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세황, '무']
[화원(畵員)]
[강세황(姜世晃)]
[이달∙강세황] 허균과 김홍도를 최고로 만든 스승들..
강세황, '무'
익숙한 日常의 단면을 포착한, 청신함이 돋보이는 소품

강세황의 '표암첩'에 수록된 '무'. 28.6 x 20cm.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그림은 특별한 순간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일상의 한 장면을 담기도 한다.
‘표암첩(豹菴帖)’에 수록된 26폭 중 하나인 ‘무’는 현재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 반가우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 화가이자 평론가로 이름이 높았던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일상에 대한 시선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화면 가운데 푸른 잎이 난 흰 무가 비스듬히 놓여 있다. 희미하게 이어지는 옅은 먹선으로 무의 윤곽을 그리고, 무의 표면에 짧은 선을 더해 둥근 형태와 결을 나타냈다. 무의 윗부분은 옅은 분홍색을 입히고, 뿌리 주변에는 옅은 노란색을 더했다. 잎은 윤곽선 없이 그렸는데, 큰 잎은 어두운 녹색으로, 작은 잎은 밝은 녹색으로 칠하고 잎맥을 먹선으로 표현했다.
강세황은 그림을 그릴 때 중국에서 들어온 화보(畫譜)를 참고하곤 했는데, 그대로 그리지 않고 구도와 세부에 변화를 주거나 주변에서 사생한 소재를 함께 그리기도 했다. 화보에 잘 보이지 않는 소재를 다룬 ‘무’는 소품이지만 담백한 필치와 맑은 색채가 아름다운, 표암의 관찰력과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소북(小北) 명문가에 태어난 강세황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예술적 재능도 뛰어났다. 창창할 것만 같던 그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6세가 되던 1728년으로, 맏형 강세윤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면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집안 사정도 어려워지면서 1744년 서울을 떠나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1773년 영조(英祖)의 배려로 61세 나이에 벼슬길에 나아갈 때까지 강세황은 안산에서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의미에 대한 고뇌를 떨쳐버릴 수 없었을 시기에 그는 처남 유경종, 이익, 이용휴, 허필 등 많은 이와 교유하며 학문과 예술에 몰두했다. 정치적 현실이나 세속적 바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인식을 발전시켰고 자신의 재능을 한층 성숙시켰다.
강세황은 시에서도 주변의 자연과 사물 등 일상적 소재를 읊은 것이 많다. 그의 ‘녹화헌기(綠畫軒記)’에는 안산 집 주변 자연에 관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담겨 있다. “비록 빼어나거나 특이한 형태는 없지만, 마음이 즐겁고 유쾌히 감상할 수 있고 또한 그 자체로 단정하고 수려하면서 높고 낮은 모양이 시로 읊거나 바라보는 재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김혜원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조선일보(2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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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畵員)
궁궐 장식부터 의궤까지… 김홍도·신윤복도 '공무원 화가'

오는 26일 조선시대 뛰어난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와 이인문의 그림이 동시에 경매에 출품된다고 해요. 김홍도가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와 이인문의 '송석원시회도'라는 작품이에요. 두 작품 모두 1791년 송석원시사의 멤버들이 모임하는 장면을 그린 거예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는 1786년 중인(中人) 출신 문인들이 서울 종로구 일대 송석원에서 결성한 문학 동인이었어요. 김홍도와 이인문은 동갑내기 화가였을 뿐 아니라, 둘 다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조선시대 직업 화가인 화원(畵員)들은 어떻게 뽑혔고, 무슨 일을 했을까요?
조선 회화의 산실, 도화서
'화원'은 조선시대에 그림을 그리는 일에 종사하던 직업 화가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화원들은 '도화서'라는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국가나 왕실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던 관료들이었어요. 일종의 공무원 화가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에게 친숙한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도 모두 도화서 화원 출신이에요. 나라에서 전문 화가들을 모아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신라의 '채전(彩典)'이나 고려의 '도화원(圖畵院)'에서도 확인되는 등 그 뿌리가 아주 깊답니다.
조선시대 화원은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어요. 중인들은 양반을 도와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 의학이나 법률, 천문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 외국과 교류할 때 외국 사람 통역을 맡은 역관 등이 있었는데 화원도 그중 하나였지요. 오늘날 의사나 판검사·통역관 등은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술을 천시했기 때문에 승진에 제한을 두는 등 많은 차별을 받았답니다.
화원이 되는 방법 '취재 시험'
도화서 화원은 조선 전기에 정원이 20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중 5명만 봉급을 받는 정규직이었어요. 나머지는 일이 많을 때 불려와 봉사하는 비정규직이었고요. 하지만 그림 그릴 일이 매우 많아서 늘 일손이 부족했답니다. 비록 벼슬은 낮았지만 그림 그리는 재주로 관직에 오르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대요.
도화서 화원이 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 전문 교육을 받아야 했어요. 그리고 반드시 '취재(取才)'라는 선발 시험을 통과해야 했지요. 당시 시험 과목은 대나무, 산수(풍경), 인물, 영모(새와 동물), 화초 등 다섯 과목이었어요. 응시자는 이 중 두 가지를 선택해 그렸는데, 평가자는 '통(通), 약(略), 불통(不通)' 세 단계로 평점을 매겼어요. 특이한 점은 과목마다 평점에 차등을 둔 거예요. 같은 '통'이라도 대나무는 5점, 산수는 4점이지만, 인물이나 영모는 3점밖에 되지 않았어요. 대나무와 산수를 잘 그리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험이었죠. 이런 방식을 시행한 것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대나무를 사군자의 으뜸으로 여기고, 또 산수와 같은 풍경을 그린 위에 시와 글쓰기를 즐겼기 때문이에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직업 화가들
화원은 단순히 그림 그리는 일뿐 아니라 지금으로 치면 디자인이나 사진작가 일도 도맡아 했어요. 궁전 각 처소에 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병풍이나 외국 사신 접대에 필요한 궁중 장식화, 왕실 잔치나 장례와 같은 행사 장면을 그리는 일뿐 아니라, 해마다 임금에게 바치는 세화(歲畵)와 문배(門排)를 그리는 일도 했어요. '세화'는 새해를 축하하는 그림으로 조선시대 선비들끼리 주고받았는데, 임금도 신하들에게 내려줬대요. '문배'는 설날 새벽에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대문에 붙이는 액막이 그림을 말해요. 도화서 화원들은 매년 12월 20일까지 세화를 그려서 바쳐야 했는데, 모두 합쳐 1380장이나 그려야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복사기도 없던 시대였으니, 연말에 저렇게 많은 세화를 그려내려면 야근의 연속인 고단한 삶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도화서 화원들이 가장 많이 그려야 했던 것은 국가적 의례나 제사 등을 기록한 의궤(儀軌) 그림이었어요. 프랑스 해군에 약탈당했다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속 그림도 당연히 화원 손에서 나온 것이에요.
출세의 지름길, 어진 그린 화가
조선시대 그림 중에서 가장 정밀하고 정성 들여 제작한 그림이 임금 초상화인 '어진(御眞)'이에요. 어진은 임금마다 최소한 한 폭 이상 제작했는데, 10년마다 모사(模寫·원본을 베껴 그림)했대요. 25년을 재위한 정조 임금은 세 차례나 어진을 그렸어요. 어진을 만드는 일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작업이었던 만큼 가장 뛰어난 화원들이 주로 선발돼 맡았어요. 어진은 3명이 함께 그렸는데, 2명이 얼굴과 몸을 나누어 그리고 한 명은 그들을 보좌했다고 해요. 어진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것부터가 화원으로서 최고 영광이었고, 잘 그리면 큰 상을 받기도 했고 출세도 보장됐죠. 단원 김홍도는 29세 때인 1773년에 영조와 왕세자 초상을 그릴 만큼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도화서의 여성 화원]
도화서는 남성 전유물이었을까요? 성현이라는 사람이 펴낸 '용재총화'라는 책에는 도화서에서 일한 화원 '홍천기'가 나와요. 요즘 TV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홍천기도 이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얻은 것이지요. 성현은 이 책에서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에 대해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고 극찬했지만, 홍천기에 대해서는 비록 산수화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재주는 낮다고 평했어요. 하지만 그녀의 외모에 대해선 "홍천기라는 여자는 용모가 매우 뛰어나다"며 칭찬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조선시대 도화서에 여성 화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여성 화원이 그린 작품은 현재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요. 이 때문에 드라마 속 홍천기처럼 그림 실력이 뛰어났을지는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미 능력을 발휘한 여성 직업 화가가 있었다는 점은 기억해둘 만하지요.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기획·구성=김연주 기자, 조선일보(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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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姜世晃)

이명기, 〈강세황 초상〉, 1783년, 비단에 채색, 145.5×94㎝, 보물 제590호, 개인소장. 이 그림은 강세황의 71세상으로, 강세황이 70세를 넘겨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이명기가 그린 것이다. 공신도상 형식으로 화문석 자리 위에 관복차림으로 의자에 앉은 전신 모습을 그렸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포암강공 칠십일세 초상화(豹菴姜公七十一歲眞)’라고 씌어 있고, 그 옆에는 정조가 내린 어제 제문(祭文)이 조윤형의 글씨로 적혀 있다.
조선후기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진 화가. 문관, 평론가.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 산향재(山響齋), 박암(樸菴), 의산자(宜山子), 견암(蠒菴), 노죽(露竹), 표암(豹菴), 표옹(豹翁), 해산정(海山亭), 무한경루(無限景樓), 홍엽상서(紅葉尙書). 서울에서 강현(姜鋧)의 3남 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생모는 광주이씨이다. 후손으로는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 소생인 강인(姜寅), 강흔(姜俒), 강관(姜寬), 강빈(姜儐)과 나주나씨(羅州羅氏) 소생의 강신(姜信)이 있다. 강신과 그의 아들 강이오(姜彛五), 강흔의 손자 강진(姜晉)이 그림으로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교육, 자형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다. 처남 유경종(柳慶種), 친구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과 절친했다. 또한 이익(李瀷), 심사정(沈師正), 강희언(姜熙彦)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는 김홍도(金弘道)와 신위(申緯)가 주목된다.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안산(安山)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처가인 진주유씨 집안으로부터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다. 그는 일찍부터 안산에 세거하고 있던 이현환(李玄煥), 이광한(李匡煥) 등 이익(李瀷)집안의 남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시와 서화에 전념하였다.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64세에 기로과(耆老科)에, 66세에는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관직은 영릉 참봉(英陵參奉), 사포 별제(司圃別提), 병조 참의,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69세에 정조(正祖) 어진 제작의 감독을 맡았다. 이 때 당시 화원 한종유(韓宗裕), 이명기(李命基)에게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 아버지 강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예를 얻었다.
1785년 중국 건륭제의 나이 75세, 즉위 50년을 축하하는 천수연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사행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였다. 이 때마다 기행문과 실경 사생을 남겼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은 영·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51세 때 영조가 신하들에게 그를 보호하여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이른 일을 계기로 강세황이 오랫동안 절필(絶筆)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은 1757년 당시 개성유수로 부임한 오수채(吳遂采)의 초청으로 개성을 여행하며 제작한 실경산수화이다. 이 그림의 독특한 구도, 서양식 원근법, 대담한 채색법 등은 그가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평론가로서 중국과 조선의 수많은 서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품평을 남겼다. 그는 사군자 부분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는 역대 서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일생에 걸쳐 수많은 법첩과 필적을 통해 서예를 배웠다. 그의 글씨는 이왕(二王: 왕희지·왕헌지)을 근간으로 삼아 미불(米芾), 조맹부(趙孟頫)의 서법을 연마하여 해·행·초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서화가 개성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서화의 정통성과 올바른 방법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즉, 참신하고 독자적인 서화관에 의해 실천적으로 문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추구했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속기(俗氣)가 없는 글씨와 문인화의 경지였다.
그림의 소재는 산수·화훼(花卉)를 주로 다루었다. 만년에는 묵죽(墨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진정한 문인화, 격조 높은 수묵화에 도달하기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되었다. 공간감의 확대,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상당수에 달하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아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그의 작품으로는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忝齋畵譜)』, 「지상편도(池上篇圖)」, 「방동현재산수도(倣董玄宰山水圖)」,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표현연합첩(豹玄聯合帖)』, 『표암첩(豹菴帖)』,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약즙산수(藥汁山水)」, 「삼청도(三淸圖)」, 『풍악장유첩(楓岳壯遊帖)』, 「피금정도(披襟亭圖)」, 「난죽도(蘭竹圖)」, 「묵죽팔폭병풍(墨竹八幅屛風)」, 「사군자병풍(四君子屛風)」, 『임왕서첩(臨王書帖)』, 「동기창임전인명적발(董其昌臨前人名迹跋)」, 「제의병(祭儀屛)」 및 중국 사행시 제작한 『수역은파첩(壽域恩波帖)』,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 등 다수가 전한다. 54세 때 쓴 자서전 『정춘루첩(靜春樓帖)』에 「표옹자지(豹翁自誌)」와 함께 수록된 2폭의 자화상, 70세 「자화상」을 비롯하여 7, 8여 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고,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1979년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를 영인·출판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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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李達)∙강세황(姜世晃)
허균과 김홍도를 최고로 만든 스승들..
'외로운 학이 먼 하늘 바라보며,
밤이 차가운지 다리 하나를 들고 있네.
가을바람에 대숲도 괴로워하는데,
온몸이 가득 가을 이슬에 젖었네.'
조선 선조 때 시인 이달이 쓴 '화학(畵鶴)'이라는 시예요. 이달은 아버지가 양반이었지만 어머니는 관아에 속한 기생이어서 서얼 신분이었어요. 그러나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떨쳤지요. 이달이 시를 얼마나 잘 지었느냐 하면, 그의 제자였던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이 "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도전적인 언행을 하여 당시 사람들 가운데 그를 증오하거나 질투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시에 대한 재주가 뛰어나 그의 불손한 행동을 감싸고도 남았다"고 표현했을 정도랍니다. 이달의 호는 '손곡(蓀谷)'인데, 강원도 원주의 '손곡'이라는 시골에 묻혀 살았기에 붙여진 호예요. 허균이 쓴 한문소설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손곡산인전'은 이달의 전기를 소설 형태로 쓴 것이에요.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있는 손곡 이달의 시비(詩碑)예요.
이달이 어느 날 친구 허봉의 집에 놀러 갔어요. 그때 허봉의 동생인 허균과 자리를 함께했는데 허균은 그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이달을 깔보듯 대했지요. 그러나 이달이 그 자리에서 지은 시를 보고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거만함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고 해요. 그때부터 허균은 누나인 허난설헌과 함께 이달에게 시를 배우는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당시 허균 같은 명문가의 후예가 서얼 신분인 스승의 전기를 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어요. 그만큼 허균이 이달을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며 존경했다는 뜻이지요. 허균은 훗날 흩어져 있던 이달의 글과 자신이 외운 시를 모아 '손곡집'이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어요.

‘송하맹호도’는 김홍도와 강세황의 합작품으로 전해져요. 호랑이는 김홍도가, 소나무는 스승인 강세황이 그렸다고 해요. 오른쪽 그림은 김홍도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친 강세황의 자화상이에요. /한국저작권위원회·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또 다른 스승과 제자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로 이름 높은 강세황은 '단원기(檀園記)'
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어요. '옛날이든 오늘이든 대부분의 화가가 한두 가지만 잘 그리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김홍도는 인물, 산수, 신선, 부처, 꽃, 과일, 새와 동물, 벌레, 물고기, 게 등 못 그리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절묘한 작품이라 그를 뛰어넘을 화가가 없다. '단원기'는 강세황이 제자였던 단원 김홍도에 대해 쓴 글이에요. 김홍도의 작품과 성품,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담았지요.
김홍도는 1745년 지금의 경기도 안산에서 중인(中人)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와 한동네에 살던 강세황은 어린 김홍도를 제자로 삼아 그림과 글을 가르쳤다고 해요. 김홍도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그를 도화서 화원으로 추천하였고요. 그 덕분에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되었지요. 이달이나 강세황처럼 훌륭한 스승이 있었기에 허균, 허난설헌, 김홍도 같은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한 것 아닐까요? 스승의날인 오늘, 이달과 허균, 강세황과 김홍도의 이야기를 통해 스승의 은혜와 제자의 도리를 되새겨봐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조선일보(1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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