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아, 뻥치지 마라]
['낯뜨거운 국뽕' 환단고기]
[사관에 얽매이지 말고 사실에 충실해야]
['환·핀 大戰']
[이순신을 위한다는 착각]
[‘관제(官製) 문화 양성' 전략은 총체적 난국]
남자들아, 뻥치지 마라
남자들은 뻥을 친다. ‘뻥치다’는 사투리니 표준어로 바꿔야 하지 않냐고? 사투리 아니다. 전국 모든 지역이 다 쓰는 속어다. 속어니까 신문에서는 쓰지 말아야 한다고? 뻥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속어다. 표준어로 인정된 표현이다. 신문 1면 제목으로 “전재수 뻥치다”라고 써도 문제는 없다.
남자들은 뻥을 잘 친다. 과거 뻥을 잘 친다. 군대에서 뭘 했다는 이야기는 대개 뻥이다. 학창 시절 좀 쳤다는 이야기도 거의 뻥이다. 여자랑 좀 놀았다는 이야기는 흔한 뻥이다. 정치인이나 정치 언저리 인물들이 오래전 에세이에 썼던 성(性)적 무용담도 뻥일 것이다. 욕먹어도 해명을 못 하는 이유는 뻥이라 밝히는 게 더 수치스러워서다.
조진웅이 도망쳤다. 과거 중범죄가 드러나자 은퇴해 버렸다. 많은 남자가 감싸고 나섰다. 제일 재밌는 반응은 “소년원 근처 안 가본 청춘이 어딨냐”는 시인의 항변이었다. 소년원 근처에 가봤을 리가 없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드리며 내 울음을 다 들어준다”는 시를 쓴 사람 주먹은 여리여리했을 것이다.
한국의 가장 큰 뻥은 환단고기다. ‘12개 환국 중 하나인 수밀이가 세계 최고 문명을 이룬 수메르’라 주장하는 책이 뻥이 아닐 수는 없다. 한국은 좌도 우도 민족주의에 경도된 나라라 좌우 가리지 않고 이 뻥을 믿는다. 역사를 과포장하는 건 후진국 심성이다. 지금은 이 모양이나 과거는 대단했다는 자위다.
미국 시사 주간지가 한국을 세계 6위 강대국으로 꼽았다는 뉴스가 소셜미디어를 뒤덮었다. 아주 과학적인 조사는 아닐 것이다. 리스트에 포함된 건 의미가 있다. 지금 한국은 위서(僞書)나 읽으며 환상 속 영토 확장이나 할 만큼 후진 국가가 아니라는 증거다. 뻥으로 자존감 채우는 시대는 끝났다. 그러니까 쫄지 마! 찾아보니 ‘쫄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북한 표준어다. 통합의 마음으로 썼으니 이해해 달라.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일보(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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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뜨거운 국뽕' 환단고기

이재명 대통령이 동북아역사재단 업무보고 당시 언급한 '환단고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가운데 14일 오후 서울 시내의 대형서점에서 한 시민이 '환단고기' 관련 서적을 펴들고 있다. /뉴스1
‘우학도인’이란 주인공이 등장해 “2010년에 통일된 한국이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할 것”이라고 예언한 소설 ‘단(丹)’은 1984년의 베스트셀러였다. 그 책을 낸 출판사가 1986년 후속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출간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책이 옛 역사서로 소개된 ‘한단고기’였다. 사실은 환단고기(桓檀古記)였지만 ‘환’은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 책은 역사에 관심이 많은 개발도상국 소년이던 필자의 머리를 뻥 뚫고 가슴을 벅차게 했다. 가난하고 비좁은 이 분단국가가, 1만년 전에는 아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다스렸던 ‘환국’이라는 광활한 나라였다니! 더구나 환국은 세계 문명의 시원(始原)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 뭔가 뜨거운 것이 몸속으로 차오르는 듯했다. 훗날 생각해 보니 이른바 ‘국뽕’이었다. 환단고기는 상상 가능한 ‘국뽕’의 최대치라 할 만했다.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식이라는 장벽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래전에 ‘동서 2만 리, 남북 5만 리’를 지배하던 대국이 세상에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을까? 신석기 시대를 살던 한 민족이 세계를 압도할 무력을 어떻게 갖출 수 있었을까? 당연한 의문 속에 ‘국뽕’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얼마 뒤 그 책이 1979년 이전엔 사실상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알려졌다. 학계에서 위서(僞書·거짓으로 위조한 책)로 결론 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선 이때 역사에 대한 흥미 자체를 잃었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환단고기’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발흥 과정에서 상고사의 영광을 턱없이 과장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까마득한 조상의 얼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 이후 대부분의 한국사는 ‘대륙의 영토가 한반도로 축소된 상실과 쇠퇴의 역사’로 격하되는 꼴이 된다.
인간다운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역사를 이루는 것은 나라의 크기나 군사력과 무관하다는 것을, 타 민족을 강제로 정복하고 지배하는 역사란 결코 자랑스러울 게 없다는 것을, 20세기의 많은 사람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고대 단군 민족이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의 거대 문명을 이뤘다’는 ‘환단고기’의 내용에서 대동아공영권이나 내선일체론의 잔영이 보인다는 사람도 있다. 깡패에게 얻어맞은 학생이 알고 보니 가해자를 흠모한 셈이다.
이것은 극우 세력의 꿈이었을까? 그렇지만도 않다. 2008년 ‘환단고기’의 새 번역본을 낸 인물은 범민련 남측 본부 의장이었던 친북 인사였다. 그는 “다른 력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뚜렷한 주체 사관을 발견하고 홀로 기쁨에 잠겼다”고 했다. ‘국뽕’에는 좌우도 남북도 없었다. 그런데 이 ‘국뽕’의 최정점이라 할 책을 대통령이 업무 보고 자리에서 언급하고 이것이 역사적인 ‘문헌’이며 책을 둘러싼 ‘논쟁’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넷플릭스보다 재밌기는커녕 낯뜨거운 일이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조선일보(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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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에 얽매이지 말고 사실에 충실해야
뜬금없이 환단고기와 ‘환빠’ 논쟁을 대통령의 발언에서 듣게 돼 무척 놀라고 당황했다. 왜 철 지난 위서(僞書) 진위 논쟁이 21세기의 4분의 1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나왔을까? 배경은 ‘전국역사단체협의회(역단협)’다. 역단협은 환단고기를 진서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많은 대표적인 단체다. 전문 역사 연구 기관이라기보다는 민족사관을 앞세워 정치적 활동을 하는 시민 단체다. 이 단체는 그동안 동북아 역사 지도 폐기, 가야 고분군 유네스코 등재 내용 수정, 전라도천년사·김해시사 부정 등 주로 주류 역사학계에서 이룩한 연구 결과에 대해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반대 투쟁에 성공한 사례를 대표적인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역단협은 대선 직전인 2025년 5월 22일 민주당과 국회의원회관에서 정책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전격적으로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민주당에서는 남인순, 정일영 의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일부 역사 관련 학회에서 이를 알고 5월 29일 민주당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결론은 대통령 선거 이후로 미뤘다.
그 뒤 역단협은 지난 8월 2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범국민 전진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중요한 주제 하나가 ‘대통령 역사 공약 실천’이었다. 대통령 공약 가운데 하나이던 ‘학교 역사 교육 강화 및 역사 연구 기관 운영의 정상화’ 실천을 촉구했다. ‘정부는 역사 기관들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청문회를 거쳐 기관장의 역사의식을 검증하는 것을 법제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특히 동북아역사재단을 중국 동북공정을 옹호하는 식민사관 옹호 기관이라고 지적하며, 고려의 북쪽 국경선이 심양에서 공험진에 이른다고도 했다. 또 다른 발표에서는 광복 후 북한은 김일성이 파견원을 남쪽에 보내 김석형·백남운 등을 데려가 식민사관을 청산했으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해 친일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씨 세습 왕조를 찬미하는 주체사관을 민족사관으로 인정한다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건대, 대통령의 환단고기 환빠 논쟁 발언은 느닷없이 나오지는 않은 것 같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질문한 것도 의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역단협의 행사에서 거론된 내용과 대통령의 발언이 일부 상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뜬금없이 철 지난 환단고기 논쟁을 꺼낸 것이 아니라, 역단협과 민주당의 정책 협약 이행과 대통령 공약 실천을 위해 계획된 발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정학(政學) 유착’이라고 해야 하나? 기우이기를 바란다.
역사 사실은 문헌이나 유물 고증 등 여러 과정을 거친 학문적 결과로 얻어진다. 그래서 학문의 목표는 미래 지향이지만, 결론은 안전해야 한다. 한두 개 단어나 문장으로 일반화한 것은 선동이자 허구로,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할 때의 역사는 철저한 연구 결과로 얻어진 사실에 근거한다. 사실이 거짓이라면 그 역사는 망상이다. 망상을 믿는 민족의 미래는 없다. 사관(史觀)에 얽매이지 말고 사실(史實)에 충실할 때다.
환단고기는 위서 판정을 받은,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창작물이다. 이를 역사서로 취급할 수 없다. 물론 일부의 환단고기를 믿고 싶어 하며, 위대한 상고사를 갖고 싶어 하는, 심정적 동기는 이해한다. 그러나 거짓말을 맹신하게 하는 선조가 돼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지만, 거짓말을 믿는 민족은 반드시 망한다’는 새로운 격언이 필요한 때다.
-이재범 前 국사편찬위원·前 경기대 부총장, 조선일보(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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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핀 大戰'

1993년 북한은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평양 어느 곳의 무덤에서 단군 뼈가 나왔다고 발표한 것이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5000년 전 유골이었고, 함께 발굴한 여성의 골반 뼈는 단군 부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한민족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고고학계가 요청한 발굴 데이터와 측정 방법은 공개를 거부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한국에선 ‘환단고기’가 논란이지만, 유사 역사학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핀란드는 1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야 독립했다. 가슴이 ‘웅장’해진 한 핀란드 작가가 모든 언어의 기원이 핀란드어이며, 이집트 문명도 핀란드 문명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서유럽 도시 대부분을 핀란드가 건설했다고도 했다.
▶환인이 창건하고 단군이 이은 ‘환국’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를 가로지른다고 한다. 민족적 자부심으로 가득찬 한국의 ‘환빠’들이 세계의 원류가 환국이라는 주장을 2000년대 중반 영어로 번역해 퍼 나르기 시작했다. 영미권 최대 커뮤니티인 ‘레딧’에 이 주장이 소개되자, “어, 핀란드도 비슷한 소리 하던데”라며 갑론을박이 시작됐다. 전 세계 역사를 자기 민족 중심으로 재해석하는 두 원시 ‘초강대국’의 등장이었다. 세계 네티즌은 환국과 핀란드가 1만년 전 ‘환·핀 대전’을 벌였다는 스토리를 대량 생산했다. ‘Finno-Korean Hyperwar’를 검색하면 지금도 얘기가 쏟아진다.
▶나치 독일은 ‘조상 유산 연구협회’를 설립해 티베트와 남극까지 탐험대를 보내 아리아인의 기원을 찾았다. 미국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몰몬교의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는 기원전 600년경 이스라엘에서 배를 타고 미국 대륙으로 건너온 고대 민족이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미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설파한다. 몰몬경은 이를 적은 기록이다.
▶유사역사학을 믿는 사람들은 학계의 실증적 반박을 ‘식민 사학’ ‘사대주의’ ‘열등주의’로 치부한다. 이러면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 된다. ‘환핀대전’에는 선사시대 공룡이 환국 편을 들었다가 멸종했다는 우스개가 있다. 핀란드인이 사교성을 잃은 것도 이 전쟁 후유증이라는 익살도 있다. 이런 얘기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 대통령 업무보고 자리에 나올 소재는 아닐 것이다.
-어수웅 논설위원, 조선일보(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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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위한다는 착각

임진왜란은 종전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사회와 한국인의 정서에 큰 영향을 남겼다. 영화나 드라마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임진왜란과 관련된 인물과 전투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는 지역의 풍속과 인심에 대해서도 소개하는데, 그중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를 채록한 부분도 있다. 이중환은 그런 이야기에서 명나라의 도움을 과장하는 내용들을 보고 분노했다. 그는 명나라 장수의 공과 수고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임진왜란 극복의 주력은 우리 장수였다고 했다. 조선의 공로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는 사람은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임진왜란 과정에서 명군이 세운 최고의 공적은 1593년 1월 이여송의 평양성 탈환이다. 평양성 탈환은 육지에서 공수의 주도권이 바뀌는 결정적 전기였다. 이 전투에 조선군도 참전했지만, 당시는 전쟁 초기의 패전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때라 명군이 주도했다.
택리지는 평양성 탈환도 알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공이었다고 했다. 이 대목은 맞는 말이다. 이순신의 수군이 왜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한 덕분에 왜군의 진격이 공세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택리지에 실린 설명은 오류투성이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으로 왜군을 격멸해서 왜군의 진격이 멈췄다고 했는데, 명량해전은 몇 년 후인 1597년의 일이다. 이런 오류가 여러 곳에서 보인다.
뜻이 좋으면 됐지, 내용 오류가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뜻이 좋다고 사실 왜곡을 용납할 수는 없다. 이는 이순신 장군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과정이 뒤틀리면 결론이 왜곡되고 후유증도 커진다. 과거 민주화 운동 시절 ‘운동권’ 인사들이 수없이 외쳤던 말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오히려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하기에 바쁘다.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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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官製) 문화 양성' 전략은 총체적 난국
'官製 봉준호 만들기'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美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保守를 대표하는 명품 문화인
한국엔 보수의 목소리 낼 인물도 문화적 토대도 빈약해
박근혜 정부 좌우 균형 위해 보수 콘텐츠 육성 지원했지만 기이한 '사이비' 콘텐츠로 귀결돼
官製 문화 생산 시도, 실패할 뿐
보수층에겐 이런 고민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감독이 우리에게는 왜 없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한낱 총잡이 영화가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보수주의자의 시대적 고민 같은 것이 녹아있다. 이를테면, 부패한 경관이었지만 반성을 모르는 살인자를 '사적(私的)'으로 처단하는 영화 '더티 해리'에 그는 배우로 출연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죽은 피해자보다 살아 있는 가해자의 인권을 더 우대하는 미국의 법은 공정한가 묻고 싶었다"고 했다. 감독이 된 후 그는 가족의 문제, 국가의 정의를 보수적 시각으로 풀어냈고, 대중은 호응했다. 할리우드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드물다.
박근혜 정부가 내건 캐치프레이즈 '문화 융성'은 이런 염원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보수의 시각으로 가치 있는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을 지원하자.' 한마디로 '우파의 봉준호'를 꿈꿨던 것이다. 정부가 전경련을 앞세워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양복 입은 권력 삐끼들'에게 갈취당한 기업들이 슬슬 '실토'를 시작했다. 언론이 이만큼 했으면 이제 검찰이 '최순실이 뭘, 어떻게 해먹었나'를 밝혀야 한다. 더 궁금한 게 있다. 대통령은 대체 왜?
"순실이에게 재단 하나 만들어줘야겠어요" 했을 대통령은 아니다. 이런 대의명분을 찾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 보수 재집권이 필요하고, 문화 쪽에도 좌·우 균형이 맞아야 하고, 그러려면 한민족으로서 자긍심이 커져야 하고, 그 전제로 몸과 마음도 건전해야 하고….' 그러나 이 정부에서 '문화 융성' '우파 문화 전사 양성'은 매우 '사이키델릭'한 형태로 나타났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전체적으로 그런 기운이 느껴져" "역사를 바로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 같은 발언에 앞서 대통령은 2013년 광복절 축사에서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라 말했다. 이암은 '환단고기' 중 '단군세기'를 썼다. 이 책의 개략적 전제는 1만년 전 단군의 할아버지인 환인이 세운 나라가 연방을 형성했다는 것인데, 제도권 사학자 대부분은 이 책을 위서(僞書)라고 본다. 오히려 소수 종교에서 더 많이 인용된다. 제도권 역사학자들이 뜨악해했다. 우연의 일치랄까, 대통령 연설 이듬해부터 정부는 역사 연구에 40억원 예산을 추가 배정했고, 그중 상당액을 상고사 연구에 투입하겠다고 했다. '민족 자긍심'을 높인다며 반색하는 쪽도 있지만, 적잖은 사학 원로들이 '권력과 사이비 역사관의 결합'이라 비판한다.
국어사전은 '늘품'을 '앞으로 좋게 발전할 품성'이라고 풀어놨다. 그런데 정부가 밀고 있는 '늘품 체조'는 한마디로 뭐 하는 짓인지 모를 체조다. 미스코리아 출신 헬스 트레이너가 만들고, CF 감독 차은택이 낙점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시연했다. 체조 개발에만 예산 3억원이 넘게 들었다. 한참 전, 낯선 체조가 TV에서 나오기에 따라 해봤더니 지루하면서도 몸에 부담이 적잖았다. 차라리 예전 '국민 체조'가 몸도 잘 풀리고 신났다. 무엇보다 이런 '집단 체조'는 시대 역행적이다. '국민 체조'는 일본·독일처럼 '파시즘'이 발호했던 나라가 선호했던 방식이다. 당연히 돈만 날린 꼴이 됐다.
이 정부의 '보수 콘텐츠 만들기'는 사람을 갈아치우고, 돈을 쏟아붓고, '우주의 기운'을 동원해도 결과가 영 신통찮다. 대중이 호응할 '보수의 진짜 가치'를 담는 콘텐츠 대신 기원(起源)이 묘한 결과물만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관제(官製) 문화 양성' 전략은 총체적 난국이 됐다. '관제 문화'를 넋 놓고 받아들일 국민도 별로 없다.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길로 접어든 것은 결코 기이한 일도, 최순실 죄만도 아니다.
-박은주 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조선일보(1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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