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 달라진 저녁 식당가]
[2030 프리즘]
확 달라진 저녁 식당가
1990년대 초 기업에 입사한 대학 동기들과 만나면 너나 없이 저녁 회식과 야근의 고충을 토로했다. 매일같이 회식했고 그 후엔 퇴근하지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근처의 식당과 주점들도 직장인 업무 사이클에 맞춰 밤 늦도록 영업했다. TV에선 야근 마치고 자정까지 술 마신 뒤 퇴근하는 이들을 위한 숙취 해소 음료 광고가 나왔다.
▶‘다른 저녁’도 있다는 사실을 유럽에 출장 가서 처음 알았다. 퇴근 후 곧장 귀가해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낯설었다. 오후 6~7시면 서울은 초저녁인데 유럽 도시들은 일부 유흥가 외엔 적막강산으로 변했다. 우리나라 생각하고 늦게 나갔다가 문 연 식당을 찾지 못해 저녁을 굶은 적도 있다.
▶어느덧 우리 삶도 그렇게 바뀌고 있다. 한 카드사가 서울 광화문·강남·여의도·구로·경기도 판교 등 5곳 직장인들의 교통카드 이용 시간대를 분석했더니 퇴근 시간이 5년 전보다 평균 19분 앞당겨진 것으로 조사됐다. 오후 6~7시대가 43%로 여전히 가장 많았지만, 7시 이후 퇴근이 5년 전보다 줄었고 오후 5~6시 퇴근이 13%에서 23%로 크게 늘었다. 퇴근 후 어디서 카드를 쓰는지도 봤다. 식당과 주점에 덜 가고, 대신 헬스장 사용이 늘었다. 저녁의 삶이 선진국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서울 광화문에서 음식점을 하던 지인이 최근 가게 문을 닫았다. 2차 손님을 받아 술을 팔아야 하는데 다들 1차만 하고 귀가해 이익이 안 남는다고 했다. 직장인 사이에 밤 9시가 회식 마감 시간으로 굳어지면서 이후엔 영업할수록 손해 나는 ‘적자 타임’이라고 했다. 자정까지 술 마시다가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란 노래 듣고 일어서던 게 옛날 일이 됐다. 이젠 밤 8시에 종업원이 다가와 “라스트 오더(마지막 주문) 하라”고 한다. 밤 9시쯤 식당 내부엔 손님이 없다시피 하다. 과거 이 시각 식당은 시끌벅적했다. 인건비와 재료비의 상승, 코로나 이후 고착된 회식 자제 분위기, 맞벌이 증가 등이 ‘한국인의 저녁’에 근본적인 변화를 부르고 있다.
▶한국인의 근로시간은 2011년까지만 해도 OECD 회원 23국 중 최장이었다. 하지만 2022년엔 5위가 됐다. 장시간 노동을 개선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우리를 추월해가는 중국은 과업이 주어지면 완수할 때까지 며칠이고 밤샘을 불사한다는 뉴스도 접한다. 그렇다면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고부가가치 산업구조로 가야 하는데 우리가 그 길로 가고 있는지 걱정스러운 생각도 든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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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프리즘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도처에 깔린 개저씨(추태를 부리는 아저씨를 일컫는 말)와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저씨는 어디에나 있다. "아기 많이 낳은 순서대로 비례 공천을 줘야 한다"고 말했던 국회의원, 성희롱당한 여직원 어깨를 감싸며 "남자로 입은 상처는 남자로 치유해야 하는 법"이라고 웃는 사장님이 그런 부류다. 이 땅의 여성은 '개저씨 대처법'을 배우면서 나이를 먹는다. 그런데 요즘 종종 복병(伏兵)이 보인다. 바로 '쿨저씨'다.
공무원 김모(33)씨는 내게 '쿨저씨'가 뭔지 알려준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스스로 쿨하다고 믿는 아저씨요. 자신이 미국 오바마 대통령처럼 격식 안 따지는 멋진 아저씨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거죠. 실상은 안 그래요."
여러 사람이 들려준 쿨저씨의 모습은 대충 이렇다. 나이에 비해 젊게 입으려 애쓰고, 골프보다는 등산이나 걷기를 즐긴다고 천명한다. 회식할 때 후배들이 수저를 자기 앞에 놓으면 "이런 것 네가 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직원들에게 "앉아 있지만 말고 빨리빨리 집에 들어가라"고도 한다. 여기까지는 꽤 괜찮아 보인다. 김씨는 그런데 "개저씨보다 더 흉한 게 쿨저씨"라고 말했다. 개저씨는 스스로 아저씨인 걸 부정하진 않는다. 그런데 쿨저씨는 '오빠'인 척하면서 아저씨 짓을 한다. "강남 30평 아파트에 살며 외제 차 굴리는 양반이 술만 마시면 '나는 평생을 물욕 없이 살았고 언제든 사표 낼 준비가 돼 있다. 한 달 수입 100만원이 안 돼도 소신껏 살 거다. 너희는 젊은데 왜 그렇게 못 사느냐' 해요. 속으로 대답했죠.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벌면서 너처럼 잘난 척하고 못 살거든?'"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쿨저씨도 있다. 회사원 박모(27)씨는 "우리 상무님은 걸핏하면 '나는 페미니스트다. 여성이 유리 천장을 깨고 성공하길 응원한다'고 말하면서 '남녀가 평등하게 일하는데 육아휴직 같은 게 왜 필요하냐'고 덧붙이더라고요"라고 했다.
대학원생 권모(31)씨는 진보를 부르짖는 쿨저씨를 비웃었다. "어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사교육을 비판하면서 자기 자식은 특목고나 유학을 보내죠. 진보 정당에 있었던 어떤 전 국회의원도 반미를 외치면서 자식은 미국에서 공부시켰잖아요? 우리는 진짜 아저씨다운 아저씨를 원해요. 지갑과 귀를함께 열 줄 아는 사람 말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엔 '신사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우리에겐 어쩌면 '척'하는 쿨저씨도 '욱'하는 개저씨도 아닌 책임감과 연륜을 갖춘 진짜 아저씨, 그저 '어른'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송혜진 주말뉴스부 기자, 조선일보(1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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