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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망치는 대중 예술] [중국인이 사랑하는 꽃] [大唐工程] ....

뚝섬 2025. 10. 10. 07:16

[권력이 망치는 대중 예술]

[중국인이 사랑하는 꽃] 

[大唐工程] 

[당 현종(玄宗)이 양귀비에게 보낸 사랑의 묘약]

 

 

 

권력이 망치는 대중 예술

 

‘삼국연의’의 관우(關羽)는 살아생전의 뛰어난 무공과 충절(忠節)로 일찌감치 중국 민간이 숭배하는 신(神)이 됐다. 죽기 전 거대한 권력을 맘껏 휘둘렀던 현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민간이 신처럼 떠받든다.

 

땅에서 살다 간 유력했던 사람을 곧잘 그렇게 신으로 만드는 곳이 중국이다. 어떤 한 분야의 창시자임을 일컫는 조신(祖神)들은 대개 그런 곡절을 통해 만들어진다. 해당 영역의 문호를 본격 열어젖힌 사람으로 권위를 삼는 식이다.

 

중국 최고 미녀(美女)로 손꼽히는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가무(歌舞)와 풍악(風樂)을 즐겼던 낭만의 황제, 당나라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또한 죽은 뒤에 신격을 얻었다. 이른바 ‘이원(梨園)’이라고 부르는 곳의 조신이다.

 

이원’은 말 그대로 배나무[梨] 정원[園]이다. 실제 당나라 궁원(宮苑) 한쪽, 배나무 자라는 곳에 있었다. 이곳은 황제 이융기가 처음 조성했다고 알려졌다. 가무와 풍악에 능통한 인재들을 키웠던 곳이다. ‘예인(藝人) 양성소’인 셈이다.

 

당나라 이후 ‘이원’은 노래와 춤, 악기에 뛰어난 예인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그 영향으로 과거 우리의 용례도 풍성했다. 요즘으로 치면 연예계(演藝界)에 해당한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화제가 빈발하는 영역이다.

 

위멍룽(于朦朧)이라는 중국 미남 배우가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사인(死因)조차 아직 의문투성이다. 집권 공산당 최고위층 가족의 연루설 등 온갖 추측만 나돈다. 그가 죽은 베이징은 유언비어(流言蜚語)만 가득하다.

 

황제 이융기의 권력으로 탄생한 ‘이원’의 내력 때문일까. 중국 연예계는 권력층의 손아귀에서 좀체 벗어나기 힘든 구조다. 엄격한 사상적 검열, 그 위에 권력자의 탐욕이 다시 생채기를 더해 자꾸 이상해지는 곳이 중국 대중 예술계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조선일보(2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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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사랑하는 꽃 

 

중국에는 나라를 상징하는 꽃, 국화(國花)가 아직 없다. 이제야 나라꽃을 선정하느라 분주하다. 올해 초 중국 화훼협회가 앞장섰다. 일반인 33만2000여 명을 상대로 조사했다. 우선은 모란꽃이 가장 유력하다. 한자로는 목단(牧丹)이다. 부귀(富貴)의 상징이어서 현세적 가치를 중시하는 중국인 기호에 딱 맞는다. 크고 듬직하며 색깔도 화려해 '꽃의 왕[花中王]'이라고도 부른다. 화훼협회 여론조사에서 거의 80%에 이르는 지지율을 보였다.

그다음으로 꼽힌 꽃은 매화(梅花)다. 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겨낸 뒤 먼저 망울을 터뜨리는 꽃이다. 삶의 고달픔을 이겨내는 의지의 상징이다. 모란 못지않게 중국인 심성에 어울리지만 매화는 이미 대만 국화라서 12%를 조금 웃도는 지지에 그쳤다. 난초꽃은 3위에 꼽혔다. 부드럽고 우아한 자태를 지녔다.

그다음은 연꽃이다. 중국인은 보통 이 꽃을 하화(荷花)로 적는다. 가을에 소담하게 꽃을 피우는 국화(菊花)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중국은 곧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全人大)에 상정해 나라꽃을 결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불청객' 하나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부추꽃, 즉 구채화(韭菜花)다. 모란이나 매화, 국화 등과 견주면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이 부추를 꼽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이 '부추'는 곡절이 남다르다. 사람들은 위에 자라난 부분을 베어 먹지만 부추는 금세 또 자란다. 그런 속성 때문에 중국 증시에서는 부추를 '개미 투자자'에 비유한다. 당하고 털리면서도 계속 증시에 뛰어드는 소액의 개인 투자자다.

'부추를 베다[割韭菜]'라는 말도 자리를 잡았다. 유력한 계층이 힘없는 사람의 재산 등을 부추 베어 먹듯 가로챈다는 뜻이다. 나라꽃 선정에서 이 부추가 줄곧 주목받았다니 개혁·개방 41년의 현대 중국 민생(民生)도 아주 고달픈가 보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조선일보(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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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唐工程에 나선 중국 

 

당나라 수도였던 산시성 시안(西安)은 시내를 둘러싼 성벽이 장관이다. 높이 15m, 둘레 13.75㎞인 성벽은 투석기로도 뚫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해 보인다. 현재 성벽은 명나라 이후 중건한 것이지만, 중국인들은 당의 옛 영광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인식한다. 이런 시안 성벽을 작년 5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찾았다. 당대(唐代)의 황금색 갑옷을 입은 의장대와 관리 복장을 한 이들이 그를 영접했다. '唐'이라고 적힌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행정 책임자인 러우친젠(婁勤儉)산시성장이 '통관문첩(通關文牒)'이라는 문서를 모디에게 건넸다. 통관문첩은 당나라 때 사용하던 일종의 비자다. 서유기의 삼장법사도 통관문첩을 들고 서역으로 떠났다. 21세기 중국이 인도 총리에게 7~8세기 '당나라 비자'를 발급한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당 시대 인물을 유달리 많이 거론한다. 2014년 서울대에선 당에 유학했던 최치원을 예로 들며 한·중 유대를 강조했다. 지난해 베이징에서 일본 대표단 3000명을 만났을 때는 당에서 관리를 지낸 일본인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를 중·일 우호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시 주석이 밀어붙이는 신(新)실크로드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도 당과 관련이 깊다. 과거 당은 육상 실크로드 덕분에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번영했다. 지금 중국에선 '대당공정(大唐工程)'이란 말이 돌고 있다. 한족(漢族왕조 중 가장 강성했던 당나라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현재 패권국인 미국은 이런 중국을 가만두고 보지 않을 태세다. 이달 초 북한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이 시 주석을 만나자마자 미국은 중국의 은행과 대기업(화웨이)을 정조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겉으로는 대북 제재를 내세웠지만, 실제 과녁은 중국이었다. 미국이 왜 갑자기 대중 압박의 강도를 높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중국이 동중국해에 이어 남중국해에도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려는 것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미국은 아시아 바닷길이 모두 중국 손에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중화(中華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시 주석은 중국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대외 팽창 기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반면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에선 '중국 견제론'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처럼 '새 판'을 짜려는 중국과 '기존 판'을 지키려는 미국이 충돌할수록 우리 외교의 설 자리가 좁아진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그런데도 우리 외교는 긴장하는 모습이 없다. 최근 외교부는 미·중 갈등으로 북핵 공조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에 "미·중을 견인하는 주도적 외교를 펼치고 있다"고 했다. 작년 7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미·중 사이에서 러브콜을 받는 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던 '자화자찬'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분위기다. 난제의 해법은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강대국 틈새에서 어려운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비상한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안용현 정치부 차장, 조선일보(1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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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玄宗)이 양귀비에게 보낸 사랑의 묘약

 

[차() 이야기]
 

차()가 중국에서 산업과 문화로 정립된 것은 당()나라때다. 지방특산물로 지방 관리가 진상하던 토산물 품목의 하나였던 차는 당나라가 들어서며 황실공차(皇室貢茶) 제도를 통해 재배관리와 제조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나라는 황실귀족문화를 넘어 주요한 재화가 된 차에 대한 세금을 유통단계마다 부과했다. 세율도 점진적으로 높이며 경제지표와 국세수입의 주요품목으로 산정했다.

 

차로 세수 충당한 당 현종

 

 건국 초기에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영토확장과 부국강병의 초석을 세웠다. 기행과 만행의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도 민생과 경제만큼은 활성화시켰다. 경제규모가 커지며 차 소비도 급증해 공급물량이 늘어났다. 당나라 문화와 경제를 최고점으로 끌어올린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통치비결은 나라사랑이다. 또 당의 쇠락을 이끈 원인도 현종의 양귀비(楊貴妃)에 대한 빗나간 사랑의 결과다. 지도자의 사랑패턴에 따라 나라가 흥하기도 망하기도 한다. 

 

하늘에 제를 올릴 떄만 사용하는 몽정차를 키우던 황차원. /이코노미조선 

 

당 현종은 국민들이 즐겨 마시는 10% 세금 걷어
경세제민에 힘써 부국강병 이뤘지만 여색에 빠져 나라를 위태롭게 해
 

 

이융기는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피바람 속에 살얼음판을 딛고 과감한 군사행동으로 황권에 접근했다. 말년의 측천무후가 마지못해 황제로 복권시킨 중종(中宗)을 독살한 중종의 황후 위씨가 제2의 측천무후를 노릴 때 이융기는 황실근위부대를 먼저 장악해 황후 위씨와 딸 안락공주(安樂公主)를 일시에 제거했다. 이융기는 당나라의 실세인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太平公主)와 연합해 당나라 5대 황제로 예종(睿宗)을 옹립했다. 예종은 큰아들의 양보로 셋째 아들 이융기를 태자로 책봉할 수 있었다.

 

 이융기를 독살하려는 태평공주의 야심을 간파한 예종은 복위 2년 만에 27세에 불과한 이융기에게 제위를 떠맡기듯 물려줬다. 이로써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의 시대가 열렸다. 정적이 된 태평공주와 무씨일가를 멸족시킨 현종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힘써 당나라를 세계 최고의 부유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 당시 당나라의 경제력은 전 세계 GDP의 25%에 육박했다. 

 

차를 뜻하는 한자는 표준어와 방언을 포함해 여러가지 글자와 발음이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차(茶)’도 현종 이전에는 ‘도(荼)’와 ‘차(茶)’를 혼용해 사용했다. 현종이 서문을 작성한 <개원문자음의(開元文字音意)>라는 책을 통해 차를 ‘차(茶)’로 규정해 오늘까지 통용되고 있다. 

 

옛 마방들이 걷던 차마고도. /조선일보 DB

 

현종은 차에 세금을 부과해 세수(稅收)에 충당했다. 차에 붙는 10%의 세금을 피해 밀거래도 성행했다. 당의 도읍(都邑) 장안(長安)에서 산동의 태산까지 차 마시는 문화가 일상화됐다. 국가적인 차원은 아니었지만 티베트 말과 당나라 차를 교환하는 한장차마무역(漢藏茶馬貿易)이 시작됐다. 이는 실크로드와 이어지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효시가 된다. 

 

현종은 당나라의 부국강병과 태평성대를 이끌었지만 지나친 풍류와 여인 사랑으로 당나라를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뜨렸다. 측천무후의 조카 무혜비(武惠妃)와 사랑에 빠진 현종은 무혜비의 계략에 속아 조강지처인 황후 왕씨(皇后 王氏)를 폐하고 왕자를 셋이나 죽였다. 무혜비는 자신이 낳은 수왕(壽王) 이모(李瑁)를 태자로 세우려 했지만 실패하고 악몽에 시달리다 급사하고 만다. 

 

현종을 보필하던 환관 고력사(高力士)는 전국에 미인을 찾아오는 화조사(花鳥使)를 파견하고 자신이 직접 푸젠성(福建省)까지 가서 날씬하고 가무에 능한 강채평(江采萍)을 발굴해왔다. 차에 조예가 깊던 현종은 차를 즐기는 단아한 강채평을 총애하며 매일 차로 승부를 겨루는 투차(鬪茶)로 시름을 잊고 세월을 보냈다. 현종은 차와 시를 좋아하는 강채평을 매비(梅妃)라 칭하고 황궁 안에 매화를 심어 그곳에 살게 했다. 

 

몽정차. /바이두 

 

현종은 화청지(華淸池)에서 무혜비가 낳은 아들 이모와 동행한 며느리 양옥환(楊玉環)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황제만이 누릴 수 있는 귀한 진상품을 며느리에게 선물로 보냈다. 하늘에 제를 올릴 때만 사용하는 진귀한 몽정차(蒙頂茶)와 공이 가장 큰 신하를 선별해 1년에 한 번만 특별히 하사하던 황실공차를 아낌없이 보내며 사랑의 메신저로 활용했다. 

 

당나라는 차를 생산하는 지역을 크게 8구역으로 나누고 다시 64개 지역으로 세분한 후 가장 뛰어난 16곳에서 생산된 차를 황실공차로 지정했다. 처음에는 민간에서 재배하고 만든 차를 지방관리가 진상하는 민공(民贡) 형태였지만 품질의 균일화와 정해진 날짜에 일정량을 공급하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황차원(皇茶園)을 지정해 직접 재배하고 감독했다. 차를 만드는 생산설비도 나라에서 직접 건설하고 전문 인력을 투입해 황실공차를 만드는 관배(官焙)의 형태로 바뀐다. 

 

당 현종의 초상화(왼쪽), 현종과 양귀비가 처음 만난 화청지에 있는 양귀비의 석상. /위키피디아·이코노미조선

 

당나라 쇠락 이끈 양귀비 

 

이모를 변방으로 보내고 양옥환을 도교사원의 도사(道士)로 잠시 출가시킨 현종은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

을 황궁 안에 만들어 양옥환을 불러 밀회장소로 사용했다. 현종은 매비의 질투와 만류를 무시하고 745년 양옥환을 귀비로 책봉했다. 양귀비의 등장으로 매비의 짧은 봄날은 사라졌다. 차를 즐겨 날씬한 매비는 가고 술을 좋아하고 통통한 양귀비(楊貴妃)의 시대가 열렸다. 61세의 현종이 맞이한 양귀비는 27세였다. 현종은 양귀비를 말을 이해하는 꽃, 해어화(解語花)로 불렀다. 중국 4대 미녀 중에서 꽃도 마주치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수화(羞花)의 주인공이 양귀비다.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한 양귀비는 친족들로 조정을 구성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원조인 재상 이임보(李林甫)가 죽자 양귀비의 건달 오빠 양교(楊釗)가 재상이 돼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란 시호를 받아 전횡을 일삼았다. 나이 많은 현종의 눈을 피해 양귀비는 거구의 안녹산(安祿山)과 사랑놀이에 빠졌다. 변방의 절도사였지만 당나라 전체 군사력의 40% 이상을 장악한 안녹산은 사사명(史思明)과 함께 안·사의 난을 일으켜 순식간에 장안으로 쳐들어온다. 피난길에 나선 현종은 마외역(馬嵬驛)에서 근위부대와 신하들의 압박을 못 이겨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환관 고력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귀비는 배나무에 비단 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의 죽음과 더불어 당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서영수 차 칼럼니스트·영화감독/편집=최원철, 조선닷컴(1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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