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법륭사 금당벽화(法隆寺 金堂壁畵)]

뚝섬 2015. 11. 13. 07:30

  [법륭사 금당벽화 / 담징]

 

579(평원왕 21)631(영류왕 14). 고구려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승려화가-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는 법륭사 벽화.

 

그러나 호류사(法隆寺)의 금당벽화는 금당의 건립 연대, 벽화의 제작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본래 호류사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598년설과 606년설로 엇갈리고 있으나 7세기 초에는 이미 건립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일본학계에서는 690년 낙뢰로 말미암아 호류사가 불타 버린 뒤, 재건되었다는 주장(再建論者)과 재건되지 않았다는 주장(非再建論者) 사이에 논쟁이 뜨겁다. 그리고 재건 연대에 관하여서도 덴무 연간(天武年間, 673686)부터 시작되었다는 설과 지토 연간(持統年間, 687696)에 이루어졌다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실시된 탑지 발굴(塔址發掘) 1939년에 실시된 호류사 후몬원(普門院) 뒤편 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의 발굴을 통하여 호류사는 본래의 위치에서 옮겨져 재건되었다는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호류사의 금당은 수리하던 중 1949 1 26일 화재가 일어나 내진(內陳) 위쪽 소벽(小壁)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 버렸다. 따라서 호류사의 금당벽화에 대한 연구는 불타 버리기 전에 찍어 두었던 사진 자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호류사 금당의 평면 구성은 외진(外陳)과 내진으로 구성된다. 금당의 중앙부에 수미단(須彌壇)이 자리한다. 이 수미단을 10개의 두리기둥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내진이라고 한다.

 

10개의 두리기둥은 다시 각각 사각기둥이 2등분되어 모두 20개의 작은 벽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는 벽면마다 비천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비천도는 해체 수리 중에 일찍 분리되어서 화재를 면하고 그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정면(남쪽 면) 5, 측면 4칸으로 역시 18개의 두리기둥으로 이루어진 외진은 남쪽 문이 3, 나머지 동쪽·서쪽·북쪽은 각각 1개씩의 문이 나 있어 벽면은 모두 12개소가 된다.

 

이 외진의 벽에는 석가정토(釋伽淨土, 동벽)·아미타정토(阿彌陀淨土, 서벽)·약사정토(藥師淨土, 북벽의 동쪽)·미륵정토(彌勒淨土, 북벽의 서쪽)와 여러 보살도 등이 그려져 있다. 이들 벽화는 공통적인 시대 양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벽면에 따라 각기 다른 작가들이 나누어서 그렸던 것 같다.

 

호류사 금당벽화에는 인도나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 당대(唐代) 미술의 영향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중앙아시아적인 채색법이나 철선묘(鐵線描)를 위주로 한 묘법(描法) 그리고 이른바 우리 나라에서 유행한 사방불(四方佛) 사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호류사 금당벽화에 한국계 화사씨족(畫師氏族)의 참여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일본의 ≪반구고사편람 班鳩古事便覽≫에서 백제계(百濟系) 지리불자필(止利佛子筆)이라고 기록된 사실이나 고구려 담징 작이라고 구전되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여 주는 한 예라 생각된다[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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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 금당벽화 첫 정밀조사

문화재 첫 세계문화유산 66 불로 훼손, 수장고에

과학적 분석·보존방법 탐색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일본 호류지(法隆寺) 금당벽화에 대해 일본 문화청(文化廳)이 사상 처음으로 과학적인 종합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금당벽화는 66년 전 화재로 크게 훼손돼, 이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호류지 수장고에 들어 있었다.

일본 문화청은 앞으로 3년에 걸쳐 첨단 과학을 동원해 벽화의 원래 모습을 분석하는 한편, 아사히신문과 공동으로 '보존활동 위원회'를 꾸려서 최적의 보존 방법을 탐색하기로 했다. 다시 일반에게 공개할 수 있는지 여부도 검토할 예정이다. 조사를 마치는 시점은 금당벽화가 훼손된 지 꼭 70년이 되는 2019 1월로 잡고 있다. 벽화에 쓰인 안료의 성분을 분석하면, 고대 아시아의 해외 교류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호류지는 서기 7세기 일본의 전설적인 명군인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사찰로 1993년 일본 문화재 중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금당벽화가 특히 유명하다. 일본 최고(
最古)의 벽화이자 인도 아잔타석굴, 중국 둔황 막고굴과 함께 세계적인 벽화 걸작으로 꼽힌다.

일본 정부는 이 벽화를 보존하기 위해 1934년 호류지 금당을 수리하고, 1940년 당대의 일류 화가를 불러 벽화를 모사하게 했다. 하지만 그 뒤 1949 1월 호류지 금당에 원인 모를 불이 나 벽화 전체가 크게 손상됐다. 이후 호류지 금당벽화는 수장고 안에서 과학이 충분히 발달할 날을 기다려왔다. 일본은 호류지 화재를 계기로 문화재법을 만들었다
.

고구려 승려 담징이 금당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지지만 한국 학계에서도 "단정하긴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일본서기'에는 7세기 초 쇼토쿠 태자가 호류지를 건립했으나 원건물은 670년 큰불에 탔으며 이후 다시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 회화사 권위자인 안휘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담징이 일본에 건너간 게 610년이니 670년에 불에 타서 재건했다면 담징의 진작(
眞作)일 가능성은 낮다. 다만 담징의 화풍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누가 그렸다고 정확하게 밝힌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작가 불명'이라고 본다.

 

-도쿄=김수혜 특파원, 조선일보(1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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