’, 하버드대학 출판부, 2009)

 

이 때문에 권력분립이 모든 것에 앞서는 기반(基盤)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민주주의를 향하고 있을 때 칸트는 권력분립 쪽으로 가지를 비틀었다. 그 가지가 뻗어나간 자리인 공화제에서 비로소 국민의 ‘자유’는 “원초적 계약의 개념에 의해 ‘법의 규제’를 받아들인다.” 즉 자유와 법이 하나로 통하게 된다. 

 

권력분립론은 앞서 말한 ‘사회계약론’의 연장선에서 개발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싸우는 데 붙들린 다수결 원리를 미래 쪽으로 돌린 획기적 전환점이자, 권력 간 분쟁을 조정하는 유일한 클러치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의 생태계 그 자체이다. 가령 야구팀은 무수히 많을 수 있으나, 야구장이 없으면 그것은 모두 무용지물이다. 권력분립론은 그 야구장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권력의 위계를 나누고, 어떤 권력의 수장을 다른 권력의 성원들이 겁박하는 건, 이념 투쟁이 아니다. 그런 행동은 말 그대로 정치 환경을 통째로 망가뜨리고 말겠다는 자멸적 충동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미 해방 공간에서 ‘다수결 원리’에 목매었던 많은 사람이 월북을 선택했다가 숙청당한 실례를 잘 알고 있다. 당시 넌지시 다수결 원리를 비판한 홍명희는 북한에서 살아남았으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할 것이다. 필자는 오늘의 한국 정치가 80년 전의 오류를 다시 범하지 않기를 정말 바란다.

 

-정명교 연세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조선일보(2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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