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사 언니, Take care.”]
[페어 플레이의 감동]
[K컬처는 미래 산업의 '숲' 일궜는데, 왜 K스포츠는 '온실'에 머무나]
“잉사 언니, Take care.”

완벽한 경기를 완벽한 승리로 완성한 건 ‘삐약이’ 신유빈 선수의 인터뷰였다. 13일 홍콩에서 열린 월드테이블테니스(WTT) 대회에서 신 선수는 임종훈 선수와 혼합복식 조를 이뤄 우승했다. 이 대회는 WTT 시리즈 경기 성적이 상위권인 선수들을 초청해 치르는 일종의 ‘왕중왕전’이다. 임종훈-신유빈 조는 남녀 단식 세계 1위인 왕추친-쑨잉사 조와 결승전에서 맞붙어 3-0으로 완파했다. 우승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신 선수는 맞상대였던 네 살 위 쑨 선수에게 “잉사 언니, Take care(건강 챙기세요)”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임종훈-신유빈 조는 왕추친-쑨잉사 조와 파리 올림픽, 도하 세계선수권 대회 등에서 6번 맞붙어 6패를 기록했다. 이날 값진 첫 승리를 만끽할 법도 한데 신 선수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발목 부상을 안고 경기에 임한 쑨 선수부터 찾았다.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고 쑨 선수도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어진 인터뷰에선 그는 “운동선수에겐 몸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저도 마음이 아프다”라고 했다. 임 선수 역시 “프로페셔널하게 경기를 해 준 왕추친-쑨잉사 선수에게 고맙다”고 했다. 이들의 인터뷰를 지켜본 홍콩 관중들은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이날 경기는 스포츠 정신의 ‘정석’ 같았다는 평가다. 부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 선수와 부상당한 상대 선수를 걱정하며 승리 앞에서 겸손한 선수…. 아름다운 경쟁은 중국인의 마음까지 녹였다. 웨이보 등 중국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우승 세리머니를 자제하고 중국 선수를 배려한 신 선수의 매너를 칭찬하는 글이 이어졌다. 오랜 시간 살얼음판 같던 한중 관계에서 신 선수가 외교관 100명이 못 할 일을 해낸 것 같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여자 단식 동메달 결정전에서 신 선수는 일본의 하야타 히나 선수에게 접전 끝에 패했다. 아깝게 진 경기인데도 상대 선수에게 먼저 다가가 밝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그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신 선수는 “나를 이긴 상대들은 그만큼 나보다 더 오랜 기간, 묵묵하게 노력했던 선수들”이라며 “그런 점은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고 했다. 당시에도 일본 언론과 SNS에서 신 선수에게 매료됐다는 반응이 나왔다.
▷사실 스포츠 선수끼리는 국경, 인종, 언어를 넘어 우정을 나누곤 한다. 훈련 과정은 얼마나 고되고 경기는 긴장되는지, 승패에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얼마나 많은지, 정당한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는 패배는 얼마나 쓰라린지 ‘동병상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 선수는 “다들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경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반경이 국경을 넘어선다는 것을 ‘삐약이’ 신 선수가 보여준다.
-우경임 논설위원, 동아일보(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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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 플레이의 감동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치열한 승부가 펼쳐지는 현대의 검투장이지만 1999년 웨스트햄과 에버턴의 경기는 달랐다. 1대1로 팽팽한 접전 상황에서 에버턴 골키퍼가 부상으로 쓰러졌다. 이때를 노려 웨스트햄에서 쏘아 올린 공이 최전방으로 날아들었다. 머리만 대도 골을 넣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공격수가 손으로 공을 잡아 경기를 중단시켰다. 득점 기회를 포기한 이유를 묻자 그는 “축구에는 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지난 14일 열린 대한민국과 볼리비아 축구 대표팀 경기에서 우리 선수의 부상을 막아준 볼리비아 골키퍼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공을 향해 몸을 날린 이재성의 머리가 골대에 닿을 뻔하자 골키퍼가 손으로 이재성의 머리를 골대 밖으로 밀어내는 듯한 장면이 포착됐다. 볼리비아 골키퍼가 의도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손이 아니었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상황이었다. 소셜 미디어에 ‘진정한 페어플레이’ ‘상대 선수도 지켜주는 멋진 동료애’ 같은 찬사가 쏟아졌다.
▶반칙과 눈속임이 난무하는 스포츠판이지만 페어 플레이가 감동을 주는 장면이 적지 않다. 2012년 스페인에서 열란 국제 육상대회에선 압도적 기량으로 1등을 달리던 선수가 결승점을 착각해 멈춰서는 실수를 했다. 2위로 뒤따르던 선수가 알려준 덕에 무사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시상대 정상에 설 기회를 날린 선수는 “나는 떳떳한 2위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독일 축구대표를 지낸 클로제는 현역 시절 ‘정직한 스트라이커’로 사랑받았다. 날아든 공이 자기 몸을 맞고 들어가 골인으로 인정받자 “내 손에 맞았기 때문에 무효”라고 자수한 적도 있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위험한 2루 슬라이딩이 사라지고 몸에 맞는 볼이 나오면 투수가 타자에게 모자를 벗어 사과하는 게 당연한 매너가 됐다. 2019년 도하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앞서 달려가던 선수가 탈진해 주저앉자 뒤따르던 선수가 부축해 결승선까지 수백m를 함께 걸었다. 관중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졌다. 승부에만 집착해선 나올 수 없는 장면이다.
▶경기장을 찾는 관중도 승부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어느 조사에서 ‘경기를 보고 행복했던 이유’를 물었더니 ‘승리해서’라는 대답은 14%에 불과했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가 47%로 가장 많았다. 페어 플레이와 동료애의 중요성을 연구하는 ‘스포츠 철학’도 등장했다. 반칙을 포함한 윤리적 일탈을 ‘경쟁의 진실성을 훼손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신의 손’으로 월드컵을 들어 올린 마라도나는 운이 좋았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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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는 미래 산업의 '숲' 일궜는데, 왜 K스포츠는 '온실'에 머무나
WBC는 MLB가 운영하는 수익 사업, 성과는 다 그들이 가져간다
지원과 성적 중심 등 한계… 데이터와 AI 기반 산업으로 경쟁력을
전 세계가 ‘K’를 소비한다. BTS가 공연을 열면 도시 경제가 출렁이고, ‘오징어 게임’은 한 달 만에 1억4000만 가구를 사로잡았다. 뉴욕 시민은 던킨도너츠 대신 김밥을 찾고, 파리의 마트에서는 한국 소스와 과자가 매대를 채운다. 한 해 K콘텐츠 수출액은 160억달러에 달하고, 넷플릭스의 K콘텐츠 투자액은 누적 4조원이 넘는다. K컬처는 유행을 넘어 IP·팬덤·플랫폼이 결합된 미래 산업으로 성장했다.

반면 K스포츠는 이 흐름에 뒤처졌다. 세계적 선수도 배출하고 올림픽·월드컵도 개최하며 세계 중심에 선 듯하나 산업 경쟁력 관점에서 보면 착시다. 우리는 설계자보다 참여자에 가깝다. IOC와 FIFA는 중계권·상업 패키지로 수조 원의 수익을 올린다. 우리는 그들이 설계한 판에 돈을 대고, 선수로 뛰고, 대회 유치를 대가로 거액을 지출한다. 흥행은 우리가 책임지지만, 성과는 그들이 가져간다.
WBC는 MLB가 운영하는 수익 사업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이 대회에 참여하고 중계권과 티켓 구매, 스폰서를 해주지 않으면 애당초 성립이 안 된다. 일본은 불참을 불사하며 상업적 권리 확보를 시도했다. 이에 더해 일본은 주도적으로 프리미어12라는 대항마를 창설했다. 한국 야구는 좋은 대회 성적 이상의 욕심이 없어 보인다.
LPGA 역시 한국의 스폰서십과 중계권료, 그리고 우리 선수의 활약이 없으면 존립이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LPGA의 지배 구조, 수익 권한에 어떠한 영향력도 없다. 손흥민이 프리미어리그(PL)에서 활약하며 고액 연봉을 받았지만, 그들이 한국에서 벌어간 수익은 비교가 안 되게 크다. 놀랍게도 국내 4대 프로 리그의 중계권료 총합이 PL 한 개 구단의 연간 중계권 수익보다 작다.
K컬처는 일찍이 산업화의 길을 택했다. 삼성영상사업단, 오리온 등 대기업과 일신창업투자 등 선도적 자본 투자자들이 민간 주도 시장 논리에 따라 산업 구조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창작, 제작, IP, 유통, 팬덤 확장으로 이어지는 완결형 산업 밸류체인을 구축했다.
K스포츠는 산업이 아니라 지원 중심 구조에서 태동하고 자라났다. 대기업 자본은 투자보다 후원,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성격이 강했다. 이 차이가 한국 스포츠의 성장 방식을 결정했다. 한쪽은 산업의 근육을 만들었고, 다른 한쪽은 보호막만 두껍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국 스포츠는 네 가지 구조적 한계에 갇혔다.

2022년 잉글랜드 프리머어리그(EPL) 득점왕 트로피를 들고 있는 손흥민. 손흥민이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며 고액 연봉을 받았지만, 그들이 한국에서 벌어간 수익은 비교가 안 되게 크다./토트넘 SNS·뉴스1
첫째, 행정 중심 거버넌스다. 의사 결정의 기준이 시장 논리가 아니라 행정, 정치 논리에 좌우된다. 대기업과 중앙정부, 지자체의 지원이 생존을 보장하니, 운영자들의 시선은 시장보다는 예산 배정에 가 있다.
둘째, 지나친 경기 성적 중심 KPI(핵심 성과 지표)다. 성적은 선수와 감독의 당연한 목표다. 리그·구단·협회 리더들의 목표는 산업 자산 축적과 생태계 성장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운동장과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의 목표가 단기 경기 성적에만 매몰된 경우가 많다. 성적은 1년의 시간이고, 산업은 10년의 시간이다.
셋째, 안정의 역설이다. 코로나 시기 유럽 축구팀이 다수 파산했다. 국내의 경우 무관중 상황에서도 한 군데도 문 닫지 않았다. 유럽의 축구 산업 리더들이 매년 안정된 예산을 받는 우리 프로 구단의 특이한 구조를 접하면, 20년짜리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겠다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 구단들의 호흡은 대개 3년을 넘지 않는다. 온실에 꽃은 피지만 숲이 자랄 수는 없다.
넷째, 열악한 수익 구조다. 수익 구조가 입장권·스폰서·중계권에 국한된다. 더 큰 문제는 이들조차 시장가격이 아니라 관계, 지원 논리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IP·디지털·데이터·관광·교육·라이프스타일·2차 콘텐츠 등 경기장 밖 파생 수익 모델은 여전히 태동기다.
눈높이 변화가 절실하다. 시즌 승리를 넘어 산업 설계를 지향해야 한다. 의사결정 구조를 행정적 언어에서 시장 논리로, 리더십 KPI를 경기 성적에서 산업 성과로, 안정적 지원 구조에서 투자형 자본 전제 성과 기반 경쟁 구조로 바꿔야 한다. 티켓·스폰서·중계권이라는 3대 수익의 시장 친화적 발전과 경기장 밖 가치의 파생, 확장을 통한 산업화도 필수다.
최근 스포츠산업 성장의 핵심 요인이 AI·빅데이터 등 기술 발전과 더불어 빠르게 바뀌고 있다. MLB는 ‘스탯캐스트’로 초당 수백 프레임의 경기 데이터를 분석하고, PL 구단은 AI 기반 팬 행동 예측 모델로 티켓 가격과 MD 수요를 실시간 조정한다. NBA는 글로벌 팬 데이터로 디지털 매출을 폭발적으로 키우고 있다. 경기장 안 퍼포먼스보다 경기장 밖 데이터, 2차 콘텐츠, 게임화, OTT, 팬 데이터, 디지털 경험이 더 큰 산업 가치를 만든다. 스포츠는 이제 경기 결과 이상으로 확장 가능한 IP와 기술이 승부를 가르는 산업이 됐다.
여기에 K스포츠의 기회 요인이 있다. AI 인프라, OTT 경험, 게임·IT 산업, 디지털 수용성, 그리고 K컬처로 쌓은 콘텐츠 비즈니스 역량은 이미 세계 최상위권이다. 우리가 PL이나 MLB가 100년 이상 쌓아온 스토리를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데이터와 AI 기반 스포츠 산업에서는 경쟁력이 있다.
K컬처가 세계적 선도 산업이 되기까지 20~30년 걸렸다. K스포츠는 지금 그 출발선에 섰다. 이제 우리는 남이 펼친 무대에서 잘하는 수준을 넘어 주체적으로 판을 짜는 역할에 도전해야 한다. K스포츠를 대한민국의 다음 미래 산업으로 만들 선택을 할 때다.

2023년 마카오에서 열린 블랙핑크 콘서트. '블랙핑크'가 쓰인 팸플릿을 든 블랙핑크 멤버들 뒤로 약 2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한 해 K컬처 콘텐츠의 수출액은 약 16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블랙핑크 트위터
-심찬구 스포티즌 대표, 조선일보(2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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